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대한승려연합회 독립선언서」의의
19「대한승려연합회 독립선언서」의의
  • 법보신문
  • 승인 2007.02.20 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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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통치 부정하는 불교계 독자 독립 선언문

1919년 중국 상해에서 12명 승려 이름으로 발표
“7000명 승려 피로써 독립투쟁하겠다” 내용 담겨
선언서 작성자 놓고 백초월·신상원 등 의견‘분분’

<사진설명>1919년 11월 15일 중국 상해에서 발표된 대한승려연합회의 독립선언서. (사진제공=민족사)

「대한승려연합회 독립선언서」는 1919년 11월 15일자 중국 상해에서 12명의 승려 이름으로 발표된 독립선언서이다. 이 선언서는 1969년 국사편찬위원회에서 발굴했다.

당시 국사편찬위원회에 있었지만 후에 동국대학교 사범대학 교수를 역임하였던 임영정은 1970년 3월 15일자 현재 「불교신문」의 전신인「대한불교」 신문에 이 선언서의 입수 경위와 발견의 의의를 소개하였다. 그가 소개한 내용은 이러하다. 이 선언서는 1919년 파리에 살고 있던 홍재하가 보관하고 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 파리위원부 관계 문건 중에서 발견되었다.

이 선언서는 홍재하의 사망 이후 유족들에 의하여 한국 유이민사를 연구하던 현규환에게 전달되었는데 좥대한승려연합회 독립선언서좦도 여기에 포함되어 전달되었다. 이후 이 선언서는 어떤 경로를 통해서인지는 알 수 없지만 상해 임시정부에서 파리평화회의에 제출되었던 일련의 탄원서와 함께 파리 법대도서관에 소장되게 되었다. 파리 법대도서관에 소장되어있던 자료를 국사편찬위원회가 발굴한 것이다.

한글·한문·영문으로 작성된 이 선언서는 임시정부에서 발행하던 기관지 「독립신문」에 좥불교선언서좦라는 제목으로 게재되었다. 박은식의 좬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는 좥승려연합대회선언서좦로 수록되어 있다. 1956년에 발행된 좬한국독립운동사』에는 좥승려연합대회의 선언서좦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

이 선언서는 ‘대한승려연합회’ 명의로 발표된 까닭에 제목은 좥대한승려연합회 독립선언서좦라고 부르는 것이 옳다고 본다. 이 선언서는 제목이 약간씩 다르지만 본문에도 다소의 오차가 있다. 선언서의 요지는 대체로 다음과 같다.

‘평등과 자비는 불법의 종지이다. 일본은 겉으로는 불법을 숭상한다고 하면서 지난 세기의 유물인 침략주의·군국주의에 빠져서 명분없는 전쟁을 일으켜 인류의 평화를 교란시켰으며 그 강포(强暴)함만 믿고 과거에 은혜를 받은 이웃나라를 침략하여 멸하고, 그 자유를 빼앗고, 국민을 학대하여 이천만의 원성이 드높다. 특히 금년 3월 1일 이래로 평화로운 수단으로 독립을 요구하였음에도 일본은 도리어 더욱 폭압을 자행하여 수 만의 무고한 남녀를 학살하였다. 일찍이 민족대표 33인이 독립선언을 발표할 때 불교계도 한용운·백용성 두 승려가 참여하였다. 일본은 강폭한 수단으로 한국을 합병한 이래로 한국의 역사와 민족적 전통 및 문화를 전혀 무시하고 각 방면에서 일본화정책 및 압박정책으로써 한족을 전멸하고자 한다. 우리 불교도 또한 그 독수에 희생되어 강제적인 일본화 및 가혹한 법령하에 이천년 이래의 국가에 의한 보호로 얻은 자유를 잃고 조종祖宗의 유풍(遺風)마저 인멸될 위기에 처해 대한불교는 멸절의 참경(慘境)에 빠졌다. 이에 우리는 대한의 국민으로서 대한 국가의 자유와 독립을 완성하기 위하여 대한불교가 일본화되는 것을 구하기 위하여 우리 7천의 대한승려는 결속하고 일어섰으니 큰 소원을 성취하기까지 오직 전진하고 피로서 싸울 뿐이다’

