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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항쟁,청정개혁 역량 결집되길”

기자명 법보신문

6월항쟁 20년사업 불교추진위
상임고문 백양사 유나 지선 스님

‘6월 민주항쟁 20년 사업 불교추진위원회(상임공동대표 명진·여익구. 이하 불교추진위)’는 3월 3일 오후 1시 조계사에서 1987년 6월 민주항쟁의 도화선이 됐던 서울대생 박종철 씨의 죽음을 추모하는 천도재(遷度齋)를 봉행한다. 불교추진위는 6월 민주항쟁을 촉발시킨 박종철 열사 49재 천도 및 추모행사를 통해 6월 민주항쟁의 역사적 의미와 당시 불교의 역할을 재조명하는 기회로 만들겠다고 밝혔다. 이에 본지는 당시 6·10 민주항쟁을 주도했다는 이유로 구속 수감됐던 불교추진위 상임고문 백양사 유나 지선 스님과 서면 인터뷰를 실시했다.  편집자 주

▷ 스님께서 생각하시는 6월 민주항쟁 정신이란?
20년 전 한국사회는 반민주, 반자주, 반민족 민중의 시대로서 사람들의 자유와 인권은 간데없고 체포, 구금, 사형, 의문사가 횡행하던 군사독재 시절이었다. 국민은 안중에도 없고 외세에 의존한 독재세력의 정권유지만을 위한 엄혹한 시기였으니 그것은 지배세력의 문제도 문제이려니와 미국의 세계정책에 따른 한국이 새로운 형태의 식민지였기 때문이다. 국민의 민주화 요구를 묵살하고 인권탄압은 물론 지배세력의 민중에 대한 탄압과 수탈 정권의 갈 길은 필연적으로 외세의존과 독재화의 길 뿐이어서 국민들의 앞날은 참담함 그 자체였다. 특히 미국 우방 국가들 중에서 미국의 정책과 요구를 가장 잘 받아주는 우등생 국가였던 당시 한국은 강대국에 더욱 예속적이어서 그에 반대하는 세력과 개인에 대해서는 극악무도한 탄압정책을 쓸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군사독재 치하에서는 국민대다수가 피해자가 되기 때문에 소시민들과 일부 상공인 그리고 중산층들과 그 자녀 학생들은 떨쳐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당시 민주항쟁 정신은 국민 각계각층의 공동 요구사항인 반독재, 반민주, 반외세였고 대통령 직선제 요구였다. 이는 국민들의 정치·경제적 민주화와 인권, 자유를 갈망하는 민주국가의 기본적인 주권재민의 문제였다.

▷ 6월 민주항쟁의 불교적 의미와 불교의 역할은?
불교적이나 불교를 떠나서 전 국민, 전 중생의 기본적인 요구이자 삶에 따른 급박한 현실적 문제로서 국민이라면 당연히 앞장서야 할 문제였으며 죽음의 시대, 탄압과 수탈의 시대를 이끌고 있는 군사독재세력의 퇴진운동이었고 불교의 중생에 대한 발고여락의 실천이었다. 전 중생이 떨쳐 일어나는 일에 불교도가 방관했다면 지금의 한국사회는 어떻게 되었겠는가. 민간정부가 들어서고 모든 면에서 자유를 맘껏 구가하는 시대가 도래 할 수 있었겠는가? 그 당시 불교도의 동참이 없었다면 감히 말하건 데 6월 항쟁은 실패했거나 더디 진행됐을 것이다. 참으로 소리 없이 내세우지 않고 위대한 실천으로 훌륭한 역할을 해냈다고 자부한다.

▷ 박종철 49재 당시 승가와 재가의 활동은?
종단의 기득권 세력과 이를 반대한 세력 간에 차이가 있었다. 예컨대 당시 총무원장은 기자회견을 통해 “집안 대대로 불교신도인 故 박종철 영가를 위해 조계사에서 49제를 지내겠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49제날은 조계사 정문을 굳게 닫히고 종각의 종 채는 쇠사슬로 붙들어 맨 체 조계사를 비워버렸다. 우리 젊은 스님들과 청년·학생 재가불자들은 겹겹이 둘러싸인 무장경찰들의 포위망을 뚫고 조계사 정문에 도착했지만 굳게 닫힌 쇠창살 문안에서는 성난 노보살들의 모래와 물벼락이 계속 내리고 있었다. 우리는 할 수 없이 상가에서 빌린 작은 상에 박종철 영가 위패를 모시고 향만 사른 채 준비해간 목탁과 요령으로 49제를 선채로 봉행했다. 그렇게 짧은 49제는 난생 처음이었다. 반야심경이 끝나기도 전에 전경들이 쏘아대는 최루탄 세례는 엄청났고 모두가 밀가루를 뒤집어 쓴 것처럼 보였고, 나 또한 가사장삼에 최류탄 가루로 뒤범벅이 되어 죽음의 고통을 느꼈다. 모두가 흩어져 시민들과 약속한 장소로 떠났고 홀로 주저앉아 전경들의 옥죄임 속에서 정신을 차려보니 지휘관이 놓아주라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여기 이렇게 앉아 있음이 선방에서 화두를 들고 좌선할 때와 무엇이 다른가? 번쩍 스치는 생각에 공(空)의 실현, 무(無)의 실현인가 되 내이며 허탈하게 일어나 주위상가에 들어가 얼굴을 씻었다. 그날 우리 사부대중이 조계사 앞에서 전경과 몸싸움하는 모습이 신문의 톱을 장식하면서 민주화 운동에 소외되고, 어용으로만 불리었던 불교도가 시대의 아픔에 동참하는 역사적이고 상징적인 사건이 되었다. 그날 이후 뜻있는 사부대중은 그야말로 역사적 책임의식을 갖고 6월 항쟁 그 뜨거운 민주주의 함성 속으로 달려갔다.

