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④ 공주 영평사 주지 환 성 스님

기자명 법보신문

농부의 마음으로 ‘공주 불국토’ 일구다

공주 영평사에 들렀다. 서울을 벗어나 한적한 도로를 달리니, 봄은 어느 결에 지천으로 널려 있다. 산사도 예외는 아니다. 시원스레 펼쳐진 도량 마당은 파릇한 잔디에 즐거운 비명을 지르고, 따사로운 햇살 위로 대웅전 풍경 소리가 투명하게 부서진다. 온몸을 휘감고 부서지는 그 청명한 울림. 법문이 따로 없다. 넋이 빠진 듯 한참 동안 봄날이 들려주는 불이(不二) 법문을 경청한 후 깨끗하게 비워 낸 마음으로 영평사 주지 환성 스님을 만났다. 햇볕이 살포시 내려앉은 요사 안에서 녹차를 앞에 두고 마주 앉은 스님의 미소가 따사로운 봄날을 닮았다.

“작설을 연에 싸서 얼렸다가 이렇게 얼음물에 우려내면 맛이 남 달라요. 내가 발명한 차 마시는 방법인데, 어때요. 맛이 깊지요.”

얼음이 둥둥 뜬 커다란 숙우에 들어갔다 나온 비취빛 작설은 향긋하면서도 청량하다. 시원한 차를 한 모금 들이키자 이어 스님의 삶들이 향기가 되어 몸속에 퍼진다.

베일에 쌓여있는 신비의 나라 백제 천년 역사가 공주에 큰 빚을 지고 있듯, 공주의 포교는 환성 스님의 땀과 노력에 의지하는 바가 크다. 20년 전 연고 없는 공주에 혈혈단신 영평사를 창건한데 이어 어린이와 청소년, 재소자, 군포교를 위해 그야말로 쉼 없이 달려왔다. 청소년연합회 공주지부장, 청소년자원봉사센터 소장, 법무부 공주교도소 종교위원, 충남 청소년 활동진흥센터 소장. 스님 법명 앞에 붙은 다양한 직함들은 이런 노력의 지울 수 없는 흔적들이다. 특히 올해로 8회째를 맞는 영평사 구절초 축제는 참가 인원만 6~7만 명에 이르는 불교계의 대표 축제. “꽃이야 자연이 피우는 것이고 나는 그저 차만 따를 뿐”이라는 겸손에도 불구하고 포교를 위한 스님의 노력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영평사의 20여 년 세월이 공주지역 포교의 역사라는 지역 내 평가도 이런 이유에서 일 것이다.

“거창한 뜻이 있어서 영평사를 창건한 것은 아니에요. 그저 목숨 걸고 수행하겠다는 일념 하나로 작은 토굴과 텃밭을 마련했지요. 그런데 어떻게 알았는지 스님이 있다는 소리를 듣고 노보살님들이 한분 두분 올라와요. 고민이 많았지요. 수행한다고 매정하게 내칠 수도 없고, 법회를 하게 되면 수행이 제대로 안 될 것 같고. 하지만 결국 법회를 시작했어요. 노보살님들의 맑고 순수한, 그 아름다운 마음을 저버릴 수가 없었기 때문이지요.”

어린이-군·재소자 전방위 포교

20년 전 당시 영평사가 위치한 장기면 신학리는 길도 제대로 닦이지 않은 오지 가운데 오지였다. 노선버스가 없었던 것은 당연지사. 법회가 있을 때마다 노보살님들은 수 십리가 넘는 험한 산길을 육신 지탱에도 힘겨운 팍팍한 무릎을 재촉해 절에 올랐다. 거친 숨소리와 마른기침. 마지못해 토굴을 개방했지만 스님은 마음이 아렸다. 20여 년, 바랑 하나 등에 지고 전국의 선원과 토굴을 바람처럼 돌며 수행에만 매진했던 눈푸른 납자. 그런 스님도 중생에 대한 연민을 떨쳐 버릴 수는 없었던 것이다.

