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⑤ 묘향산 보현사 (上)

기자명 이학종

'북 제일 가람이요' '관서의 총림이라'


11월 28일. 흐림.

'내일은 향산(香山)으로 떠나가야 하니 일찍 일어나 달라요.' 어젯밤 조불련 심상진 서기장의 당부를 떠올리며, 새벽부터 일어나 부산을 떨었다. 향산은 평양보다 훨씬 북쪽에 위치해 있어 방한모와 내복을 든든히 갖춰 입었다. 더구나 그곳에서 하룻밤을 머물도록 일정이 잡혀 있는 관계로 세면도구 등 이래저래 챙길 것이 제법 많다.

향산, 즉 묘향산(妙香山)의 순례는 이번 북한 여행의 클라이막스에 해당한다. 절승(絶勝)을 자랑하는 묘향산은 물론이려니와 북의 대표사찰 보현사가 위치해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새벽부터 일찌감치 서둔 탓으로 여느 때 같으면 식사를 겨우 마쳤을 시간에 숙소를 나섰다. 결과적으로 심 서기장의 당부가 제대로 지켜진 셈이다. 그래서인지 승합차로 오르는 심 서기장의 표정이 유난히 밝다.


'절승'으로 가는 길은 '적막'

'야 이거, 이 부장님 오늘 소원 푸는 날이네요. 이제 좀 있으면 묘향산과 보현사를 보게 되는데, 어때 기분이 괜찮지요?' '예, 서기장 스님. 몹시 가슴이 설렙니다. 얼마나 아름다울지, 눈이라도 온다면 더욱 멋지겠지요.' '그럼요. 묘향산은 예로부터 천하제일의 명승지가 아닙니까. 난 여러 차례 가보았지만 그 때마다 감동이 더합니다.'

묘향산은 평양에서 순안 공항 방향으로 가다가 갈래 길에서 향산 쪽으로 난 고속도로를 타고 2시간 남짓, 약 19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단다. 행정구역으로는 평안북도 향산군이다. 평양에 들어온 이후 그런대로 쾌청한 날씨가 이어졌는데 오늘따라 시야가 불편할 정도로 잔뜩 흐렸다. 아침 조선중앙텔레비전의 일기예보에서 비 소식이 있었는데, 묘향산은 아무래도 북쪽 추운 지방이니 비보다는 눈이 올 가능성이 클 것이리라.

향산이 가까워질수록 날씨는 더 찌푸둥해진다. 당장이라도 눈보라가 몰아칠 기세다. 고속도로라고는 하지만 차량이라곤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남쪽에선 흔하디흔한 휴게소도 찾아볼 수 없다. 용변이 급하면 갓길에 차를 세워놓고 적당한 곳을 찾아 해결해야 했는데 지나치는 차량이 없는 게 그나마 다행이다. 평양을 벗어나면 적막강산이라더니 텅 빈 고속도로를 보니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기름이 부족하고, 전기사정이 좋지 않아 밤이면 칠흑이고 운행차량도 크게 준 것 같다고 북한을 몇 차례 방문했던 한 일행이 귀띔을 한다. '만일 미국이 생트집을 잡아 끝내 중유공급을 중단한다면 강력히 맞설 수밖에 없다'는 민화협 이경철 씨의 설명은 엄동설한에 닥칠지도 모르는 전력난에 대한 그들의 긴박감을 알려주고 있다.


아무려나. 여느 때 같으면 한 순간이라도 놓칠까 싶어 두 눈을 부라리고 산천을 살피느라 정신이 없겠지만 단조로운 고속도로를 계속해서 달리다 보니 어느덧 졸음이 밀려온다. 일행의 대부분은 시나브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나 역시 깜박깜박 졸음과 싸우다가 향산에 이르러 고속도로를 빠져나오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이제 다 왔습니다. 저 앞에 보이는 세모꼴의 건물이 향산호텔입니다. 우리가 하룻밤 머물 곳이지요. 시장하니까 짐을 풀고 우선 점심부터 하도록 하지요.' 차금철 스님의 친절한 설명에 일행은 기지개를 펴며 반색이다. 묘향산에서 뜯은 산나물 요리가 일품이라는 이야기를 일찍부터 들었기에 입가엔 벌써 군침이 돌고 있는 까닭이리라. 평소 나물 등 채식요리를 즐기는 편이라 환상적인 점심이 되리라는 기대를 안고 서둘러 호텔 로비로 들어섰다. 관광객이 뜸한 겨울철이라 그런지 호텔은 빈집처럼 썰렁하다. 실내인데도 서늘한 것이 난방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모양이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배정된 방으로 오르는 동안에도 '이러다가 정전이나 되면 어쩌나'라는 염려가 들 정도로 전력이 약하다. 깜박깜박 전기가 들락날락하는 것이 극도로 열악한 전력사정을 보여주고 있다.