이 선언서에는 조선총독부가 사찰령이라는 가혹한 법령을 시행함으로써 불교계는 국가로부터 얻은 자유를 잃고 조종(祖宗)의 유풍(遺風)은 인멸되고 끊어질 참혹한 지경에 빠져 있으며 일본이 조선에서 실시한 통치정책의 잔혹성과 불교계가 저항한 사실들이 함축적으로 나타나 있다. 7천의 승려들은 일본의 식민통치에 대항하여 조국이 해방되는 순간까지 혈전을 선언한다고 하였다. 불교계를 대표하여 서명한 대표자 12명은 모두 가명을 사용하였다. 12명 승려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오만광(吳卍光)·이법인(李法印)·김취산(金鷲山)·강풍담(姜楓潭)·최경파(崔鯨波)·박법림(朴法林)·안호산(安湖山)·오동일(吳東一)·지경산(池擎山)·정운봉(鄭雲峯)·배상우(裵相祐)·김동호(金東昊) 등이다. 이 가운데 오만광은 범어사 주지인 오성월, 김취산은 통도사 주지였던 김구하, 지경산은 김경산으로 추정된다.

이 선언서의 기초자 또한 명확하지 않아서 아직까지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현재 기초자로 지목되는 사람으로는 신상완과 백초월이다. 숙명여대에서 「1910년대의 독립선언서 연구」라는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은 김소진은 기초자를 신상완으로 보고 있다. 신상완을 기초자로 보는 근거로는 1920년 5월 6일자 일본 고등경찰 기록을 들고 있다.

신상완은 상해 임시정부 군자금 모집을 위하여 1919년 8월 하순 국내로 잠입하였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백초월로부터 독립운동 자금 명복으로 300원을 받아서 10월에 상해로 돌아갔다. 상해로 돌아간 신상완은 이종욱·김봉신·백성욱·김법윤 등과 협의한 후 승려들의 단결을 도모할 목적으로 대한승려연합회 명의의 좥선언서좦와 좥임시의용승군헌제좦를 작성하였다는 사실을 들고 있다.

이에 대하여 김순석은 신상완 기초설에 대해서 김소진이 인용한 문서는 법원의 판결문이 아니고 경찰의 수사기록이므로 신빙성을 가지기 어렵는 의문을 제기하면서 백초월 기초설을 제기하였다. 1920년 9월 30일자 경성 지방법원 예심결정서와 동년 12월 23일 경성지방법원 판결문을 살펴보면 신상완은 1920년 4월 상순 경성부 인사동 숙소에서 상해에서 이종욱이 보내 온 좥대한승려연합회선언서좦라는 인쇄물 몇 장을 입수한 것으로 나타난다. 신상완은 건봉사 주지 이대련 및 주승(主僧) 정인목 앞으로 조선독립운동 자금을 제공하여 달라는 내용의 서한을 이석윤에게 교부하였다. 예심종결서와 판결문에는 신상완이 이 선언서를 기초하였다는 죄목은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승려선언서는 그가 기초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물론 그가 이 사실을 부인하였을 가능성도 있다.

1919년 4월 하순 경 신상완은 상해로 건너가서 임시정부 요인들을 만나고 귀국하였다. 동년 7월 그는 다시 상해로 건너가서 국내에서 백초월과 김봉신으로부터 전해 받은 2천원을 당시 임시정부 내무총장이었던 안창호에게 전달하였다. 그 후 그는 이종욱·김법윤·김상헌 등과 회합하여 상해에서 항일 승려 단체를 조직하기로 결정하였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승려 가운데 유력자가 필요하였다. 이들은 백성욱을 파견하여 이회광을 데려 오도록 하였다. 국내로 파견된 백성욱은 8월 중순까지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신상완은 안창호로부터 이회광을 상해로 오도록 하는 권유장과 자신을 강원도 국내 특파원 및 내무부 위원으로 임명한다는 사령장을 받아 귀국하였다. 그는 이회광을 만나서 상해로 건너갈 것을 권유하였다. 이회광이 애매한 태도를 취하자 그는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백초월로부터 독립운동 자금 명목으로 300원을 받아서 10월에 상해로 돌아갔다.

