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⑪ 원경왕후

기자명 법보신문

태종 이방원의 正妃…막내 죽은 뒤 불교 귀의

대학자 민제의 딸…왕위 계승에 탁월한 정치력 발휘
외척 배척에 친정 몰락…아들 묘소 옆에 대자암 지어

불교에서는 인생을 고(苦)로 표현한다. 미운 사람을 만나야 하니 괴롭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하지 못해서 더욱 괴롭다. 그래서 『법구경』에 사랑하지도 미워하지도 말라고 한다.

고통은 인간에게 독이 되기도 하지만 때로는 파멸 직전에 놓인 인생을 되돌리는 전기충격기의 역할을 하기도 한다. 고통을 인식하는 것 자체가 인생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대전제, 즉 일대사 해결을 위한 위대한 문제제기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누구든 2500여 년 전 부처님이 설한 일체개고(一切皆苦)의 진리를 받아들이는 순간 그의 마음속에는 고통의 응어리가 풀리고 상처가 치유되기 시작한다. 인생이 벼랑 끝으로 치닫는 지점에서 많은 이들이 종교에 귀의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왕실의 불교신앙은 대체로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친정어머니나 시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믿음과 정성을 이어간 경우고 다른 하나는 인생의 쓴맛 단맛을 다본 다음 더 이상 매달릴 곳이 없어지는 순간 불교에 귀의하는 경우다.

조선 태종의 비 원경왕후는 후자에 해당되는 인물이다. 원경왕후 민씨는 고려 최고의 문벌집안 중 하나인 여흥 민씨 가문 출신으로, 고려말 예의판서·한성부윤을 역임한 민제의 둘째딸이다. 그녀는 이성계의 자식들 중에서도 가장 똑똑한 아들로 꼽히던 이방원과 결혼했다. 이방원이 함흥에서 상경해 성균관에 입학할 당시 성균관의 사성이 민제였다. 자신의 제자를 사위로 삼을 정도로 이방원은 민제의 마음에 쏙 든,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이였다. 함흥 출신의 시골 청년과 개경의 귀족집안 딸, 게다가 집안으로 치자면 여흥 민씨 집안과 전주 이씨 집안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격차가 났지만 이성계는 이미 고려의 군사권을 장악한 최고 권력이었고, 이방원 또한 전도유망한 청년이었다. 이성계를 고려 귀족사회로 편입시키고자 동분서주해온 이성계의 부인 강씨(후일 신덕왕후)에게도 민제의 딸은 상당히 흡족한 혼처였다.

두 집안의 결합은 조선왕조의 개창을 연 탄탄대로의 서막이었다. 이성계가 조선왕조를 개창하는데 공헌을 한 일등공신이 이방원과 신덕왕후였다면, 이방원을 조선의 세 번째 국왕으로 끌어올린 일등공신은 원경왕후와 그녀의 친정이었다.

태조가 왕위에 오른 직후부터 신덕왕후 강씨는 이방원에게 쏟던 모정을 거두어 들였다. 자신이 낳은 아들 방석을 왕위에 올리기 위해 신덕왕후는 이방원을 숙청하기 위한 작업에 몰두했다. 이방원을 공신명단에서 누락시켰고, 사병을 몰수함으로써 이방원의 권력을 한꺼번에 빼앗으려고 했다.

하지만 태조에게 신덕왕후가 있었다면 이방원의 배후에는 원경왕후가 도사리고 있었다. 남편이 사병을 몰수당했을 때 원경왕후와 그녀의 동생들은 비밀리에 군사와 무기를 비축했다.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킬 당시 장롱 속에 깊숙이 감추어둔 갑옷을 꺼내 이방원에게 직접 입힌 이가 바로 원경왕후였다. 거사에 동원된 자금이나 인물들이 이방원보다는 주로 왕후의 친정 쪽에서 나왔고, 왕비의 남동생 민무질은 정도전 쪽의 기밀을 빼내 제1차 왕자의 난을 성공시키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처럼 부인의 내조에 힘입어 이방원은 결국 조선 3대왕 태종으로 등극했다.

남편이 왕위에 오르면서 자연히 왕후가 되고, 게다가 양녕, 효령, 충령, 성녕이라는 똑똑한 네 아들까지 두었으니 원경왕후는 세상에 더 이상 부러울 것도, 겁날 것도 없는 명실상부한 조선의 안주인이 되었다.

그러나 왕후라는 극점에 도달하자마자 그녀의 인생은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지게 된다. 태종이 즉위한 직후부터 원경왕후와 태종의 사이가 급격히 멀어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바로 이방원의 또 다른 여자들을 원경왕후가 용납하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동안 이방원에게는 부인의 친정 배경이 필요했지만 왕위에 오른 이상 더 이상 마누라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어졌다는 말이 더 맞을 것 같다. 자신을 비호해주던 왕비의 친정 집안은 오히려 이방원을 억누르는 커다란 짐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태종은 왕위에 오른 후 왕실의 기반을 탄탄하게 한다는 이유로 후실들을 들이기 시작했다. 태종과 원경왕후 사이를 멀게 한 첫 번째 사건은 태종이 왕위에 오르기 직전 원경왕후의 몸종 아이를 마음에 들어 하면서부터였다.

자신이 거느리는 몸종 따위에게 남편이 눈독을 들이고, 자기 몰래 불러들인다는 사실을 안 순간 원경왕후의 눈에서는 불길이 쏟아졌다. 결국 원경왕후는 이방원의 아이까지 밴 김씨 아이를 집에서 내쫓고 얼음장 같은 방에 가두어 두었다. 결국 그 몸종은 겨울날 불기 하나 없는 행랑채에서 아이를 낳고 제대로 산후조리조차 못해 병이 났다. 하지만 태종은 왕위에 오른 후 그 몸종을 궐로 불러들여 효빈이라는 첩을 내려 후궁으로 삼고 연달아 사대부 집안의 딸들을 후궁으로 들였다. 일련의 과정에서 원경왕후는 밥도 먹지 않고 대성통곡을 하며 울었다.