무공해 산채요리 '게 눈' 감추듯

서둘러 짐을 풀고 2층에 있는 식당으로 달려갔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 로비까지 내려온 다음 계단을 이용해 2층으로 올라가도록 구조가 되어 있는데, 식당으로 가는 통로가 대낮인데도 한 밤처럼 어둡다. 전등이 달려 있지만 작동이 되지 않는다. 헛발을 짚지나 않을까 조심스럽게 계단을 올라 식당으로 들어갔다. 식당의 의례원 아가씨들은 평양 아가씨들만큼 세련된 맛은 없지만 순박하고 청순한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다.

'의례원 동무, 이곳의 나물요리가 그렇게 대단합니까? 묘향산에서 직접 뜯은 나물이 확실하지요? 혹시 중국산은 아닌가 해서요.' 의례원 아가씨들에게 말을 붙이는 재미에 이것저것 물어대는데도 인상 한번 찡그리지 않고 친절하게 답한다. '이곳의 요리는 묘향산에서 직접 뜯은 나물로 만든단 말입니다. 그러니, 남쪽 선생님들이 좋아하는 무공해지요. 드셔본 분들이 아주 맛이 좋다고들 합니다.'


일행 반겨 성산은 눈을 뿌리고

두릅나물, 취나물, 고비나물, 숙주나물, 산도라지 나물과 상치와 쑥갓, 당면 등 기본 반찬들이 차려놓기가 무섭게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사라진다. 아침부터 털털거리는 승합차를 타고 두 시간을 넘게 달려와 제법 시장한 데다 의례원의 친절한 서빙이 곁들이니 진수성찬이란 이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리라. 여러 가지 나물을 한 데 섞어서 푹 끓여 만든 나물국이 밥과 함께 나오자 일행의 탄성이 잇따라 터져 나온다. 후루룩 후루룩, 여기저기서 나물국 들이키는 소리가 소란하다. 생각 같아서는 한 두 그릇 뚝딱 해치우고 싶지만 식량사정이 좋지 않은 북녘 땅에 와서 되레 체중이 불었다는 핀잔이라도 들을까 꾹 참는다. 그러나 일행 중 서넛은 나물국 두 그릇을 후딱 해치웠다.

'와! 눈이 와요. 분명히 남측 일행을 환영하는 하늘의 뜻일 겁니다.' 식사 도중 심상진 서기장이 소리친다. 잔뜩 뜸을 들이던 함박눈이 드디어 펑펑 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식당 창밖으로 서설을 바라보는 우리 일행의 눈가엔 환희심이 가득하다. 서기장 스님의 찬사가 아니더라도 이는 분명 성산에 온 우리 일행을 환영하는 세레모니가 아닌가.

묘향산의 설경을 볼 수 있게 됐다는 기쁨에 가슴이 뛰기 시작한다. 점심을 마치는 대로 보현사를 방문하도록 일정이 잡혀 있기 때문이다. 눈이 더 내리기 전에 서두르자는 조불련 식구들의 말에 따라 서둘러 승합차에 올랐다. 이제 한 10분만 가면 보현사에 도착한단다. 차창 밖으로 비치는 묘향산은 과연 절경이다. 예서 무슨 수사(修辭)가 더 필요하랴.


'묘향, 장중하고도 빼어나도다'

예로부터 묘향은 동금강(東金剛) 남지리(南地異) 서구월(西九月) 북묘향(北妙香)이라하여 우리나라 4대 명산의 하나로 꼽힌 산이 아닌가. 일찍이 서산(西山) 스님은 계림의 4대 명산을 돌아본 후 평하기를 '금강산은 빼어나기는 하나 장중함이 덜하고(秀而不壯), 지리산은 장중하나 빼어남이 부족하며(壯而不秀), 구월산은 장중하지도 빼어나지도 않고(不壯不秀), 오직 묘향산만이 장중하면서도 빼어나다(壯而亦秀)'라고 한 그대로일 뿐!

세차게 흩날리는 눈발을 헤치고 10분쯤 달려갔을까, 저 만치 전각과 탑이 어렴풋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보현사! 텔레비전을 통해서나 보았던 북(北) 제일의 가람이요 관서총림인 묘향산 보현사가 드디어 그 웅자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비록 산중에 있으나 해발 높이가 180미터에 불과해 아늑한 느낌을 주고 있다. 보현사를 감싸 안고 있는 묘향산의 능선 또한 편안하면서도 장엄한 멋을 풍기고 있다. 차에서 내리니 주지 청운(靑雲·최형민) 스님이 일주문 바깥에까지 마중을 나와 있다. 스님의 안내로 보현사 경내로 들어섰다. 눈 덮인 보현사, 이 신이(神異)한 광경이라니!



향산=이학종 기자
urubella@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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