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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찬주 장편소설 - 인연 16

기자명 법보신문

제 4장 구도의 길

정찬주 장편소설  삽화·송영방

“중노릇 잘해야겠다는 신심이 솟구쳤다. 그것을 불가에서는 결코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는 ‘말뚝신심’이라고 했다. 일타는 송광사 정랑에 똥만 싸고 가는 수좌가 되지 않겠다고 이를 악물었다 ”

송광사에는 금강산에서 오도를 한 효봉이 있었다. 효봉은 송광사 삼일암 선방에서 조실스님으로 머물면서 선방 수좌들을 지도하고 있었다. 영천이 송광사를 가는 것은 일타를 효봉에게 소개해 주기 위해서였다. 일타 역시도 참선을 하겠다고 통도사 사리탑에서 스스로 맹세하였기 때문에 송광사 삼일암 선방에서 첫 안거를 나고 싶었다. 일타의 생애 중 선(禪)의 길로 들어서는 첫 안거인 셈이었다.

송광사는 보조국사 이후 16국사를 배출하였다고 해서 승보종찰(僧寶宗刹)이라고 불렀고, 해인사는 팔만대장경이 있으므로 법보종찰(法寶宗刹), 통도사는 부처의 사리를 봉안하고 있어 불보종찰(佛寶宗刹)이라고 불렀다.

영천과 일타가 송광사 어귀에 도착했을 때는 한낮이었다. 아침 공양만 했으므로 다리에 힘이 빠져 아무 데라도 주저앉고 싶은 상태였다. 농부들이 논밭으로 일하러 나가 마을마다 텅 비어 있었으므로 점심은 탁발을 접고 굶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계곡은 통도사보다 봄이 더 무르익어 있었다. 송림 사이에는 진달래가 만발하여 다홍치마를 널어놓은 것처럼 붉었다. 소나무도 수액의 활동이 왕성하여 솔잎 냄새가 향긋했다.

“영천스님도 송광사에서 방부를 들이시겠습니까.”
“나는 고승의 지도를 받아본 적이 없는 독각(獨覺)이다.”
“이제 기침을 하지 않으시니 선방에 들어갈 수도 있지 않습니까.”
“아니다. 효봉 조실스님만 뵙고 다시 또 길을 떠날 것이다. 이제 나는 혼자 참선하고 정진하는 것이 편하다. 이것이 내 분(分)이다. 분이란 나눌 분자가 아니더냐. 혼자 정진하는 것이 내 몫으로 나눠진 업이라는 것이다.”

일주문이 보이는 산길을 오르는데 장기와 까투리가 나타나 종종종 길라잡이를 해주었다. 그들을 무서워하지 않고 한참을 앞에 서서 앙증맞게 길을 안내했다. 영천은 기분이 좋아져 말했다.

“날짐승들이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는 것을 보니 송광사의 가풍을 알 만하다.”
“영천스님, 송광사 가풍이 어쨌다는 것입니까.”
“산짐승이 사람을 무서워하는 것은 사람에게 살생심이 있기 때문이다. 살생심의 반대는 자비심이겠지. 이제 알겠느냐.”
“처음 듣는 얘기입니다.”
“송광사에는 자비심이 넘쳐나는구나. 스님들이 수행을 잘해 마음속의 살생심을 다 씻어냈기 때문이야. 너도 이번 하안거 동안에 살생심을 씻어내고 자비심을 키워 보거라.”
“영천스님, 저는 화두를 들고 참선만 하겠습니다. 그거만 하면 다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까. 참선만 하면 살생심 같은 것도 절로 씻어지는 것이 아닙니까.”
“옳은 얘기다. 은사스님이 그렇게 당부하더냐.”
“은사스님께서는 입적하시기 몇 달 전부터 저에게 참선하라고 신신당부를 했습니다.”

일타의 말은 사실이었다. 고경이 통도사 주지 자리를 내놓고 경주로 도망쳤다가 다시 돌아온 이후, 안양암에 머물 때였다. 강백으로 살아온 자신의 삶에 회의를 느끼는지 고경은 편안하게 불경을 보다가도 갈등을 했다. 특히 일타의 넷째 외삼촌이자 상좌인 진우가 해제 철이 되어 안양암에 인사하러 올 때마다 가벼운 실랑이를 벌였었다. 한 번은 진우가 ‘스님, 금강산으로 참선하러 가십시다’고 하니 ‘가기는 가야 되겠는데, 그거 원 참선하려고 해도 당체 의심이 안 나서 못하겠으니’ 하고 슬그머니 발을 뺐다. 고경은 불경을 가르치는 강백으로 살라는 것이 자신의 업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고경의 업이 그러하니 아무리 진우가 간절하게 사정해도 소용이 없었다.

