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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가 익어서 佛音이 되다

기자명 법보신문

인간문화재 안 숙 선 명창

<사진설명>우리시대 최고의 소리꾼으로 손꼽히는 안숙선 명창은 부처님 생애를 창극으로 재창조하면서 참불자로 다시 태어났다.

지천명의 나이를 넘긴 사람들 중 이름이 알려진 사람들은 직함이 여럿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는 그만한 사회적 지위와 명예를 얻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그러나 자신의 이름 앞에 여러 직함을 바꿔 달순 있어도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별칭을 얻기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더욱이 지천명을 넘긴 여성이 ‘프리마돈나’로 불리우는 것은 상상조차 하기 힘든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명창 안숙선에게 늘 따라 붙는 수식어는 ‘국악계의 프리마돈나’다.

학생대회 휩쓸며 ‘애기명창’ 별칭

그녀는 젊은 시절부터 주목받는 유망주였다. 수서의 자택에서 만난 명창 안숙선은 흰색 개량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앉아 있었다. 지금도 그녀는 최고의 소리꾼으로 ‘프리마돈나’의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는 걸 보여주듯이.

“잘 아시겠지만….”

조근조근한 목소리로 그녀는 50년 소리꾼 인연의 실타래를 풀어놓았다.

“본래 외가가 국악을 해온 집안입니다. 어려서부터 늘 소리를 들으며 자랐고, 그런 아이가 한 구절 한 구절 따라 부르는 것이 전혀 어색할 리 없는 환경이었죠.”

그녀의 이모는 가야금의 명인 강순영이고, 외당숙은 동편제 판소리의 명인 강도근(판소리 인간문화재)이다. 그녀는 시작부터 소리를 해야 할 인연이었다. 외가의 피를 물려받았기 때문인지 어린 나이부터 그녀는 사랑가, 수궁가 등 짤막한 민요들을 배우지도 않고 곧잘 따라했다.

“먹고 살기도 힘든 시기에 제대로 된 무대가 있었겠어요? 그냥 거적이나 깔고 옹기종기 모이면 그게 무대죠. 그래서 흙먼지 풀풀 날리는 무대 아닌 무대 위에 올라도 내가 소리를 들려주는 것에 큰 의미를 두지 못했어요. 저에게 소리는 그냥 기능이고 장기였어요.”

아무리 무대 아닌 무대였어도 사람들 앞에 선 이상 감춰둔 끼가 숨겨질리 없었다. 열 살 안팎의 나이에 이미 전국 각지에서 열린 학생대회를 휩쓸고 다녔으니 당연히 그녀에게 붙은 첫 별칭은 ‘애기명창’이 됐다.

“수많은 명창들이 남원에 들러 저를 제자로 삼고자 했어요. 그런데 여자가 집 떠나 다른 곳으로 가는 것이 그리 쉬운가요. 더구나 옆동네도 아닌 서울로 올라간다는 것은 당시의 통념으로는 상상도 하기 힘든 시절입니다.”

왠지 싫었다. 사명감만으로 우리 소리를 꼭 해야 하는지에 대한 확신도 없었다. 그런 그녀를 서울로 끌어올린 사람이 명창 김소희(1917~1995) 선생이다. 1968년, 나이 스무살되던 해 그녀는 서울로 올라와 소리꾼의 삶으로 뛰어들었다. 이미 소리꾼들 사이에서는 ‘남원의 애기명창’ 안숙선에 대한 소문이 파다하던 시절이었다. 그녀는 김소희 명창에게 ‘춘향가’와 ‘흥보가’를, 정광수 명창에서 ‘수궁가’를, 박봉술 명창에게 ‘적벽가’를, 성우향 명창에게 ‘강산제 심청가’를 사사받았다. 모두가 하나같이 국보급 명창들이었고, 그녀는 그들의 골수를 남김없이 넘겨받은 것이다. 몇 번 들으면 금새 기억해 따라하는 남다른 자질은 그녀에게 ‘녹음기’라는 별칭도 안겨줬다.

소리꾼으로서는 최고의 인연이라 할 만 하다. 이 시기 그녀는 명창들과 스승, 제자의 연을 맺으며 ‘우리의 소리를 공부하는 것은 곧 우리의 정신을 이어가는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됐다.