스님은 결국 봉고차를 구입했다. 빈약한 주머니 사정상 차 값은 할부였다. 이때부터 스님은 절 인근 마을을 돌며 할머니들을 실어 나르기 시작했다. 기사는 스님의 몫. 그래봐야 이용객이 10여명을 채 넘기 힘든 시절이었다. 화두를 챙기던 수좌에서 보살의 삶으로, 스님의 삶은 이렇게 2막으로 달리고 있었다.

법회를 시작하니, 포교가 화두보다 먼저 잡혔다. 봉고차를 몰며 동네를 다니다 보니 어린이 포교가 심각한 위기에 직면해 있었다. 오지임에도 곳곳에 교회가 들어서고, 아이들은 교회를 놀이터로 알고 자랐다. 때문에 할머니들은 손자 손녀와의 의사소통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어린이 포교가 심각하다는 것을 느꼈어요. 아이들이 전부 교회를 가니, 이래서 불교의 미래가 있겠는가 걱정도 되고, 또 노보살님들도 손자, 손녀와의 의사소통에 많은 고통을 겪고 있었어요. 그래서 일단 봉고차 2대를 더 사서 3대로 늘리고, 토요일마다 공주 곳곳의 학교와 동네를 누비며 아이들을 법당으로 실어 날랐지요. 처음엔 10명, 그 다음엔 20명, 이러다가 어느날부터는 70~80명으로 늘더군요. 1989년인가, 당시 처음 여름불교학교를 시작했는데 200명이 넘는 아이들이 몰렸어요. 그때의 감동이 지금도 아련해요.”

어린이들이 법당으로 몰리자, 지역 교회와 개신교 신자들의 저항이 거셌다. 개신교 선생님들은 수업 시간에 “절에 가면 지옥간다”는 입에 담지 못할 말을 아이들에게 버젓이 주입했고, 교회 청년들은 토요일마다 몰려나와 봉고차에 타는 아이들을 온 몸으로 막았다. 그러나 스님은 동요하지 않았다. 시비가 붙으면 설득하고, 대화가 되지 않을 때는 침묵으로 인욕했다. 다만 이로 인해 아이들의 마음에 분노의 그늘이 드리우지 않을까하는 걱정이 앞섰다.

허나 당시 스님 마음에는 누구에게도 말 못할 고민들이 조금씩 쌓이고 있었다. 변변한 대웅전도 없는 작은 절에서 봉고차를 3대나 굴리다보니, 금전으로 인한 고통이 꽤 깊었다. 농사일이 천직인 영평사 신도들의 사정을 감안하면 법당 수입으로는 봉고차 운전기사 월급도 버거웠다. 여기에 늘어나는 어린이들을 감당하기 위한 여법한 법당 마련도 필수였다. 평생을 좌복 만한 한 뼘 공간으로 만족하며 살았던 스님에게 포교를 위한 별다른 주머니가 마련돼 있을 리는 만무한 일.

20년 만에 5만여평 도량 일궈

“마음 먹으면 돌아보지 않고 시작하는 습성이 있어요. 어린이 포교도 잘 해야겠다는 생각만 했지 재원 마련에 대한 별다른 계획은 없었어요. 그런데 법회가 활성화되고 지도하는 선생님들도 늘다보니 재원을 감당할 수 없을 지경이 되더군요. 그래 고민 고민하다 시작한 것이 죽염과 된장 사업이었어요. 지금이야 된장 만들지 않는 사찰이 없을 정도로 보편화 됐지만 절 집 가풍상 당시로는 파격이었지요. 어린이 법회를 포기할 수는 없고, 재원은 마련해야겠고, 해서 그야말로 살얼음 걷는 기분이었어요.”

처음 영평사에 자리를 틀 때 스님은 “일하며 수행하며 포교하며 정진하다”는 슬로건을 내걸었다고 한다. 그래서 토굴 주변에 작은 텃밭들도 일구었다. 일일부작(一日不作)이면 일일불식(一日不食). 수행이든 포교든 스스로 노동을 통해 호구지책을 해야 한다는 것이 스님의 가풍이었다.

