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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사 고려대장경판의 수난과 영광

기자명 법보신문

김 상 현
동국대 교수

조선 태종 4년(1414) 7월 11일. 국왕이 말했다. “일본 국왕이 대장경을 구하니, 경판을 주는 것이 어떠한가?” 한 신하가 답했다. “보내준다고 무엇이 해롭겠습니까?” 정탁이 아뢰었다. “일본 사신의 왕래는 오직 불법을 얻기 위한 것인데, 만약 경판을 주어 버리면 다시 오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그래서 경판을 일본에 주지는 않았다. 다시 세종 5년(1423) 12월 25일. 일본 사신이 뻔뻔스럽게 아뢰었다. “해마다 대장경을 요구하는 일이 번거로우니, 대장경 판본을 준다면 다시는 시끄럽게 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처음에 임금은 대장경 목판이 무용지물(無用之物)이기에 아예 다 주어버릴 생각을 했었다. 그래도 이를 논의한 대신들이 아뢰었다. “경판은 비록 아낄 물건은 아니지만, 훗날 줄 수 없는 물건을 달라고 할 경우를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대장경판을 주지는 않았다.  세조는 즉위 4년(1458)에 해인사의 판당(板堂)을 증축하게 했는데, 이때의 부실한 기와 때문에 곧 비가 새고 서까래가 썩어 몇 년도 되지 않아 무너질 정도가 되었다. 바람이 들이치고 비가 새기 30년, 거의 다 무너지는 상황에 이른 성종 19년(1488) 봄, 왕은 판당의 보수를 명했다. 간관(諫官)들의 반대가 비등한 중에 사헌부 장령 봉원효 등은 아뢰었다. “대장경이 없어지더라도 신 등은 아름다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이웃 나라 사신이 와서 요구하면, 우리나라는 불교를 믿지 않으므로 경판이 다 없어졌다고 한다면 도리어 아름답지 않겠습니까?”라고. 그래도 성종은 판당의 중수를 강행했는데, 어머니 인수대비의 의지를 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종교가 다르고 이데올로기가 다른 조선초기의 국왕과 신하들, 그들에게 대장경판이란 어떤 의미도 없었고, 아무 쓸모도 없었다. 그들에게 불경이란 하잘 것 없는 것이었고, 몽고병의 격퇴를 간절히 원하던 고려 군신(君臣)의 발원은 잊은 지 오래였다. 피땀으로 이룬 조상의 문화유산도 이미 그들의 안중에는 없었다. 그러기에 그들은 대장경판을 ‘무용지물(無用之物)’로 생각했고, ‘경판이 썩어 없어지는 것이 더 좋은 일’이라고 목청을 높일 수 있었다. ‘아낄 물건은 아니라’도 일본인들을 달래고 유인하기 위해서 경판을 남겨두자는 유자들의 논의는 차라리 민망하고 안쓰러울 정도다. 그래도 고려대장경판은 억불의 시대를 견디고 살아남았다. 확고한 신념으로 대장경판을 구하고 “불꽃 속에 핀 연꽃”이라는 찬사를 받았던 인수대비 같은 이의 음덕이 있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이달 14일에 고려대장경판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포함시키기로 결정했다는 남아공의 프레토리아에서 온 소식은 반갑다. 물론 해인사 장경판전(藏經版殿)은 1995년에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바 있지만, 이제 경판이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됨으로서 고려대장경은 세계인의 보호를 받게 되었다. 그리고 고려대장경판이 기록문화와 인쇄문화의 금자탑임을 재확인하고 이를 전 세계에 자랑할 수 있게 된 것도 기쁜 일이다.  기록과 인쇄는 문화 발전의 중요한 척도다. 목판인쇄와 금속활자가 한국에서 세계 최초로 사용되었다는 것은 세계문화사에서 차지하는 한국문화의 높은 위상을 확인시켜주는 것이고, 이 사실을 정확하게 입증해 주는 것이 고려대장경이다.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된 고려대장경판, 그 경판을 소중히 간직해온 해인사의 영광은 크다. 세계의 여러 기록 유산 중에서도 고려대장경판의 기록은 더욱 소중하다. 정법(正法)이 사마(邪魔)를 반드시 이긴다는 역사적인 증거이자 중생의 무명(無明)을 밝히는 법문의 집대성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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