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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은해사 승가대학원장 지 안 스님

기자명 법보신문

출가 7년만에 강주 … 너무 엄해 ‘도끼자루’ 별칭

지목행족(智目行足)은 ‘대지도론’에 나오는 말로 지혜의 눈과 그에 따른 실천행을 뜻합니다. 우리 곁에는 지혜의 눈으로 중생을 위해 헌신하는 많은 선지식이 있습니다. 지목행족은 수행과 교학, 나눔의 현장에서 묵묵히 정진하고 계신 스님들의 파릇한 삶을 기록하는 날적이가 될 것입니다.

은사 벽안 스님은 내게 법신 주신 분
전강제자들과 ‘내전학회’ 결성 계획

<사진설명>스님은 "강원이 활성화돼야 지식인 언어로 불교를 설명할 수 있는 최소한의 능력이 갖춰질 것"이라고 말했다.

씨앗은 봄을 잊지 않고 싹을 틔우고, 불성은 무명에 가려 없는 듯 보이지만 중생심이 걷히면 본래 자리에서 붓다의 모습으로 대방광(大放光)을 드리운다. 은해사 승가대학원 원장 지안 스님(61)은 이런 시절인연의 절묘한 이치가 삶 속에 녹아 도는 스님이다.

강원을 졸업하기도 전 이미 중강을 했고 출가 7년 만에 통도사 강원의 가장 어른인 강주가 됐다. 이후 30년 동안 수백명의 제자를 배출했으니 스님에게 출가는 시절인연이었고, 또한 대강백의 싹을 틔울 봄날이었으리라. 씨눈이 싹을 틔울 날을 잊지 않듯이 불법의 바다에 발을 들여놓은 순간 발아가 급속도로 진행됐으니 속된 말로 스님은 천재과인 셈이다.

양산 통도사의 푸릇한 산문을 지나 시원스럽게 뻗은 소나무에 잠시 눈을 맑히며 산길을 올랐다. 승가대학원의 방학으로 오랜만에 은해사를 벗어나 통도사 산내 암자 반야암에서 호젓하게 솔향을 만끽하고 있을 지안 스님을 친견하기 위해서다. 잠시 후에 모습을 드러 낸 정갈한 도량. 맑기만 한 스님의 모습을 닮았다.

스님은 병풍처럼 드리운 책장들을 뒤로 한 채 한가롭게 차를 마시고 있었다. 수년만에 찾았다는 불자들과의 살가운 정담이 녹향 가득 묻어났다.

“지금이 제일 편한 시간이지. 책도 읽고 연구도 하고 차도 마시고. 은해사에서는 그렇게 할 수가 없어요. 새벽 3시 반에 일어나 4시에 예불을 하고 공양을 마친 다음 7시부터 강의에 들어가니까. 아침 공양을 하러 가면 어두워서 신발을 찾기가 힘들다니까”

허허로이 웃는 모습으로 자리를 권하는 스님에게 적잖이 안심이 됐다. 짧은 시간에 남다른 성취를 이룬 천재들이 으례 그렇듯 선천적인 괴팍함을 두려워 하던 차에 부담을 덜게 됐기 때문이다.

“한국불교를 선불교라고 해요. 간화선이 우리의 소중한 자산인 것은 두말 할 필요가 없지. 그렇다고 해서 교학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될 말이지요. 선과 교는 둘이 아니에요. 한국불교사에 있어 가장 탁월한 고승들을 놓고 보면 원효·의상 스님을 빼 놓을 수 없는데, 그때 어디 선(禪)과 교(敎)의 구분이 있었나. 불교는 그냥 불교에요. 그런데 요즘 선 우위 사상이 팽배해서 그런지 교학을 홀대하다 못해 천대하는 경향까지 있어요. 안타까운 일이지요”

스님은 세간에 불고 있는 간화선의 열풍이 기꺼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우려스럽다고 했다. 부처님의 말씀이 오롯이 녹아있는 경전을 뒤로 하고 선방에 앉아 있으면 그냥 부처가 되리라 믿는 사람들의 미혹 때문이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은 보지도 않고 달을 보겠다니 그처럼 어리석은 일이 또 어디 있을까. 하물며 평생을 경전을 익히고 가르쳤던 대강백의 견지에서 교학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면서, 또한 달 그 자체이기도 했다.

“선은 선방에만 있는게 아니예요. 서구에는 ‘교회 안에만 신이 있는 것은 아니다’ 라는 말이 있는데 차원은 다르지만 같은 말이에요. 선은 동선(動禪)이 돼야 합니다. 살아있는 선 즉,  생활 속의 선 말입니다”

임제 스님은 경전을 모두 섭렵하고 나서 사교입선(捨敎入禪)했고, 대해 종고 선사도 확철대오 후『화엄경』을 보고 더욱 깊은 견처를 열었다고 했다. 역대 조사 스님들 가운데 교학적으로 뛰어난 분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컨만 이를 애써 외면하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다. 이런 까닭일까. 스님은 “교학을 의도적으로 폄하하는 이들 중에는 경학 공부에 대한 열등의식을 숨기기 위한 불순한 의도를 갖고 있는 사람도 일부 있다”며 안타까워했다.

