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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팡이 슨 목판·전적 뒤지며 불법을 구하다

기자명 법보신문

국립문화재연구소 정년퇴임 한 박 상 국 실장

사찰 전적 조사하며 문화재전문가로… 손 거친 국보·보물만 500점
그의 30년은 불교서지학의 새로운 역사…퇴직 후 제2의 성과 낼 것

<사진설명>박상국 씨는 앞으로 "불교서지학의 밀린 숙제를 해야 하는 '학생'으로 돌아간 것"이라며 퇴임 소감을 전했다.

인간의 삶을 구성하는 것은 우연일까, 필연일까. 혹은 우연을 가장한 필연일까.

2006년 12월 31일부로 국립문화재연구소 예능민속연구실장직을 퇴임한 박상국 씨의 문화재 인연을 듣다보니, 그의 삶을 이끈 것은 우연도 필연도 아닌 불연(佛緣)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지난 30년간 불교 문서와 목판들 속에서 먹고 자고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성보들 속에서 청춘을 보낸 박 실장. 그가 지나온 길은 바로 ‘불교서지학의 역사’였으며, 그의 손을 거쳐간 불교문화재들은 한국의 국보와 보물이 되었다. 그리고 그 긴 역사 속에는 한 불교학도의 간절한 발원이 함께 하고 있었다.

1964년 소설 『말』이 노벨문학상에 선정됐다는 소식을 들은 사르트르는 ‘상이란 일종의 빚(부채)’라며 노벨상 수상을 거부했다. 그때 세계인들은 엄청난 충격을 받았고, 사르트르에 대한 예찬이 곳곳에서 쏟아져 나왔다. 당시 경북대 부속고등학교 1학년생이었던 박상국씨도 그런 사르트르 예찬자 중 한 명이었다. 그 당시 1주일간 학교를 결석하면서 사르트르의 『존재와 실존주의』관련 서적 10여 권을 빌려 집에서 독파하여 ‘존재와 실존주의’라는 레포트를 학교 교지에 발표했고 앞으로 사르트르처럼 위대한 철학자가 되겠다는 목표까지 세웠다. 까까머리 고등학생은 이후 동국대 불교학과에 진학하게 된다. 동서양의 철학을 모두 섭렵하려면 동양사상인 불교부터 공부하겠다는 이유에서였다.

대학원에 진학한 후 ‘보조국사 지눌의 절요’를 주제로 석사논문을 준비하던 그는 연담유일이 쓴 절요사기가 있다는 기록을 보았다. 당시 동국대 불교학과 교수였던 김영태, 이지관, 조명기, 이기영 교수에게 물어보아도 아무도 그 책을 본 적이 없다고 했다. 국립중앙도서관, 국회도서관 등등 온갖 도서관을 뒤져봐도 그런 책은 없었다. 그런데 우연히 자신이 다니던 동국대 도서관에서 연담유일의 『도서 사기』라는 책 뒷부분에 『절요사기』가 합철돼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 소식을 접한 당시 불교학과 고익진 교수는 그 책에 관한 개설을 쓰라고 하였다. 『불교학보』에 부록으로 싣자고 했다. 그 후 그 개설은 동대신문 1면 톱을 장식했고 이어 동아일보에까지 소개됐다. 이때까지만 해도 세계적인 철학자가 되겠다던 그의 꿈에는 변함이 없었다. 오히려 순풍을 타는 듯 했다.

그런데 얼마 후 일지암의 용운 스님으로부터 편지가 왔다. “해남 대흥사에 연담스님의 저술과 관련된 목판들이 있으니 한번 조사해 보라”는 내용이었다.

연담스님의 사기를 찾기 위해 도서관이란 도서관은 다 뒤지고, 이와 관련된 이들에게 수소문해도 찾을 수 없었던 것이, 서적도 아닌 목판이 방치돼 있었다니…. 허탈감이 밀려왔다.
“내가 잘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학문이라는 것이 이런 게 아닌데. 내가 지금 사상누각을 짓고 있다는 생각이 밀려오더라구요. 그때 받은 충격이란 정말….”

석사학위를 받자마자 그는 배낭을 꾸려 몇 년간 전국 사찰에 흩어져있는 기초 자료를 수집하겠다고 생각하였다. 주변을 모두 정리하고 떠나려던 찰나, 동국대 불교미술학과 문명대 교수로부터 연락이 왔다. “문화재관리국(현 문화재청)에서 전국 사찰에 흩어져있는 불교자료들을 조사하기 위한 요원을 모집하는데 들어갈 생각이 없냐?”고 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불교미술학과, 사학과 출신 3명과 함께 1976년 1월 문화재 2과 동산문화재 등록실의 전문요원으로 첫발을 내딛게 되었다.

문화재관리국에 들어간 지 1년 정도 지났을 무렵 공주 갑사로 실태조사를 나갔을 때였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모를 또 다른 인연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당시 갑사에는 월인석보 판목 31장이 보물 582호로 지정되어있었는데 이 지정문화재 실태조사를 마치고 법당 뒤에 보니 월인석보와 비슷한 판목 백수십장이 아무렇게나 쌓여 있었다. 대충 훑어보았는데 그 가운데 월인석보 목판과 비슷한 판이 보였다. 조사일정상 동료들과 갑사를 떠났지만 아무래도 심상치 않다는 느낌이 와서 조사 일정이 끝나고 혼자서 다시 갑사로 들어가서 확인한 결과 지정된 것과 동일한 월인석보 목판이 15장이 있었다.