1920년 5월 6일자로 작성된 일본의 비밀문서에 따르면 백초월은 1919년 12월에 체포되어 검사국에 송치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중앙학림 학생 이선훈이 전남 구례 화엄사 승려인 김영렬에게 보낸 서신에 의하면 백초월은 11월 7일 이전에 체포된 것으로 보인다. 대한승려연합회선언서가 발표된 곳은 상해이다.

이 선언서는 국내에서 12명 승려의 서명을 받아서 상해로 건너갔을 것이다. 그 시점은 적어도 10월 중순이거나 아니면 11월 초순이 될 것이다. 백초월이 구속되기 직전이므로 승려선언서의 기초자는 백초월일 가능성이 크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당시 신상완은 백초월로부터 중국과 국내를 오가면서 독립운동 자금을 전달받을 정도로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던 상황에서 대한승려연합회선언서를 기초하는 것과 같이 중대한 사안을 사전에 협의하지 않았다고 보기 어렵고, 협의를 하였다면 신상완보다 12살이나 나이가 많았던 백초월일 가능성이 높다. 백초월은 1915년에 중앙학림의 강사로 내정되었고, 신상완은 1919년 중앙학림의 학생이었다.

1970년 3월 8일자 「대한불교」 신문은 이 선언서의 기초자로 당시 독립운동으로 수감 중이던 백초월을 들고 있으나 구체적인 자료는 제시하지 않고 있다. 근현대불교사 연구자로 현재 부천대 교수인 김광식은 좥백초월의 삶과 독립운동좦이라는 논문을 집필하면서 2002년 7월 24일 지리산 영원사에서 당시 주지인 김대일을 면담하였다고 한다. 김광식은 그 자리에서 김대일로부터 일제시대 영원사 주지를 지냈던 서병재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백초월이 독립운동을 수행할 당시 그 운동에 관련된 사무·초안·글씨 등은 마땅히 할 인물이 없어 거의 백초월이 담당하였고, 그로 인하여 일본 경찰에 끌려갔다”는 것이었다. 김광식도 선언서의 작성자를 백초월로 판단하고자 한다고 하였다. 현재로서 선언서의 기초자에 대해서는 보다 구체적인 자료의 발굴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대한승려연합회선언서는 일본의 식민통치를 부정하고 독립을 선언하였다. 불교계의 독립선언은 불교도 전체의 여망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불교계는 임진왜란 당시 분기하였던 의승병의 전통을 이어 침략주의 세력과의 투쟁을 선포하였다.

일본은 고도의 문화민족인 조선의 전통을 무시하고 각 방면에서 일본화정책 및 압박정책을 강요하였다. 그로 인하여 불교계는 가혹한 법령의 속박으로 절멸의 상태에 빠졌다. 7천의 승려들은 해방되는 그 순간까지 피로써 투쟁한다고 선언하였다. 일본의 잔혹한 식민통치는 불교가 지향하는 인류평등과 자비정신에 배치되므로 그로부터 해방을 추구하는 것은 더 이상 소수의 바램이 아닌 민족전체의 염원이라는 것을 밝히고 있다.

이 선언서는 승려연합회라는 명칭을 사용하여 불교 교단 차원에서 항일의지를 천명하였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이러한 사실은 종래의 불교계가 은둔적이며, 비세속적이었던 자세에서 벗어나 적극적인 현실참여를 표명한 것으로 한국불교사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 다만 실명으로 추정되는 승려들을 그대로 인정할 경우 그 가운데는 30본사 주지로서 표면적으로는 친일행각을 일삼았지만 실질적으로는 독립운동을 지원하였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하는 문제가 있으므로 조심스러울 따름이다. 
 
김순석(한국국학진흥원 수석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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