“주연만 가지고 드라마가 될 수 없잖아요. 조연도 있어야 하고 때로는 주연이 조연도 해야 합니다. 선과 함께 교학하는 사람도 많아져야 해요. 사회는 갈수록 지적으로 상향평준화되는데 교학을 멀리하면 어떤 언어로 세상 사람들에게 불법의 대의를 설명할 수 있겠어요”

유럽과 서구에서는 엘리트를 중심으로 불교가 널리 확산되고 있는데 반해 우리는 역으로 지식인 사회에서 외면을 받고 있으니 스님의 고민이 깊다. 엘리트가 곧 스님으로 통하던 통일신라나 고려의 화려했던 과거를 바라는 것은 아니다. 다만 지식인의 언어로 불교를 설명할 수 있는 최소한의 능력을 갖추기를 바랄 뿐이다. 그럼에도 불자들의 대중공양이 선방으로만 몰리니, 쇠락해가는 강원을 생각하면 이내 마음이 시큰거린다.

이야기를 스님의 출가시절로 돌리자 이내 눈가로 물기가 오른다. 외경의 대상이면서도 한없이 존경했던 은사 벽안 스님. 그 아릿한 인연의 편린들이 성성하게 살아났기 때문이다.

“어머님이 육신을 주셨다면 은사 스님은 법신을 주신 분입니다. 통도사에서 벽안 스님을 처음 친견했을 때 그야말로 영혼이 떨리는 듯 했지요. 머리끝이 쭈볏거릴 정도로 존경심이 일었습니다”

스님의 출가인연이 푸른 솔처럼 청아한 모습만은 아니었다. 대학을 다니던 중 가정사 고통을 피해 잠시 쉬로 떠난 통도사. 법학도였던 스님에게 통도사와 인연은 그저 삶에 대한 회피의 방편일 뿐이었다. 그러나 “스님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고 호기심에 던진 질문은 유발행자의 모습으로 돌아왔고 얼떨결에 참석한 저녁 예불은 그의 삶을 송두리째 돌려놔 버렸다. 1970년, 세납 24살 때 일이다.

“저녁 예불에 참석했습니다. 예불에 참여한 것이 처음이니까, 예불문을 알 턱이 없지요. 잠시 후 스님들의 입에서 장엄한 예불 소리가 흘러나오더군요. 그런데 갑자기 마음이 아득해지는 거예요. 마치 벼락을 맞은 것처럼. 감동도 그런 감동이 없어요. 저는 속복을 입고 머리를 기른 채로 불단 앞에서 하염없이 울었습니다. 아마 그렇게 많은 눈물을 흘린 것도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을 거에요”

통도사에는 많은 노스님들이 계셨다. 하지만 벽안 스님에게만 눈길이 갔다. 멀리서 보면 존경심이 생기고 초발심이 칼날처럼 일었다.

“처음엔 거절 당했어요. 복덕이 부족해서 상좌를 안받겠다고. 그러더니 수계를 하루 앞두고 장삼을 주면서 저에게 입으라고 해요. 상좌로 받겠다는 말씀이지요. 나중에 알았지만 상좌를 받기 전에 으례 한번은 거절하는 거더구만. 수계를 받고 나서 인사하러 갔더니 지안(志安)이라는 법명을 주세요. 입지를 잘 세워서 중 노릇 잘 하고. 그래서 편안히 살라고. 그래 이렇게 지었다고. 생각해보면 갖다 붙인 이름이에요”

그러나 은사 스님의 뒤이은 말에 몸이 얼어붙는 듯 커다란 전율을 느꼈다. “자네는 사회에서 학교를 조금 다녔나 본데, 이제 그런 것은 버리고 그저 금생 한생 안 태어난 요량으로 살게. 금생 한 생 태어나지 않은 셈치고 살아야 제대로 중노릇 할 수 있어” 쇼크처럼 전율이 온몸을 훑고 지나갔다. 이후 이 말은 나태가 일 때마다 묵직한 죽비가 돼 어깨를 후려쳤다. 스님은 출가 이후 누구보다 열심히 공부했다. 출가 7년만에 불보종찰 통도사의 강주를 했으니 근기도 남달랐을 터였다.

“자화자찬은 아니고, 정말 열심히 공부했어요. 대중이 잠든 시간에 촛불을 켜고 밤을 새면서 공부했어요. 그래 가끔 우스개 소리도 합니다. 세속에서 이렇게 공부했으면 사법고시도 충분히 패스했을 거라고.”

