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고프면 밥 먹고 목마르면 물 마시는게 ‘반야’
배고프면 밥 먹고 목마르면 물 마시는게 ‘반야’
  • 법보신문
  • 승인 2007.05.01 13:4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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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치관 바꿔야 행복
듣고보는 모든게 지혜

어리석음 때문에 돈 낭비
1년 수조원에 이를 것

<사진설명>고우 스님이 중국선종사찰 순례에 나선 불자들과 함께 광주 광효사 육조전에서 반야심경을 봉독하고 있다.

14. 성품이 빔(性空)

자성이 만법을 포함하는 것이 곧 큰 것이며 만법 모두가 다 자성인 것이다. 모든 사람과 사람 아닌 것과 악함과 착함과 악한 법과 착한 법을 보되, 모두 다 버리지도 않고 그에 물들지도 않으며 마치 허공과 같으므로 크다고 하나니, 이것이 곧 대승(大乘)이다.

이 모든 만법이 성품과 분리되어 있지 않아요. 하나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자성(自性)이라 하지만 크게 보면 법성(法性)이라 표현하기도 합니다. 그럼, 지금 우리가 보는 이 책 속에 자성이 있어요. 컵에도 있고, 안경에도 자성이 있습니다.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나에게도 그 자성이 있습니다.

그런데 나의 자성과 다른 물건의 자성이 다르냐? 아니에요. 하나예요. 크게 볼 때 우리는 이것을 법성이라고 해요. 그러면 자성과 법성이 둘이 아니에요. 하나는 광의로 해석하는 것이고, 하나는 좁게 해석한 것뿐입니다.

파도도 큰 파도가 있고 작은 파도가 있어요. 작은 파도 속에도 물이 있고 큰 파도 속에도 물이 있는 거예요. 물이 둘이 아니에요. 큰 파도 전체와 작은 파도 전체를 볼 때 법성이라 하고 개개의 존재로 볼 때는 자성이라고 합니다.

이 자성은 있다고만 보면 아트만이 됩니다. 이 자성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여기에도 일체 존재 자체가 자성이다. 파도나 물이나 둘이 아니니까 일체 존재가 다 자성이다. 그래서 일체 모든 사람과 또 사람 아닌 것과 악한 것과 선한 것과 선한 법과 악한 법을 다 버리지 않아요.

우리가 자성 자리, 실체가 없고 공이라는 그 자리를 보게 되면 둘이 아니거든요. 형상이 자성이고 자성이 형상이고 하나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버리지도 아니하고 거기에 물들지도 아니하고 그렇게 되는 것을 마치 허공과 같이 되어 있어 그것을 이름하여 대승(大乘)이라 합니다.

대승(大乘)이란 크다는 뜻이죠. 크게 행하는 사람이지, 졸장부가 아니예요. 대장부가 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기라는데 집착하는 사람은 졸장부예요.

불교에서는 자기 성품을 본 사람이 대인(大人)입니다. 대승행은 대장부가 하는 행위입니다. 남자, 여자도 마찬가지입니다. 남자라고 다 대인이 아닙니다. 여자도 그 성품 자리를 보면, 남자의 몇 십 배, 몇 천 배 능가하는 대인이 되는 겁니다.

옛날에 유교가 지배하던 시대에서는 아녀자라 해서 여자를 어린 아이와 같이 취급했습니다. 하지만 부처님은 절대 그렇지 않아요. 대승행은 남자, 여자도 없고 어른, 아이도 없고 스케일이 크고 대범하고 소심하고 이런 게 없어요. 이 자성만 알면 그 사람은 대인이고 대장부입니다,

그래서 절 법당에 가면 ‘대웅전(大雄殿)’이라 쓰여 있는 겁니다.

미혹한 사람은 입으로 외고 지혜로운 사람은 마음으로 행한다.

일체가 연기이고 공인 줄 모르고 매일 마하반야바라밀다를 외워도 그것은 소용이 없습니다. 왜 일체가 실체가 없고 공인지 이해하면, 자연히 마음으로 행하게 됩니다. 누가 하라 하거나 하지 말라 하거나 관계없이 그렇게 합니다. 왜냐 하면 그렇게 하는 것이 마음이 훨씬 즐겁고 행복하니까 합니다.

또 미혹한 사람은 마음을 비워 생각하지 않는 것을 크다고 하나, 이것도 또한 옳지 않다.
아까 빈 마음으로 하면 허공 같다고 하니까, 그 사람은 마음을 아무 생각 없는 상태로 두는 것이 그게 공인가 보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마음의 양이 넓고 크다 하여도, 행하지 않으면 곧 작은 것이다. 입으로만 공연히 말하면서 이 행을 닦지 않으면 나의 제자가 아니다.

입으로 말만하고 행을 닦지 않으면 안 됩니다. 닦지 않는 사람은 육조 스님뿐 아니라 부처님 제자도 아닙니다. 이 세상에 이런 사람이 참 많아요. 이런 사람은 문제가 생겼을 때 문제 해결을 힘으로 풀지요.

