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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초(民草)들의 불교

기자명 법보신문

이 기 화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남도(南道)에는 언제나 따뜻함, 포근함이 있다. 산들도 비교적 나지막하고 여인의 몸매처럼 그 윤곽이 부드럽게 흘러간다. 봄날 아지랑이 같은 어떤 모호한 느낌, 어떤 나른함, 편안함, 이것이 남도가 나에게 주는 매력이다. 서울 생활이 고달프게 느껴질 때, 때로 내 삶이 싫어질 때, 나는 언제나 내가 어릴 때 자란 남도의 이러한 느낌들을 그리워한다.

최근에 남도에 갈 기회를 가졌다. 현지의 한 교수가 고맙게도 차편을 제공해 화순, 보성, 순천, 강진, 해남, 목포 일대를 여행했다. 간 김에 내 여행이 항상 그러하듯이 주변의 명찰들을 찾았다. 화순 운주사, 순천 선암사, 강진 백련사, 해남 대흥사에 들렸었다. 운주사는 초행이었지만 아주 신선한 느낌을 받고 왔다.

궁벽한 어느 시골 골짜기에 수많은 불상과 탑들이 마치 묘석(墓石)처럼 흩어져 있는 절 같지 않은 절이었다. 운주사의 조성연대와 그 배경은 아직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고 한다. 운주사의 기원에 관한 여러 학설들을 있지만, 이번 여행에서 들은 이 일대의 토호(土豪)들이 세웠다는 이야기에 마음이 끌렸다.

운주사의 석불과 석탑들은 전문적인 석공이 조성했다고 보기에는 퍽 조잡하다는 느낌을 준다. 석재도 풍화에 약한 응회암(凝灰巖)으로 되어있다. 따라서 이 지역의 토호들이 전문적인 석공이 아닌 사람들을 고용해 이 일대의 응회암으로서 틈틈이 이 석불, 석탑들을 조성했으리라는 설이 그럴듯하게 여겨졌다. 다시 말하면 이 수많은 석불과 석탑들은 민초들이 기성 불교교단과 거의 무관하게 자신들의 힘으로 오랜 기간에 걸쳐 세운 것이라는 이야기가 된다.

어떤 원로 스님은 한국 불교에는 부처님이 없고 불법과 승가만 있고, 이것이 큰 문제라고 말씀했다. 다소 극단적으로 들릴 수도 있지만 일리가 없는 것도 아니다.

우리나라 불교가 생명력을 잃어 가고 있다 한다. 이유가 무엇일까? 민초들에게 어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선(禪)은 최상근의 사람에게 맞는 불교의 형태다. 마음은 형체(相)가 없어 우리의 오관으로 감각할 수 없다. 선은 화두를 들고 이 보이지 않는 마음을 찾으려고 노력한다. 참선이 성불하는 가장 빠른 길이라는 것이 선불교의 긍지이다. 그러나 형체에 오래 집착해 온 우리 범부에게 이것은 지극히 어려운 길이다. 이러한 어려운 방법을 중하근기의 민초에게 강조하기 때문에 한국불교가 민초에게 어필하지 못한 것이 아닐까?

중하근기의 민초들은 무언가 가시적인 형태의 구원을 원한다. 그들이 괴로움 속에서 헤맬 때, “이뭣고?”, “범소유상개시허망”, “관세음보살” 중 어디에서 구원을 찾을 것인가? 운주사에 가보자. “이뭣고?”나 “범소유상개시허망”을 모르는 민초들에 의하여 수많은 불상과 석탑들이 세워졌다.

이곳에 원초적 형태의 불교, 그들을 고통에서 구원해줄 부처님과 묘석 뒤 저편에 아득히 빛나고 있는 정토에 대한 그리움이 조용히 절규한다.

괴롭고 외로울 때, 나는 어릴 때 자란 남도의 따스하고 아름다웠던 풍광을 그리워한다. 가시적인 고향을 말이다. 이제 우리는 정토신앙을 새로운 차원에서 진지하게 조명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형체에 오랫동안 집착해온 민초에게 어필할 수 있는 가시적인 불교의 형태로서 말이다.

정토는 우리가 아름답고 즐거운 환경에서 수행하여 성불할 수 있도록 부처님의 지극한 원력으로 이루어진 불국토이다. 정토는 상중하 모든 근기의 중생이 돌아가야 할 잃어버린 마음의 고향이다. 가시적이고 아름다운! 생명력을 잃어가고 민초들로부터 유리되어가는 한국불교를 일으키는 길이 여기에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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