마치 스펀지가 물을 빨아들이는 듯 했다. 하나를 가르치면 둘을 알았고, 여기에 남다른 노력까지 더해지니 성취도는 그야말로 괄목상대였다. 그러나 시련도 있었다. 30세 이전에 강주를 하다보니 여기저기 시기도 많았다. “젊은 놈이 벌써 영감이 됐나. 머 그렇게 체 하면서 살아” 선배 스님들의 비웃음과 시기질투. 날밤을 세운 정진에 행동거지까지 조심을 하다보니 가끔 몸이 아파 신열을 앓기도 했다. 그래도 꾹 참고 공부만 했다. 예불과 공양을 빠지지 않았고 3년 동안 산문 밖도 나가지도 않았다. 그야말로 인욕과 정진만이 삶을 가득 메웠다.

“저의 노력을 은사 스님만은 알고 계셨어요. 세세하게 자상하게 대하지는 않으셨지만 항상 말없이 힘이 돼 주셨지요. 내가 노력하는 것을 스님께서 알고 계시구나 하고 생각하면 없던 힘도 솟곤 했지요.”

그러나 정작 지안 스님 자신은 제자들에게 자애로운 스승이 아니었다. 게으르고 공부 안 하는 제자들을 어찌나 많이 팼는지, 별명이 ‘미제도끼자루’. 아마도 마구잡이로 휘두른 장작깨비에 도끼자루도 간혹 섞여 있었나 보다.

“옛날 절 집안에는 엄혹하고 순수한 수행 가풍이 살아있었어요. 수행을 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지요. 그런데 이제 수행 가풍은 무너지고, 스님들의 정진력도 무뎌졌지요. 시절인연 때문이겠지만 너무나 안타까워요.”

스님은 갈수록 세속화되고 물욕화되는 절집안의 풍토를 초발심의 차이로 설명했다. 도를 위해 몸을 던지는 순수한 발심은 사라지고 계산적으로, 심하게는 직업의 하나로 출가를 선택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는 것이 스님의 우려다.

이런 걱정 때문이었을 것이다. 스님은 지난해 11월10일 현봉, 신공, 정묵, 덕산, 양관, 보문, 자응 스님 등 전강 제자에게 강맥을 전달하는 전강식을 가졌다. 이심전심(以心傳心). 마음이 통하는 제자 얻기가 하늘의 별따기라는 오늘날 절집 풍토에서 스승에게 물려받은 강맥을 7명의 제자에게 물려줬으니 부처님의 은혜를 톡톡히 갚은 셈이다.

“도학자의 풍모가 있는 제자들입니다. 발군의 실력을 갖춘 스님들이지요. 교학의 토대를 더욱 굳건히 하는 동량들이 될 겁니다.”

스님은 전강제자들과 함께 학회 형식의 모임을 만들 생각이라고 말했다. 강원의 교과목을 내전이라 하는데, 내전을 가르치는 스님들이 서로 모여 토론하고 연구하는 일종의 결사 형태의 단체를 염두에 두고 있다. 손가락(경전)과 달(깨달음)의 간극을 공동의 노력으로 메워보자는 의미다.

스님은 하루 일과를 묻는 질문에 “멋지게 살고 있다”고 말했다. 밥먹고 잠자는 시간 빼고 일생을 삼등분해, 1/3은 공부하고 1/3은 명상하고 1/3은 여행을 하고 있단다. 그래서 불만은 없다고. 항상 행복하다며 파안대소다. 다만 시간을 쪼개 대중들을 위한 불서들을 발간하는 일에 좀 더 마음을 쓸 예정이라고 밝혔다.

“자시(子時·23~1시)에 하늘이 깨고 축시(丑時·1~3시)에 땅이 깨고 인시(寅時·3~5시)에 사람이 깬다는 말이 있습니다. 게으름 피지 말고 인시에 일어나 공부하라는 말이지요.”

올해로 회갑을 맞는 스님의 자애로운 웃음 뒤로 ‘미제도끼자루’가 오버랩됐다. 선천적으로 잠은 많은 나같은 이는 머리가 깨져도 여러번 깨졌을 터이다.
 
김형규 기자 kimh@beopbo.com


지안(志安) 스님은

1947년 경남 하동군에서 태어나 1970년 통도사에서 벽안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1974년 통도사 강원을 졸업하고 같은 해에 중강으로 후학들을 양성했다.

1978년부터 1988년까지 10년 간 통도사 강주를 지냈고, 1997년 다시 통도사 강주 소임을 맡았다. 2001년 종립 은해사 승가대학원 3대 원장에 취임, 7년째 후학 양성에 힘쓰고 있다. 저서로 『금강경 강의』『신심명 강의』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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