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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찬주 장편소설 - 인연 18

기자명 법보신문

제 4장 구도의 길

정찬주 장편소설  삽화·송영방

“세상 어디고 간에 선방 아닌 곳이 없었다. 머슴이 코를 골며 자는 골방이 선방이고, 애통하게 울부짖는 초상집이 선방이고, 폭우에 쓰러진 벼를 일으켜 세우는 논이 선방이고, 폭우가 할퀴고 간 끊어진 다리를 복구하는 현장이 바로 선방이었다 ”

일타는 하안거를 해제한 날 송광사 경내를 한 바퀴 돌았다. 감로암으로 올라가 원감국사 비를 돌며 효봉에게 탄 화두 간시궐을 중얼거렸다. 어느 할머니 신도는 허공을 향해 간시궐을 외는 일타를 보더니 도리질을 하며 손사래를 쳤다. 젊은 수좌가 허기 져 간식을 달라고 중얼거리는 줄 알았던 것이다.

‘간식을, 간식을.’

그러나 일타는 하안거 동안 화두를 타파하지 못한 분심이 일어 ‘간시궐’을 외고 있는 중이었다. 일타는 계곡물 소리가 들리는 반석 위에 앉아 화두를 들기도 했다. 화두에 몰입하면 계곡물 소리는 물론 새소리조자 들리지 않았다.

포행을 할 때도, 구참 수좌들과 말할 때도, 장작을 팰 때도, 혼자 있을 때도 간시궐 화두를 들었다. 그런 일타를 보고 어느 수좌가 격려를 했다.

“좀 더 밀어붙이면 동정일여(動靜一如)까지는 가겠구먼.”
“스님, 동정일여가 무엇입니까.”
“행주좌와(行住坐臥)라, 갈 때나 머물 때나 앉고 있을 때나 누워 있을 때나, 어묵동정(語默動靜)이라, 말할 때나 침묵할 때나 움직일 때나 가만히 있을 때나 화두가 성성한 것을 동정일여라고 하지. 허나 그것만으로는 어림도 없고 공부를 더 잘 하려면 선지식을 만나야지.”
“선지식을 만나려면 어디로 가야 합니까.”
“멀리 갈 것이 있나. 이 도량에 효봉 조실스님도 선지식인데.”
“조실스님께서 화두를 주셨으니 다른 선지식도 뵙고 싶습니다.”
“그렇다면 속리산 복천암 선방으로 가보게.”
“그곳에는 어떤 분들이 있습니까.”
“성철스님도 있고, 보문스님도 있고, 우봉스님도 있고, 영천스님도 계시지.”

일타는 외삼촌인 영천과 자신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주었던 성철이 있다는 말에 복천암으로 가고 싶었다. 그곳에서 화두를 들고 몸을 던져 공부하고 싶었다.

그런데도 일타는 낯선 복천암으로 쉽게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 거기까지 또 탁발하며 걸어가야 하는데 엄두가 나지 않았던 것이다. ‘중이 가는 길은 혼자 가는 길이다’고 바람처럼 훌쩍 떠나버린 성철이 새삼 부러울 뿐이었다.

일타는 송광사 뒷방에서 간시궐을 외면서 뒹굴었다. 기왓장에 난반사하던 햇살도 꺾이고 지친 풀벌레 울음소리가 여름이 물러가고 있음을 알려주었다. 법당 앞뜰에 핀 옥잠화 흰 꽃도 시들시들했고, 아침저녁으로는 제법 서늘한 바람이 산위에서 불어 내려와 장삼 속으로 파고들었다. 여름의 끝자락을 붙들고 있는 것은 배롱나무뿐이었다. 배롱나무를 목백일홍이라고 부르는 스님도 있는데, 모내기를 하던 늦봄부터 피기 시작한 붉은 꽃은 아직도 스러지지 않고 선명했다.

