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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고 또 쉬면 고목나무에 꽃이 핍니다”

기자명 법보신문

칼럼니스트 조 용 헌 씨

<사진설명>장성 축령산 자락에 위치한 조용헌 씨의 토굴에는 바람이 불면 편백나무 향기가 풍경을 울린다.

언제부턴지 도시인들은 밤하늘 쳐다보는 일을 잊었다. 스모그에 뒤덮인 서울 하늘은 진면목을 보여주지 않고, ‘별 볼일 없는 사람들’이 돼버린 도시인들은 밤이면 별 대신 TV를 통해 스타를 만난다. 또 신문을 뒤적이며 주식시세나 이런저런 기사를 읽으며 휴식을 갖는다. 지긋지긋한 정쟁, 끝이 보이지 않는 부동산 논란, 가슴을 섬뜩하게 하는 각종 파렴치범죄들에 우리의 영혼은 더욱 지쳐만 간다.

그러다 이따금씩, 신문이나 잡지에서 시골 풍광이나 전원의 풍경을 만날라치면, 갑자기 숨통을 찾은 사람들처럼 긴 숨을 몰아쉰다. ‘자연, 고향, 어머니, 휴식, 언젠가는 내가 돌아갈 곳’이라는 생각들을 떠올리면서.

조선일보 칼럼니스트 조용헌 씨는 어쩌면 현대인들에게 그런 작은 휴식이나 혹은 기혈을 뚫어주는 숨구멍 역할을 맡고 있는 이일지도 모른다. 그의 칼럼에는 사찰과 선사, 사주, 풍수, 전원, 유서 깊은 가문, 할머니, 고향 같은 소재들이 자주 등장한다. 그의 글이 유독 열독률이 높은 이유도 바로 이런 소재들에 있을 것이다.

그를 처음 만났을 때 대뜸 그의 종교를 물어보았다. 「능엄경」으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오랫동안 불교공부를 했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그의 삶 속에서 불교가 어떤 존재이며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가 궁금했던 것이다.

“선생님은 불자가 맞습니까?”
“왜요? 아닌 것 같나요?”
“글쎄요. 맞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선생님의 글에서는 불교에서 ‘방편’으로 치부하는 것들이 많이 등장하잖아요.”

휴식이 곧 수행이다

“불교 냄새를 피우지 말아야 진짜 불교인이죠. 예전에 한 스님이 강원룡 목사가 주최하는 종교간의 대화에 초청된 적이 있어요. 거기서 그 스님이 ‘오늘처럼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을 적이나 원수로 대하지 않고 사람과 사람으로 대한다면, 그래서 우리 민족이 하나가 될 수 있다면 우리 불교는 없어져도 됩니다. 그냥 기독교라는 간판만 내걸어도 좋은 거지요’라고 한 적이 있답니다. 나는 그 스님이 진짜 불교가 무엇인지를 보여준 것이라 생각해요.”

“그럼 선생님도 수행을 하고 있습니까?”

“수행이 따로 있나요. 스스로와 마주하면서 내 속에서 들리는 우주의 원음을 관조하고 음미하는 게 수행이죠. 그런데 휴식이 없으면 수행이 이루질 수가 없지요. 요즘 제가 수만 평의 편백나무 숲이 딸린 작은 토굴을 하나 마련했는데, 이름이 휴휴산방(休休山房)이라고 지었어요.”

“왜 이름이 휴휴산방인가요?”

“『벽암록(碧巖錄)』에 나오는 ‘휴거헐거(休去歇去)면 철목개화(鐵木開花)’라는 화두에서 따왔어요. ‘쉬고 또 쉬면 쇠로 된 나무에 꽃이 핀다’는 뜻이죠.”

한 달여 후, 그의 토굴까지 찾아가게 된 인연은 이렇듯 도심에서의 첫 만남에서 비롯됐다.
나지막한 산세가 포개진 전라남도 축령산 자락. 사립문을 열고 돌담길을 올라가자 흙벽으로 된 아담한 한옥이 한 채 나타났다. 문 밖의 인기척을 들은 주인장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서울서 막 도착한 손님을 맞이했다.

조용헌 씨의 토굴은 원래 어느 스님이 수행을 하기 위해서 만든 처소였는데, 사정이 생겨 스님이 멀리 떠나게 되자 구입한 것이다. 황토로 지어진 집, 편백나무 숲이 병풍처럼 펼쳐진 토굴 주변에는 인가가 거의 없다. 차 소리나 사람소리는 물론 가로등 하나 없는 원시적 풍광 그대로다. 본시 수행용도로 만들어진 집이라서 모든 조건들이 수행을 하는데 딱 맞아떨어지게 되어 있다. 그런데 이 집에는 냉장고나 조리기구가 없다. 따라서 먹을 것도 없다. 윙윙 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냄새도 나서 치워버렸다고 했다.

결국 배고픈 중생은 선생을 따라 탁발 아닌 탁발을 나섰다. 산 하나를 넘으니 수만 평의 편백나무 숲이 펼쳐진다.