김소희 명창은 참소리 준 스승

“선생님들은 늘 우리 소리는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는 걸 강조했습니다. 반드시 인격적으로도 잘 갖춰져야만 소리를 할 자격이 있다고 하셨죠. 그분들을 통해 소리 인생에 대한 확신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녀는 스승들에게서 소리만 배운 것은 아니었다. 늘 자기관리가 엄격하고 시간약속도 투철했다. ‘소리꾼 안숙선’은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나 남원 출신 소리꾼에게 서울 생활이 녹록할리 만무했다. 넉넉지 못한 형편의 소리꾼이지만 재능 있는 후학이 결코 소릿길을 포기하지 않도록 스승들은 그녀를 데리고 다니며 자주 무대 위에 올렸다.

결혼 후에 명창 안숙선이 연세대 앞 국밥 골목에서 순대국밥을 팔았다는 사실을 아는 이가 얼마나 있을까. 명색이 남도 손길인데, 그 맛은 또한 어떠했으랴. 그러나 국밥 팔던 소리꾼이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던 것은 시도 때도 없이 불러 연습시킨 스승들 덕분이었다. 그녀를 만든 8할은 바로 ‘스승’인 셈이다.

수많은 대가들에 의해 만들어진 명창 안숙선은 불교를 접하며 일대 전환점을 맞이하게 됐다. 평소 친분이 두텁던 안성 도피안사 송암 스님과의 인연으로 창작 판소리 ‘불타전’을 무대에 올린 것이다. 결혼을 하며 신실한 불자집안이던 시댁을 통해 불자로서의 연을 맺은 그녀였지만, 정작 그녀를 바꿔놓은 것은 역시 ‘소리’로 공양올린 부처님 일대기를 통해서였다.

“한걸음 한걸음 깨달음을 위한 발길을 옮겼던 부처님의 발자취를 소리로 옮기다보니, 그때까지 가지고 있던 불교에 대한 생각이 확 바뀌더군요. 아, 불교는 비는 것이 아니구나. 참 불교는 수행으로 깨달아가는 것이구나. 어쩌면 소릿길이 수행의 길과 이리도 닮아있을까.”

‘불타전’ 만들며 불자로 거듭나

한 생각 바뀌자 그녀의 삶 전체를 바라보는 눈도 바뀌었다. 늘 최고, 1등만을 향해 달려오던 그녀였다. 제자들에게도 늘 1등만을 원했던 그녀였다. 그런데 이제는 “‘진실된 행복을 찾는 삶이 곧 사람 사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고 말한다.

“한 생각 바꾸니 그제서야 주변이 보이기 시작하더군요. 주위의 힘들게 사는 이웃들, 독거노인들…. 그들에게 제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소리’밖에 없었습니다. 부처님처럼 큰 길은 못 가도 내 소리를 들으며 그들이 잠시나마 고통을 잊을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제가 남을 위해 사는 방법이겠죠.”

그녀는 얼마 전인 1월 23일 “주변 독거노인들을 위해 한 소리 걸쭉하게 뽑아드렸다”고 했다. 그녀는 한 생각 바뀐 뒤로 몇 년째 그렇게 시간만 나면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우리의 소리를 들려주고 있다. 그녀는 ‘중요무형문화재 23호 가야금 산조 및 병창 기능보유자’인 ‘인간문화재’, 즉 시대의 거장이지만, 부처님 생애를 통해 ‘소리’로 남을 위해 사는 진정한 장인이자 ‘문화예술인’으로 살고 있다.

그녀는 다섯 마당의 완창 무대를 해낼 수 있는 몇 안 되는 소리꾼이지만, 결코 자만하지 않는 노력파로 정평이 나있다. 늘 지방으로 해외로 우리 소리를 들려주기 위해 집을 떠나 있어야 하면서도 모범생이라 불릴 만큼 가정에 충실한 주부이자 어머니, 인자한 할머니이기도 하다. 관객이 비를 맞으며 자신의 ‘수궁가’를 들어주면 이틀 전 병상에서 일어난 몸으로 객석으로 뛰어들어 “수궁에 들어온 것 같죠. 여러분들이 비를 맞으니 나도 비 맞겄습니다”라며 관객을 열광시킨 진정한 프로다.

“자만하지 않으려 늘 차 안에서 독경 테이프를 듣는다”는 명창 안숙선의 모습을 보며 문득 관음보살을 떠올렸다. 볼관(觀), 소리음(音)이 아닌 보일관(觀), 소리음(音)자를 쓰는 관음(觀音)보살. 고통에 빠진 중생에게 소리로 기쁨을 전하는 관음보살. 살아있는 관음보살의 시원시원한 행복의 소리를 청해 들을 수 있기에 우리는 행복하다.
 
정하중 기자 raubone@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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