밤이면 뒷방으로 일타처럼 떠나지 않고 있는 스님들이 지대방 삼아 모여들었다. 이야기하다 보면 배가 고파지므로 일타는 요깃거리를 마련해 놓곤 했다. 나이가 어리니 그런 시봉이라도 해야 환영을 받았다. 부전스님에게 가서 재를 지내고 난 과일이나 떡을 얻어 오기도 했고, 원주가 조계산에서 야생으로 자라고 있는 차나무에서 잎을 채취해 덖은 차를 얻어와 우려주기도 했다. 도우가 있을 때는 나이가 비슷하여 함께 했지만 그가 소리 소문 없이 떠난 뒤였으므로 일타는 혼자 구참들의 심부름을 했다.

스님들은 일타에게 고마워하면서 한마디씩 했다.

“복천암으로 언제 갈 건가. 그곳에 가보면 알겠지만 도인스님들은 하나같이 이력을 마친 스님들이라.”

이력을 마쳤다는 것은 강원이나 율원에서 경과 율을 공부하여 유식하다는 것을 뜻했다. 경을 공부한 뒤에 선에 들어야 존경받는 수좌가 된다는 얘기도 했다.

“경은 부처님 말씀이거든. 선은 부처님 마음이고. 그러니 말씀도 소중하고 마음도 소중한 기라.”

그러나 세월은 흐르는 물처럼 빠른데 언제 경을 공부하고 어느 때 선에 드느냐고 얘기하는 스님도 적지 않았다.

“이보게. 즉심시불인데 그까짓 거 경을 봐서 뭐하겠는가. 깨치면 바로 부처가 되는데 중에게 무슨 이력이 필요하냐고. 우리 모두 성불하려고 출가한 것 아닌가.”

일타는 또 다시 헷갈렸다. 통도사로 가 강원에 입학할 것인지, 복천암으로 가 참선을 할 것인지 몹시 망설여졌다. 며칠 동안 고민하던 끝에 일타는 복천암으로 가기로 결정했다. 그곳의 도인들이 얼마나 유식한지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초가을 태풍이 불어 나뭇가지가 찢어지고 하늘이 낮게 가라앉은 우중충한 날이었다. 일타는 바랑을 메고 송광사 일주문을 나섰다. 주지에게 탄 노잣돈은 바랑 깊숙이 넣어버렸다. 이번에는 무슨 봉변을 당하더라도 제대로 탁발하면서 하심을 키우는 만행을 하고 싶었다.
태풍의 기세는 북녘으로 올라갈수록 더 했다. 폭우를 몰고 다니며 수확을 기다리는 논밭을 망쳐놓기도 했고, 다리를 끊어 마을을 고립시켜 놓기도 했다. 바람도 거세어 일타는 길을 걷다가도 민가의 처마 밑에서 몸을 움츠리곤 했다.

집이 무너져 초상을 당한 사람도 있었다. 그때마다 일타는 가는 걸음을 멈춘 채 장삼 자락을 걷어붙이고 울력에 동참하거나 상가에서는 귀동냥으로 익힌 염불을 해주었다. 곤경에 처한 촌부들 속으로 들어가 섞이자 굳이 탁발하지 않아도 저절로 공양거리가 생기고 자고 갈 방이 생겼다.

화두를 드는 것이 자기 자신을 없앰으로 해서 무아(無我)의 경지에 들어 세상과 한 몸이 되는 정진이라면, 이번의 만행도 일타에게는 천금 같은 공부나 다름없었다. 자신을 허물고 세상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 고락을 함께 하자, 굳이 탁발을 걱정하지 않아도 숙식이 해결되곤 했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선방은 산문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세상 어디고 간에 선방 아닌 곳이 없었다. 머슴이 코를 골며 자는 골방이 선방이고, 애통하게 울부짖는 초상집이 선방이고, 폭우에 쓰러진 벼를 일으켜 세우는 논이 선방이고, 폭우가 할퀴고 간 끊어진 다리를 복구하는 현장이 바로 선방이었다.

일타는 어디를 가서나 간시궐을 잊지 않았다. 화두가 곧잘 머릿속에서 사라지곤 하여 염화두를 들지 않고 노래를 부르듯 송화두를 했다.