“죽염과 된장의 수익금으로 포교를 한다는 것이 한편으로는 부끄럽기도 해요. 큰 깨달음을 얻어 법력으로 포교를 해야 하는데, 수행은 부족하고 능력이 딸리니 부득이 이런 방편을 쓰는 것이지요.”

곰소산 1등급 천일염을 담양의 대나무에 넣고 9번 구워 만든 죽염과 공주 지역의 콩을 이용해 만든 된장은 인기가 좋았다. 최고 품질의 재료만 쓰다 보니 이윤은 많지 않았지만 스님은 여기에서 마련한 재원을 바탕으로 활동에 날개를 달았다. 어린이 포교를 넘어 1995년에는 청소년연합회 공주지부를 설립하고 1998년에는 청소년자원봉사센터와 문화의 집을 개소했다. 또 2003년에는 청소년 활동진흥센터 소장으로 추대되는 등 청소년 포교에 남다른 애정을 쏟고 있다. 지역 내 초등학교와 중학교, 청소년자원봉사센터에 활동하는 어린이,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장학금을 지원하는 것도 이런 포교의 연장선이다. 어린이 법회를 기점으로 시작된 포교의 열정이 미래 불교의 동량이 될 청소년 포교로 자연스럽게 확장된 것이다.

“몇 해 전에 영평사 앞에 죽염과 된장을 전문적으로 만드는 식품회사를 차렸어요. 영평식품이라는 회사인데, 죽염과 된장, 간장, 청국장, 구절초진액, 헛개나무 등 다양한 상품들을 보급하고 있지요. 회사 설립 과정에서 적지 않은 빚을 졌지만 여기에서 생긴 1억여 원의 수익금을 매년 청소년 포교뿐 아니라 교도소와 군 포교에 쓰고 있으니, 저로서는 참으로 다행한 일이지요.”

영평식품에 대한 스님의 자부심은 대단하다. 사찰에서 가내 수공업처럼 해오던 일을 회사까지 차리며 시작하게 된 이유는 시중의 소금과 된장이 오염된 중국산이거나 밀가루와 유전자조작 콩으로 만든 된장임을 알고 나서부터. 죽염과 제대로 된 된장 보급이 국민 건강을 지키는 생명줄이라는 지론은 어느새 스님의 신념이 됐다.

스님은 2~3년 전부터 새로운 포교에 나서고 있다. 행복수련원과 템플스테이 운영이 그것이다. 행복수련원은 실패와 좌절, 각종 질병, 잘못된 습관으로부터 헤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을 수행을 통해 치유하는 사랑과 자비의 수련원이다. 올해에는 대전 노원 신도시 지구에 포교당을 마련, 도시민들을 위한 행복수련원을 운영할 계획이다. 또 구절초와 백련이 어우러진 영평사의 아름다운 환경을 이용한 템플스테이의 상시 운영도 포교에 작은 힘이 되고 있다.

“절 짓는 것을 불사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러나 절 짓는 것은 불사가 아니에요. 마음자리 찾는 것이 진짜 불사지요. 절을 짓든 포교를 하든 이 점을 놓친다면 그 순간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한참을 벗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영평식품 설립, 수익 전액 전법에

스님은 영평사를 사부대중이 함께 수행하는 종합 수행도량으로 가꿀 계획이다. 비록 빚이 태반이지만 뙈기논이 여법한 절로 탈바꿈했고, 대웅전에, 요사채에 사격도  갖췄다. 따라서 이제는 승속 차별 없는 부처를 뽑는 선불장으로 도량을 내놓을 생각이다. 선심초심(禪心初心)이라는 말이 있다. 처음과 끝이 같기가 어디 쉽겠는가. 다만 변치 않는 스님의 포교 열정에서 성현의 말을 짐작해 볼 뿐이다. 아침 햇살처럼 맑은 스님의 미소에서 충청도 사람 특유의 뚝심이 묻어난다.
 
김형규 기자 kimh@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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