“왜 하필 그때 그 목판들이 내 눈에 띄었던 것일까요. 그 목판들이 아주 오래전부터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게 틀림없었겠죠. 이것이 월인석보 목판이 틀림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의 기분이란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흥분과 감격에 사로잡혔었습니다.”

이것이 계기가 내가 의도한 사찰 경판조사를 본격적으로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사찰에 방치되고 있는 목판들의 일제 조사가 시급하다”며 상부에 조사계획서를 제출했고, 임시직에 불과했던 그에게 문화재관리국장은 선뜻 그 프로젝트를 허락했다. 전문가로서의 반열에 올라도 어려운 개인 프로젝트였다. 이렇게 시작된 전국사찰 소장 경판조사가 1984년 『전국사찰목판집』이라는 이름의 책으로 발간됐다.

사찰 목판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어느새 그에게는 ‘전문가’라는 꼬리표가 붙어있었다. 1980년 최연소 문화재전문위원으로 위촉된 것이다. “문화재관리국에 들어간지 4년 반 만에 전문위원이 되었는데, 너무 긴장이 되었습니다. 공부라는게 열정만 있어서 되는 게 아니라 시간도 함께 있어야 되는 건데, 공부해 놓은 건 없는데, 조사는 해야지 그리고 조사보고서는 늘 밀려있고 그래서 그때부터 한 20여 년간 사실 토요일, 일요일 할 것 없이 연구실에 쳐박혀 살았어요. 그래도 어떡하나. 내 손에서 국보와 보물 지정을 위한 조사 보고서인데 1차 사료가 잘못되면 큰일이지요.”

하지만 평생 공무원을 하겠다는 생각은 해본적도 없는 터라 두 차례 사표를 내었는데, 선배들이 ‘네가 벌여놓은 일들은 마무리 하고 가든지 말든지 하라’고 해서 그때마다 어쩔 수 없이 주저앉곤 했다. 결국 벌여놓은 일들을 처리하다보니 마흔이 넘고 쉰이 넘는 줄도 모른 채 세월이 흘렀다.

“나는 큰스님들이 한 소식하셨다는 느낌이 그런 게 아닐까 싶어요. 내가 조사한 문화재가 세상에 한번도 공개되지 않은 처음 조사한 것이 수도 없이 많았습니다. 그런 문화재를 조사하면서 그 속에 담긴 비밀을 조사해서 처음으로 세상에 공개할 때의 그 느낌, 그 짜릿한 감동은 많이 맛보며 살았습니다. 어떤 때는 자다가도 혼자 웃고 있는 나를 발견해요. 그건 마약보다도 더 강하고, 그 어떤 영화보다 감동적이죠. 나는 어쩌면 그 맛을 잊지 못해 평생 문화재를 가까이하고 살았다 싶어요.”

그의 손을 거쳐 국보와 보물로 지정된 문화재만 500여건이 넘는다. 그 과정에서도 의천 대각국사가 간행한 저술들이 대장경의 후속편인 속장경이 아니라 대장경에 대한 연구주석서인 교장임을 밝혀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의 내용을 수정하도록 했고, 세계최고의 무구정광다라니경이 중국에서 704년 이전에 중국에서 간행한 것이라는 주장에 대해 704년에 한역한 것으로 간행이라는 허구를 밝히고 무구정광다라니경은 불국사 창건 이벤트로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의 경전 내용이 인쇄술 발명을 창출하는 내용임을 밝혔고 하계 처음으로 신라 백지묵서 대방광불화엄경을 조사하여 보고서를 작성하였다. 그리고 해인사 고려대장경을 간행년도 별로 정리하여 일본학자들에 의해 잘못 왜곡되어온 조성기간이 1237년에서 1248년 사이에 이루어 졌음을 밝혔다. 90년도부터 본격적으로 해외에 있는 한국문화재를 조사해, 3만5000여점에 달하는 해외소재 한국전적 문화재의 실태를 파악하였다.

“불교를 전공한 게 참 다행스러워요. 제가 불교공부를 안했으면 뭘 했을까요. 대학에서 불교를 전공하고 문화재관리국에 들어간 모든 것들이 이미 오래전에 정해져있던 운명처럼 느껴집니다. 국가에서 월급을 주며 나를 평생 공부시킨 거죠. 평생 너무 좋은 자료들을 많이 만났고, 새로운 자료가 발견되면 나에게 가장 먼저 그 자료를 조사할 수 있도록 해 주었습니다. ”

그에게 ‘혹시 사르트르처럼 사상가의 길을 밟지 못한 게 아쉽지 않냐’고 넌지시 물어보았다.

“실존은 현실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나는 최고의 문화재들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만날 수 있었던 행운아였고, 그 속에서 가장 생생한 역사를 창출한 문화유산을 접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 의미에서 실존주의는 불교와 아주 가까운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진리나 깨달음이란 수학문제가 딱 풀리듯이 내 마음 속에 구름이 확 걷히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땅속에 금송아지 보다 내 주머니에 사용할 수 있는 지폐가 필요한 것처럼 진리도 실체를 현실에서 가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나는 사르트르가 남긴 것 같은 위대한 사상서를 남기지는 못했지만, 사르트르가 말한 실존을 향해 나아가는 삶을 살아왔다고 생각합니다.”

지난 30여 년간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제 한국 불교서지학 역사의 제2막이 열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 현장에서 그가 들춰냈던 문화재들은 박물관 전시실이며, 문화재도록, 또 수많은 논문에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여전히 그 보물들이 숨기고 있는 역사의 이면들은 아직 세상에 제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 그 진실은 박상국 실장이 아닌 ‘영원한 학생’ 박상국에 의해 멀지 않은 미래에 다시 드러날 것이다.
 
탁효정 기자 takhj@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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