고경은 상좌인 진우를 좋아하여 밤새 이야기를 나눌 때가 많았다. 자신의 방에서 진우의 이부자리를 펴놓고 기다리기도 했다. 어느 날인가는 진우가 ‘어째서 그렇게 의심이 안 납니까. 있는 무도 아니요, 없는 무도 아니요, 유무 중간의 무도 아닌 무, 이것이 무슨 무입니까’ 하고 물으니 고경은 ‘진우수좌가 그렇게 물으니 의심이 나는 것도 같구먼’ 하고 말하더니 하루 이틀 지난 뒤에는 ‘내가 논 정리도 해야겠고, 가지고 있는 살림살이도 처분해야 하니 가을에 금강산으로 가겠네’ 하고는 발을 뺐다. 진우가 가을에 다시 돌아와 또 물으니 ‘봄에 가겠으니 그때 진우수좌와 함께 참선하세’ 하고는 미루기만 했던 것인데 겨울에 미질을 보이더니 조용히 숨을 거둔 것이었다.

입적이 가까워져서였다. 고경은 자신의 죽음을 예감했던지 일타에게 ‘아무래도 겨울을 넘기지 못할 것 같구나. 더 살 수만 있다면 우리 충공(충청도 공주 태생이라는 일타의 별명)이를 앞세우고 금강산에 올라 조사선을 하고 싶구나. 넌 강사 되지 말고 선사가 되거라’고 미소를 지으며 당부하거나 ‘내가 살아 있어야 널 유학 시켜 줄 텐데 내가 죽고 나면 누가 널 공부시키겠느냐. 아니, 그것보다는 그런 것 잊어버리고 넌 선사가 되거라’ 하고 무언가 마음속의 말을 드러내곤 했는데, 이때 일타는 막연히 선사가 될 것을 발심했고, 고경이 입적을 3일 앞두고 일타를 불러 ‘내생에는 참선을 하겠다’고 자신의 서원을 고백하여 일타로 하여금 확실하게 재발심케 했던 것이다.

특히 영천의 한 마디도 일타에게는 선의 길을 걷는데 큰 용기를 주었다. 고경의 49재 이후 고경이 남긴 재산을 진우의 사형 동화당이 쇳대 뭉치를 들고 다니며 정리를 주도하고 있었는데, 그때 영천이 그 모습을 보고는 일타에게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불과 한 달 전의 일이었다.

“일타야, 너는 저 쇳대 뭉치를 보고 무슨 생각이 드느냐.”
“욕심을 부리는 것은 염라대왕의 감옥 문 여는 자물쇠를 잡아당기는 거와 같다고 『자경문(自警文)』에서 배웠습니다.”
“그렇다. 쇳대 뭉치를 탐하는 것은 지옥문을 여는 것이다. 그러니 넌 청정 수행자가 되어야 한다. 『자경문』의 이 구절이야말로 만고의 진리가 아니겠느냐.”

재물 쌓고 색 밝히면 염라대왕 감옥 열고
청정행자는 아미타불 연화대로 모셔가네.
利慾閻王引獄鎖
淨行彌陀接蓮臺

이윽고 두 사람은 법당으로 들어가 참배하고 종무소로 갔다. 종무소의 원주는 일타보다 나이가 두세 살 많아 보였고, 삭발한 지 오래 되어 머리카락이 듬성듬성 자라 있었다.

“방부 들이러 왔습니다. 지금 주지스님을 뵐 수 있습니까.”
“주지스님은 출타하셨습니다.”
“조실스님은 뵐 수 있습니까.”
“잠깐 기다리십시오. 조실스님께서는 공양 하신 후 노스님들과 다담을 나누셨습니다. 지금도 조실채에 계시는지 가보고 오겠습니다.”

일타의 빈 뱃속에서 쪼르륵 소리가 났다. 그러나 배는 허기만 질 뿐 참을 만했다. 얘기로만 듣던 효봉을 만나게 되어 긴장한 탓이었다. 일타는 통도사 극락암에서 경봉에게 효봉이 금강산에서 절구통수좌라는 별명을 들으며 용맹 정진하여 마침내 오도했다는 얘기를 자주 들었던 것이다.

잠시 후 원주가 영천과 일타를 조실채로 안내했다. 원주는 조실채로 가면서 일타에게 은근히 겁을 주었다.

“조실스님보다는 주지스님에게 잘 말씀드려야 방부를 들일 수 있습니다. 주지스님께서 절 살림을 워낙 깐깐하게 하시는 분이니까요. 허투루 곡식이 새면 그날은 난리가 납니다. 된장도 아깝다고 고추를 똥에 찍어먹으라고 야단칠 정도니까요.”

조실채에는 효봉 혼자 앉아서 고요히 좌선을 하고 있었다. 원주가 인기척을 서너 번 내자 효봉이 방문을 조금 열고 고개를 내밀었다. 영천과 일타는 고개를 깊이 숙이고 합장을 했다.

“어디서 왔는가.”
“통도사에서 왔습니다.”
“젊은 수좌는.”
“저도 통도사에서 왔습니다. 경봉스님께서 안부를 전하라고 했습니다.”
“그대는 경봉스님을 어찌 아는가.”

