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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한 가을

기자명 법보신문

이기화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가을은 조락과 우수의 계절이다. 하늘이 맑아지고, 곱게 물든 단풍들이 아름다운 계절이다. 그러나 금년엔 가을답지 않게 가을이 지나가는 것 같다. 유난히 길었던 늦더위 탓인지, 단풍도 곱게 물들지 못한 채 벌써 첫눈이 내렸으니 말이다.

두보(杜甫)는 그가 안록산(安祿山)의 반란으로 장안(長安)에서 억류된 어느 봄날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나라는 깨져도 산하는 남고
옛 성에 봄이 오니
초목 우거져.....
시세(時勢)를 설워하여
꽃에도 눈물짓고
이별이 한스러워
새 소리에도 놀랜다.

나라가 깨어지는 일은 정말 슬픈 일이다. 불교에서도 국가의 은혜는 네 가지 무거운 은혜의 하나로 치고 있다. 나라는 우리가 안심하고 살 수 있는 물리적 및 정신적 환경을 제공한다. 나라가 깨지는 것은 그 환경을 박탈당하는 것을 의미한다. 나라를 잃은 백성들은 가을 날 바람에 휘날리는 낙엽처럼 정처 없이 흩어지게 되리라. 그리고 보도 위에 떨어져 뭇 사람들에게 짓밟히리라.

그러나 두보는 나라는 깨져도 산하는 남는다고 했다. 봄이 오면 초목이 우거지고, 꽃이 피고 새도 운다고 했다. 나라는 깨져도 거기 그래도 슬픈 낭만이 있을 수 있다.

올해 가을, 참으로 우리를 우울하게 하는 일이 발생했다. 지난 10월 9일 북한에서 실시한 핵폭발 실험이다. 미국의 위협에 대하여 자위적인 수단으로 불가피했다는 것이 북한의 주장이다.

김일성 전 주석이 한반도의 비핵화를 유훈으로 남겼지만 불가피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이 과연 용납될 수 있을까? 제2차 세계대전 때 완강히 저항하던 일본은 1945년 8월 6일과 9일에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된 단 두 개의 원자폭탄으로 8월 15일 미국에 무조건 항복했다. 수일 내에 십이만 명의 사람들이 죽었고, 또 살아남았어도 방사능 피폭의 후유증으로 오래 살지 못한 사람들의 수를 헤아리기 어렵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는 봄이 와도 초목이 우거지지 않고, 시세를 서러워해 눈물 질 꽃도 피지 않고, 이별을 한스러워 할 새소리도 사라져 버린 죽음의 땅이 되고 말았다.

핵폭발은 그 주위 수km 지역의 생명체를 말살하고, 그 주변의 토양, 지하수 및 대기를 방사능으로 오염시켜 다년간 생명체가 살 수 없는 죽음의 땅으로 만든다. 또 방사능에 피폭된 사람들의 유전자를 변형시켜, 그 고통을 후세에 까지 넘긴다.

자비는 불교의 생명이다. 살생이 불가피할 경우에도 최소한으로 선택하는 살생유택(殺生有擇)이 불교의 정신이다. 핵폭탄은 그 피폭지역의 모든 생명을 선택 없이 말살할 뿐만 아니라, 또 다년간 생명체가 다시는 존재할 수 없도록 만드는 무자비한 극악의 무기이다. 이러한 이유로 전 세계가 핵무기의 생산 및 그 확산을 엄격히 통제하고 있는 것이다.

한반도에서 실시하는 핵실험에서 방출되는 방사능 물질은 우리의 청정한 국토를 생명이 살 수 없는 죽음의 땅으로 만들어 버린다. 이것이 어떠한 이유로도 한반도에서 핵실험이 실시되어서는 안 될 이유이다. 우리는 우리 후손에게 청정한 국토를 남겨주어야 할 의무가 있다.

북한에 인도적인 지원을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경제적 지원이 북한의 핵실험에 유용되는 것은 철저히 막아야 한다. 아울러 북한의 대량살상무기가 국외로 반출되는 것도 철저히 방지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것이 불교의 생명인 자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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