“편백나무 수만 평이 딸린 집이라고 하더니, 편백나무 숲 귀퉁이에 셋방을 사는 거였네요.”

“아니에요. 이곳 산신령이 얼마전에 임대해주고 갔어요.”

길을 따라 또 하나의 산등성을 넘어가니 저만치 작은 집 한 채가 나타난다. 이곳은 선생의 글에도 등장한 적이 있는 ‘세심원’이다. 이곳까지 오는데 걸린 시간은 1시간 반. 인간이 먹기 위해 사는 존재는 아닐진대, 어쨌든 1시간 반을 밥 한 끼를 위해 걷는 사람이 오늘날에도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걷고, 쉬며 우주를 음미

밥을 먹고 나니 다시 돌아갈 1시간 반 거리의 산길이 기다리고 있다. 앞서 산길을 걸어가던 조용헌 씨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옆을 가리킨다. 그곳에는 100여개의 탐스럽게 열린 감이 대롱대롱 달린 감나무가 싱그러운 모습으로 서있다.

“요즘 저 감나무를 보면 참 기분이 좋아져요. 저 나무 한 그루에 우주가 담겨있어요. 봄 여름동안 수없이 이 길을 다니면서도 저기에 감나무가 있는 줄도 몰랐거든요. 그런데 가을이 되어 시절인연을 만나니 저렇게 붉고 선명한 모습으로 ‘나 감나무요’ 하면서 스스로를 드러내고 있지 않습니까.”

“선생님은 이렇게 스스로를 쉬게 하시나 보죠.”

“제겐 이런 것들이 휴식이 아니라 수행입니다. 불교에서는 10년 경전공부, 10년 참선, 그리고 10년 만행이 기본이라고 해요. 저는 10년간 대학에서 경전공부를 했고, 또 10여년 넘게 산천을 돌아다녔으니 이제 앞으로 10년은 참선에 몰입해야죠.”

단풍이 시절인연을 만나 저마다의 색을 드러낸 축령산길을 내려오면서 조용헌 씨의 이야기는 계속 이어졌다.

“저는 1700개 화두 중에서 최고의 화두는 ‘나는 누구인가’라고 생각해요. 칼럼을 쓰면서도 항상 ‘정녕 나는 누구란 말인가?’라고 되묻곤 하죠. 나는 누구인가, 그리고 우리 한국인은 누구인가.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는 일이야말로 인생 최대의 즐거움이요 안심이자 보람이죠. 저는 이 물음을 9가지 각도(九宮)에서 추구해왔어요. 문(文)·사(史)·철(哲)·유(儒)·불(佛)·선(仙)·천문(天文)·지리(地理)·인사(人事)가 바로 9궁이에요. 이 9궁의 틀을 가지고 산천과 도시, 사람을 만나면 한두 가지는 걸리게 마련이에요. 거기에서 저는 가장 한국적인 ‘토종’을 찾고 있어요.”

그의 이야기는 토종대학 설립으로 이어졌다. 최근 거대한 프로젝트를 진행 중에 있는데, 바로 가장 한국적인 토종문화를 보존하고 가르치는 대학을 설립하겠다는 것이다. 이 대학은 캠퍼스와 건물이 필요 없다는 점이다. 그래서 등록금도 필요 없고, 학력과 나이 제한도 없다. 선생과 학생이 딱히 나눠지지도 않는다. 교재도 물론 한국의 산수와 풍경이다.

“예전에 화랑들이 산천을 유람하며 닦았다는 풍류도가 토종대학의 커리큘럼인가 보군요.”

“풍류도에 동학의 접주들이 합치된 거죠. 명산대천에다 골짜기마다 숨어있는 사람들이 모두 선생이자 교재거든요.”

앞으로 10년은 참선 돌입

“그 사람들이 얼마나 되나요?”

“제가 파악하고 있는 각계의 고수들이 대략 30명 정도 돼요. 앞으로 300명 정도를 발굴할 예정이에요. 300명이면 300과목의 커리큘럼이 성립되는 거죠.”

어느덧 산등성이에서 붉은 빛이 사라지고 어둠이 내려오자 휴휴산방에는 별들이 하나둘씩 내려오기 시작했다. 숲을 가로지르는 긴 바람소리, 고목에서 드리워진 검은 그림자, 수만 개의 별빛으로 장식된 하늘…. 갑자기 우주의 진면목이 가까이 다가오는 듯 했다.

그의 집 사립문을 나서면서 다시한번 궁금증이 밀려왔다.

“선생님, 불자가 맞나요?”
“아니, 아직도 불교라는 단어를 붙잡고 있었습니까. 휴휴산방에 왔으니, ‘불교’에 대한 집착도 ‘불교가 아닌 것’에 대한 분별도 다 내려놓아야지요. 허허.”

조용헌 씨의 맑고 부드러운 웃음소리가 편백나무 숲의 향기에 섞여 바람을 타고 밀려왔다. 

탁효정 기자 takhj@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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