효봉은 경봉이라는 말에 반색을 하며 작은 눈을 크게 뜨고 말했다.

“제 은사는 고경스님이시나 때때로 극락암으로 올라가 경봉스님을 뵙고 수좌의 길을 동경하게 됐습니다.”
“허허. 상호가 아주 영민하게 생겼구먼. 어서 들어 오거라.”

좁고 소박한 방으로 들어서 영천과 일타는 효봉에게 귀의하듯 삼배를 올렸다. 일타는 경봉을 처음 볼 때도 그랬지만 효봉을 대하면서도 대인(大人) 같다는 느낌에 압도되었다. 키가 장대했고 이목구비에는 범상치 않은 기운이 흐르고 있었다.

“무엇하러 왔는가.”

영천이 먼저 답했다.

“저는 만행 중이고 이 수좌는 하안거 방부를 들이려고 왔습니다.”
“방부를 들인다면 누구라도 받아야지.”

효봉은 일타를 다시 한 번 쳐다보더니 말했다.

“몇 살인가.”
“올해 열여덟 살입니다.”
“우리 선방에 든다면 가장 어린 나이로군.” “큰스님, 꼭 입방케 하여 주십시오. 용맹 정진하여 은혜를 갚겠습니다.”

효봉은 잠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무언가 여의치 않은 일이 있는 듯 어깨를 좌우로 흔들더니 눈을 뜨고 말했다.

“주지스님을 만나고 왔는가.”
“출타 중이라서 뵙지 못했습니다.”
“주지스님이 살림하느라 고생이 많지. 더 이상 선방 수좌는 방부를 받지 않겠다고 할지 모르니 이렇게 사정해 보거라.”

일타는 효봉의 자비로운 말에 감격했다. 주지가 방부를 받지 않고 돌아가라고 하면 ‘조실스님 이하 대중이 다 가면 가겠습니다’ 하고 버티면 된다고 일러주는 것이었다. 더불어 송광사의 공양간 사정까지 ‘쌀 많이 있다’고 알려주면서 주지가 똑똑한 수좌를 만나면 혼이 좀 날 것이라고 웃으며 말했다. 주지는 객승이 오면 양식을 아끼기 위해 누구든지 간에 대뜸 돌아가라고 하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효봉은 그런 것에 초탈해 있었다. 경봉이 금강산에서 효봉을 만난 이후 도우(道友)가 됐다는데 과연 서로 탁마하는 자비로운 도반이 분명했다.

해질 무렵에야 주지가 돌아와 영천은 객사로 가고 일타 혼자서 종무소로 갔다. 주지는 어린 일타를 보더니 다른 사무를 보면서 눈길도 건네지 않고 물었다.

“강원은 마쳤는가.”
“중학교를 다니느라 그럴 시간이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강원을 마치고 오게. 우리 송광사는 강원을 마쳐야 선방 방부를 받는다네.”

효봉의 얘기와는 달랐다. 송광사 선방에 들려면 자격을 갖춰야 하는 모양이었다. 일타는 눈앞이 캄캄했다. 한 달을 고생해서 걸어 왔는데 다시 통도사로 돌아가라고 하니 다리에 힘이 쭉 빠지는 듯했다.

그때였다. 일타는 효봉이 일러준 대로 말했다.

“주지스님, 선방 입실에 무슨 자격이 있습니까. 조실스님 이하 대중이 다 가면 가겠습니다. 방부를 받아주십시오.”

주지는 그제야 일타를 똑바로 보더니 미소를 지었다. 아무라도 송광사에 오면 먼저 가라고 하는 것이 주지의 인사법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주지 때문에 발길을 돌린 수좌들이 제법 많았는데, 그것을 알고 있는 효봉이 일타에게 퇴짜 맞지 않는 요령을 알려주었던 것이다.

“이보게. 난 입실 자격만 따져보는 주지라네. 방부를 받고 안 받고는 조실스님께서 결정하니 큰스님께 가서 허락을 받으시게.”
“이미 허락을 받았습니다.”
“하하하. 나이는 어린데 강골 근기로군.”
“고맙습니다.”
“나한테 고마워할 것은 없네. 송광사 정랑에 똥만 싸고 가는 수좌는 되지 말게. 우리 조실스님처럼 선방 좌복에 엉덩이가 물러져 문드러지도록 정진하게나.”

객사로 돌아와 보니 영천은 또 떠나려고 바랑을 챙기고 있었다. 그리고 원주가 전해주는 말에 의하면 내일 도인이라고 소문난 성철 수좌가 하안거를 나기 위해 송광사로 온다고 했다. 성철이 선방에 방부를 들인다면 송광사에는 효봉과 성철, 두 사람의 도인이 머무는 셈이었다. 일타는 은근히 신바람이 났다. 중노릇 잘해야겠다는 신심이 솟구쳤다. 그것을 불가에서는 결코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는 ‘말뚝신심’이라고 했다. 일타는 송광사 정랑에 똥만 싸고 가는 수좌가 되지 않겠다고 이를 악물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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