‘간시궐, 간시궐.’

웃음을 참지 못할 때도 있었다. 송광사에서 어느 할머니 신도가 그랬던 것처럼 마을 사람들 중에 장난기가 많은 이가 선소리를 하듯 소리쳤다.

“대사님께서 간식 달라고 하신다. 어서 간식을 가져오너라.”

다시는 일어서지 못할 것처럼 비통해 하던 사람들이 그 소리에 웃음을 참지 못하고 웃기도 하면서 힘을 냈다. 효봉이 일타에게 준 간시궐의 위력이었다. 그러나 간시궐의 뜻이 ‘마른 똥막대기’라는 것을 알면 누구라도 기절초풍할 일이었다. 지나가는 객승이 위로는 못해줄망정 헛소리를 한다고 손가락질을 할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일타는 간시궐 덕분에 뜻밖의 새참 공양을 받았으니 간시궐은 참으로 도깨비방망이 같은 마력을 가진 화두였다.

20여 일 후.

일타는 속리산에 도착했다. 태풍이 가시고 난 하늘은 깊은 호수처럼 더 고요하고 푸르렀다. 그러나 산길 곳곳에는 태풍이 지나간 흔적이 역력했다. 일타는 큰절로 먼저 가 참배를 하고 공양을 했다. 그리고는 바로 복천암 가는 길로 나섰다.

복천암은 수좌들이 즐겨 찾는 암자 중에 하나였다. 속리산 산자락 중에서 최고의 명당으로 치는 곳이고, 특히 복천암의 석간수는 서너 달만 장복하면 웬만한 잔병이 다 치료될 만큼 영험한 약수였다. 돌부처처럼 가만히 앉아 참선만 하다 보면 근력이 약해져 잔병이 생기기 쉬우므로 수좌들에게 약수는 무엇보다 중요했던 것이다.

복천암 입구에 도착한 일타는 뜻밖에 도우를 보고는 반가워 달려갔다. 송광사에서 슬그머니 사라졌던 도우가 복천암 앞으로 흐르는 개울물에서 빨래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도우스님, 어디로 가셨나 했더니 여기 계셨군요.”
“성철스님을 모시고 싶어 이리 왔지요.”
“성철스님도 여기 계셨군요.”
“태풍 때 밀린 빨래를 이제야 하고 있습니다. 일타스님이 왔으니 이제 도인스님들 시봉하는 일도 줄어들겠구먼.”

일타는 당장 도우 앞에 산더미처럼 쌓인 빨랫감부터 끌어당겨 도와주었다. 큰스님들의 옷이라고 하지만 빨래한 지 오래되어 쉰내가 났다. 일타는 코를 싸쥐었다가는 무심코 빨래만 하는 도우를 보고는 소매를 걷어붙였다.

“일타스님, 스님은 한창 힘을 쓸 때라 많이 먹어야 하는데 이곳은 송광사보다 형편없어요.”
“공부하러 왔으니 배가 좀 고픈들 어떡하겠습니까.”
“원주스님이 큰절에서 쌀을 타오는데 하루에 일인당 세 홉에서 지금은 두 홉으로 줄었어요. 생식하는 성철스님이나 영천스님은 그마나 견딜만하지요.”
“다른 스님들은 죽을 먹습니까.”
“그거면 다행이지요. 원주스님은 술을 좋아하는 노장이라 쌀로 술을 빚으니 양식이 더욱 부족할 수밖에 없어요.”
“그래도 불평하는 스님이 없습니까.”
“복천암 스님들은 아무도 먹는 것을 가지고 불평하지 않아요. 도인들이라 음식을 보고 탐하는 식탐(食貪) 정도는 이미 해탈했겠지요.”

일타가 복천암에서 생활해 보니 과연 먹는 것을 가지고 갈등을 일으키는 스님은 없었다. 각자가 자기 수행만 할 뿐 옆 사람의 모습을 놓고 가타부타 말하는 법이 없었다.