▷ 20년 전 박종철 49제 이후 불교계는 어떤 움직임이 있었나?
우리 국민 대다수가 그랬듯이 완전한 민주화를 위한 노력을 계속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민간민선 정부가 들어서고 대통령 하나 바뀐다고 세상이 바뀐 것은 아니다. 그것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이 물러가면 한나라가 되어 같은 민족끼리 잘사는 세상이 될 줄 알았지만 그 반대로 미국에 예속되어 똑같은 신식민지의 길을 가면서 서로 다투고 죽이는 세상이 되는 것이나 마찬 가지였다. 10·27법난 이후에나 1994년 종단개혁 이후 무엇이 달라졌을까? 전 국민과 전사부대중의 정법과 사회역사의식이 깨어있지 못하면 모든 일은 일회용이 되고 만다. 그만큼 권력과 부와 조직이 막강한 기득권 세력의 반발과 간교한 반격은 무서운 것이다. 물론 달라진 점도 상당히 있다. 현상은 그렇지만 본질적인 면에서는 그대로다. 우리 불자들은 정법구현과 파사현정, 대사회적, 대국민적으로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가? 이웃종교와 비교해서는 안 되지만 각자 생각해 보기를 바란다. 누구를 탓하지 말고 자신부터 생각해 보자는 것이 나의 바람이다.

▷ 민주항쟁이 불교계에 미친 영향은?
당시에는 상당한 영향을 미친 것 같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회의적이다. 그 당시 우리 불자들, 특히 젊은 불자들은 역사를 창조해 가는 시대하고 생각했다. 바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힘을 모으면 자신도 변하고 세상도 변화시킬 수 있다고 확신했다. 그 점은 분명하고 옳은 판단이다. 그러나 끝없는 자기 수행과 그 수행에서 얻어진 결과를 대중 속에서 실천을 통해 검증하고 확인하며 거듭나야한다. 또한 이러한 불자들이 늘어날 때 자연히 그 사회도 계속 발전돼 가는 것이다. 그러나 나를 포함한 우리는 그러지 못했고, 지도해 줄 스승도 없었다. 그래서 스스로 욕망(번뇌)에 빠져 자기를 합리화하고 변명하면서 기존세력처럼 돼버렸다. ‘혼자는 안 된다’, ‘능력이 없다’, ‘쉽게 바꿀 수 있겠는가’ 등 스스로에 대해 느슨하고 관대해지고, 나이가 들어가면서 변해버렸다. 당시의 성취감과 앞으로는 잘될 것이라는 방심이 과거 불교계로 돌아가게 한 것이다. 다만 지금도 당시의 정신을 잊지 않고 활동하는 스님이나 재가 불자들의 올바른 활동은 불교와 세상을 맑고 향기롭게 만들어가고 있다.

▷ 스님은 어떤 일을 해 왔나?
1985년 4월 광주에서 민족문학회를 만들어 활동을 하다가 민중불교연합이 발족되면서 연대활동이 본격적으로 진행했다. 이후 정토구현전국승가회와 불교관계악법철폐운동공동대책위원회 등에서 활동했다. 1987년 서울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상임대표와 광주전남 본부 공동의장을 겸하고 있다가 1987년 6월 7일 성공회성당에 들어가 국민운동본부 상임대표로서 6월 민주항쟁을 주도했다. 특히 6월 10일 성공회성당 꼭대기에 올라가 ‘노태우 대통령 후보선출 무효’ 대국민 방송을 시작, 6·10 민주항쟁 주되 죄로 구속돼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다. 그 뒤 불교계와 사회운동 단체인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국연합 등 80여 단체에 대표나 공동대표가 되어 1994년까지 활동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 보면 부끄럽고 또 부족한 역량으로 허물만 쌓았다.

▷ 사부대중에게 하시고 싶은 말씀은
3월 3일 조계사에서 열리는 박종철 49제 추모행사는 동안거 해제 전날이라서 참석하지 못할 것 같다. 백양사에 있어 비록 참석은 못하지만 박종철 영가와 민주화 통일 열사 영가를 위해 천도 축원을 올릴 것이다.

나는 끝까지 실천하고 책임지지도 못하면서 너무나 많은 말을 하고, 쓰고, 뛰어다니며 행동했다. 15년 정도 소위 재야활동이라면서 불교계뿐만 아니라 사회, 민족, 민주, 통일 활동을 해왔으나 내가 무엇을 해냈는지 모르겠다. 승속을 막론하고 옳고·올바른 세상, 정토를 구현해야 한다는 의식변화에서 군부독재만행의 불신풍토에 맞서 국민대중과 함께 자연 발생적으로 실천해 기적 같은 6월 항쟁의 승리를 이끌어 냈다. 누구누구가 영웅처럼 견인해 전 대중을 의식화해 6월 항쟁의 승리를 이끌어 냈다고 보지 않는다.

우리 불교의 위상과 역량을 어떠한가? 민주적 방법으로 종단개혁 이행의 길이 터진 시기인데도 그때 그 사람들과 정글화 된 허물투성이인 사람들이 서로가 서로들 묵인하면서 종권주의 기회주의 처세주의 행세주의로 비승비속의 길을 가고 있는 사람들은 옛날로 돌아가자 한다. 청정한 개혁세력은 없는가? 그 역량을 결집할 시기이다. 그래야 산다. 나는 다시 한 번 사부대중 앞에 손 모으고 참회한다. 내 인생 전부의 과오를, 용서하고 이해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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