정말 이 세상에서 힘으로 해결 하지 않고 부처님이 말씀하시는 중도 연기로 해결한다면 좋은 세상이 될 수 있는데 그게 잘 안돼요. 다른 나라는 놔두고 우리나라부터 그래요. 지도층에서 먼저 해야 합니다. 그게 안 되니까 서민들까지도 그렇게 안 하면 불이익을 받는다는 생각이 나서 이익 중심으로 행동하게 되고, 또 부처님이 발견한 이 존재 원리를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쫓아가거든요. 그것도 행복해지는 방법이라 열심히 하는데 이 존재 원리로 볼 때 사실은 행복해지는 방법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 스스로 깊이 반성해서 가치관을 바꿔야 합니다. 가치관을 바꾸면 정말 뭔가 달라집니다. 가치관을 바꾸기만 하면 지금까지 해오던 어떤 수행 방법도 바꾸지 않아도 나한테 맞다는 생각이 들게 됩니다. 열심히 하다보면 내 주변부터 보는 시각이 달라지는 것을 느낍니다. 그러면 지금보다 마음이 훨씬 편안해지고 자유로워지고 그것이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 갈 것입니다.

이렇게 조금씩 해보면 좋은 줄 알게 됩니다. 그럼 스스로 좋다는 것을 알게 되면 이웃 사람에게 자꾸 권할 것입니다. 나도 남한테 권하면서 배운 게 참 많아요. 또 남한테 해보라 권하면서 내가 안 하면 안 되니까 그것이 나를 공부하게 합니다.

그래서 일단 시도해 보세요. 해보고 좋다는 생각이 들면 능력만큼 남한테 권해 보세요.

우리가 부처님 법 만나는 것을 “백천만겁 동안 만나기 어렵다(百千萬怯 難遭遇)”라고 하는데 이렇게 만난 것을 굉장히 다행으로 생각하고 부디 부처님 법을 통해서 행복해져야 합니다. 행복해지기를 바라면 열심히 실천하세요.

그러니까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부처님이 깨달은 세계의 핵심이 무엇이냐? 중도 연기입니다. 그 핵심만 알면 여러 가지 다양한 불교 얘기들이 같은 말입니다. 그래서 중도 연기를 항상 염두에 두고 공부해야 합니다.

15. 반야(般若)

그동안에 육조 스님이 깨친 후 대중에게 법문을 하셨는데, 제일 먼저 정혜를 설하셨고, 무념, 좌선, 삼신, 사홍서원, 참회, 삼귀의, 성품이 공하다는 성공(性空)을 했습니다. 이제 반야(般若)인데 지금까지 다양하게 말했지만, 결국 모두 우리 존재 원리를 설명한 겁니다.
그래서 이 중에 하나만 제대로 이해하면 전부 다 이해합니다. 육조 스님께서는 대중에게 하나를 설명해도 이해하지 못하니까 여러 가지로 설명하시는 겁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상근기들은 한 마디에 바로 존재 원리를 알아 단박에 괴로움이 없어졌지만, 또 다양하게 얘기해야 알아듣는 분들도 있으니까 이렇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육조 스님께서 여러 번 반복해서 말씀하시니까 편안한 마음으로 무슨 말씀을 하신 것인지 이해하려 노력하면, 그것이 우리 생활과 직결 되어 정말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길이 열립니다.

여기 “반야(般若)”는 우리가 법회 할 때 늘 외우는 그 『반야심경(般若心經)』의 반야입니다. 우리가 지금 얘기하고 듣고 보고 하는 이게 반야입니다. 반야가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이 반야의 기능을 제대로 못하고 있을 뿐이지 멀리 있는 게 아니에요.

『반야심경』에서 이 반야를 통해서 모든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이 있다고 했습니다.

“무엇을 반야(般若)라 하는가? 반야는 지혜이다.

지혜나 반야나 같은 말입니다. 지금 우리가 듣고 보고 하는 이것이 반야입니다. 평상심이라고도 하지요. 배고프면 밥 먹고 목마르면 물 마시는 평상심이 반야입니다.

언제나 생각 생각마다 어리석지 않아 항상 지혜를 행하는 것이 곧 반야행이라 한다.

일상생활 행주좌와어묵동정(行住坐臥語默動靜)에 생각 생각이 어리석지 않아 항상 지혜를 행하는 것이 곧 반야행이라고 합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이 생각 생각이 어리석지 않으면 했거든요. 어떻게 하는 것이 어리석지 않은 것이냐? 이 얘기를 지금 계속 반복하고 있어요. ‘나다-너다’ ‘좋다-나쁘다’ 이렇게 구별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어리석은 생각이에요.

우리는 24시간 생활하면서 너무 어리석은 생각을 많이 하고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다-너다’ ‘좋다-나쁘다’ 이렇게 개인적으로도 어리석은 생각을 많이 하고 살지만,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정치하는 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슨 진보니 보수니 이렇게 나눠서 사고하고 있는 그것이 어리석음입니다.

지금 우리는 목적과 수단이 혼돈된 사회에서 살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정치를 봅시다. 정치의 목적은 국리민복(國利民福)입니다. 국민한테 잘 살게 하고 국가가 잘 되게 하는 것이 정치의 목적입니다. 그런데 지금 정치하는 사람들은 그게 아니거든요. 당리당략과 개인의 이기심에 목을 매고 싸움질 하니까 국민, 국가는 안중에 없습니다. 목적만 깊이 인식하면 정말 달라진 정치를 할 것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에 이런 의식 전환 운동이 어느 때보다도 필요로 합니다. 공장 몇 개 짓는 것과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어리석은 생각 때문에 사회에서 치르고 있는 대가가 엄청납니다. 그것만 모아도 1년에 몇 십조 원이 될지도 모릅니다.

공장 많이 지어 놓고도 노사 갈등으로 분규가 나 전부 다 까먹으면 뭐 할 겁니까? 공장 덜 짓더라도 까먹지 않고 사회에서 유용하게 적재적소 잘 쓰면 국민들한테 고루고루 혜택이 갑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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