스님들 중에서 가장 엄격한 분이 성철이었다. 특히 성철은 큰절에서 특별대접을 받는 관리들일수록 더욱 외면했다. 한번은 큰절의 행자들이 복천암까지 빗자루를 들고 올라와 산길과 마당을 쓰는 둥 소란을 피웠다. 알아보니 보은 군수가 도인으로 소문난 복천암 스님들을 만나러 온다는 것이었다. 그때는 뒤늦게 청담까지 선방에 입실해 있었다.

그러나 그날 아침에 성철은 도우를 데리고 속리산 비로봉으로 올라가버렸다. 보은 군수와 마주치지 않기 위해서였다. 일타는 나중에 도우에게 성철을 모시고 비로봉으로 간 얘기를 듣고는 성철의 가풍을 느꼈다.

성철이 산길을 가다 도우에게 이런 말을 했는데 그 순간 얼음 조각을 입에 문 것처럼 가슴이 서늘해졌다는 것이었다.

‘뜻은 비로자나불 정수리에 두고, 행실은 동자 발밑에 절하듯 하게(高踏毘爐頂 行低童子足).’

그런데 일타는 또 혼자 남아 스님들을 시봉을 하게 되었다. 어느 날 도우가 공양간에서 죽을 쑤다 말고 말했다.

“일타스님, 동안거가 끝나면 복천암을 떠나려고 하오.”
“갑자기 어디로 간단 말입니까.”
“시봉하다 보니 내 공부를 못하겠어요.”
“그럼, 저 혼자 공양주도 하고 채공도 하란 말입니까.”
“그래도 복천암은 살기가 편안한 곳이오. 먹는 것을 가지고 타박을 하는 스님은 아무도 없으니 말이오. 끼니를 건너뛰어도 말하는 스님이 없고, 무른 밥을 해도 그렇고, 죽만 쑤어 주어도 그러니 시봉하기가 얼마나 좋은 곳이오.”

결국 도우는 동안거를 해제하는 날 청담을 따라 가버렸다. 따라서 일타는 혼자 동분서주할 수밖에 없었다. 선방에 앉아 간시궐을 들지만 공양 때가 가까워지면 색다른 각자의 공양을 걱정하는 공양주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송광사처럼 공양거리가 통일되어 있지 않고 별각(別角)인 복천암 스님들의 입맛에 따라 각양각색이기 때문이었다. 공양 때만 되면 발우에 담겨지는 공양거리가 다 다른 것이었다. 그러니 신경을 곤두세우고 그것을 맞추다보면 일타가 든 간시궐은 십만 팔천 리나 멀어져버리고 없었다.

한 스님은 몸에 열이 많아 냉식(冷食)을 했다. 뜨거운 것을 먹지 못하니 늘 찬물에다 식혀서 올려야 했고, 성철은 쌀가루와 콩가루 그리고 솔잎가루를 섞은 생식을 했고, 영천과 보문은 쌀가루를 넣지 않은 솔잎가루와 밤 그리고 대추를 찧은 벽곡(辟穀)을 했다. 그런가 하면 우봉은 자기에게 올라온 쌀을 모아 떡을 해달라고 졸랐다.

산에 가 땔감으로 솔방울을 줍는 부목노릇까지 하려 드니 일타는 불만이 쌓였다. 스님들을 시봉하다 보니 참선을 제대로 할 수 없었고, 경에도 밝은 스님들을 상대하자니 기가 죽기도 했다.

어느 날 일타는 썩은 가지를 지게에 지고 내려오다가 중얼거렸다.

‘에이, 간시궐이고 뭐고 참선도 옳게 못할 바에야 이력이나 마치러 가자. 경 보러 가자.’

결국 일타는 동안거를 보낸 뒤에도 복천암에서 스님들을 시봉하면서 참선을 하려고 했었는데, 생각을 바꾸어 통도사로 돌아와 버렸다. 불경을 가르치는 통도사 강원에 입학하기 위해서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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