“상감께서는 어찌하여 예전의 뜻을 잊으셨단 말입니까. 저와 상감이 고생 고생해 왕업을 이었는데, 이제 저를 잊었단 말입니까?”

허나 이방원의 반응은 냉랭하기만 했다.

“내가 악역을 맡아야 왕조가 바로 선다”는 것이 이방원이 품고 있는 생각이었다. 이방원은 왕위에 오른 직후부터 조선왕조를 뒤흔들 만한 소지가 있는 외척이나 훈신들을 무자비하게 제거했다. 왕비의 집안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었다. 왕비의 분노를 불러일으킨 후궁들은 이방원에게 있어서 오히려 외척의 힘을 빼놓기 위한 미끼였는지도 모른다.

이방원은 왕비의 투기를 빌미로 그녀의 남동생 민무구와 민무질의 숙청작업을 차근차근 준비했다. 태종의 뜻을 알아차린 조정의 대신들은 상소를 올려 민무구와 민무질을 공격했고, 결국 민무구와 민무질은 불충 죄인으로 몰려 유배에 처해졌다. 이 과정에서 왕비의 아버지 민제가 근심과 한탄 속에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이를 가만히 지켜보고 있을 원경왕후가 아니었다. 남편의 배신에 치를 떨던 원경왕후는 친정 식구들과 은밀히 쿠데타를 준비했다. 자신의 남편을 제거하고 왕세자 양녕대군을 왕위에 올리려 했으나 태종에게 사전에 발각되고 말았다. 결국 이 사건을 계기로 민무구와 민무질에게는 자진을 하라는 명이 내려졌다.

태종의 보복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이미 외척 숙청을 시작한 이상 흉한 불씨를 남겨둬서는 안된다고 생각한 그는 나머지 왕비의 동생들마저 제거하겠다고 결심했다. 자신이 죽은 뒤 새 임금의 외삼촌의 자격으로 중앙무대에 나설 수 있는 왕비의 동생들까지 모두 제거해야 자신의 아들, 손자가 마음 놓고 태평성대를 이룩할 수 있다는 것이 태종의 계산이었다.

무구와 무질이 죽은 지 5년 뒤 태종은 13년 전 왕비 민씨가 효빈 김씨와 자신의 아들을 죽이려 했던 일을 다시 들먹였다. 태종은 왕비와 민무휼, 민무회를 왕의 아들을 죽이려 한 불충하고 잔인한 사람이라고 비난했다. 결국 왕비의 남은 동생 무휼과 무회 또한 역모로 몰려 죽었다. 고려에 이어 조선에서도 명문귀족 중의 귀족이었던 여흥 민씨 가문은 이렇게 풍비박산 났다.

여기에 한술 더 떠 태종은 왕후를 폐비시키고 그녀를 왕궁에서 내쫓겠다는 의사를 밝힌다. 하지만 조정의 대신들이 왕세자의 어머니, 대군들의 친모라는 이유를 들어 폐서인만은 시키지 말아야 한다고 거듭 만류했다. 원경왕후는 더 이상 분노할 힘조차 남지 않았다. 궁궐의 공식행사에 얼굴을 가끔 내밀 뿐 태종과는 얼굴도 맞대려 하지 않았다. 또한 그에게 어떤 간섭도 하려 들지도 않았다.

그런데 태종 18년 왕후를 인생의 벼랑 끝으로 몰아낸 결정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남은 것이라곤 배신감과 분노밖에 없을 것 같던 그녀를 지옥의 끄트머리로 몰아간 사건은 바로 막내아들 성녕대군의 죽음이었다.

왕비가 41세의 나이에 낳은 늦둥이 아들은 왕비가 외롭고 비참한 궁중생활을 견딜 수 있는 유일한 즐거움이었다. 성녕대군은 비록 어머니와 아버지의 불화 속에서 성장했지만 태종과 원경왕후의 사랑을 독차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경복궁 내에서 왕과 왕후 사이를 이어주는 유일한 연결고리이기도 했다. 궁중에서 일이 생기면 둘 사이를 오가며 통신망 역할을 했던 것도 성녕대군이었다.

그런 아들이 열 네 살의 나이로 죽은 것이다. 세상에서 자식을 잃은 어머니보다 더 비참하고 슬픈 이가 있을까. 태종은 그제야 왕후에게 애처로운 마음이 들었는지 원경왕후와 함께 아들의 무덤 곁에 절을 지었다. 그곳이 바로 고양의 대자암이다.

성녕대군의 죽음을 계기로 왕비는 비로소 불교에 귀의했다. 태종이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자 왕비 또한 궁궐을 나와 아들의 묘소 곁으로 갔다. 그녀는 아들의 묘소 옆에 지어진 절을 찾아 불공을 드리면서 여생을 보냈다.

불교에 귀의한 이후의 원경왕후의 생애는 그다지 알려진 바가 없다. 남편과 화해를 했는지, 그리고 남편의 무자비한 선택을 이해하고 그를 용서했는지도 현재로서는 알 바가 없다.

하지만 자신의 아들 세종이 편안하게 나라를 다스리고 ‘성군’이라는 칭송을 듣는 모습을 보며 적어도 절반쯤은 남편을 용서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골수 유학자 집안에서 성장한 원경왕후 민씨는 아버지와 동생들을 비참하게 보내고 그토록 아끼던 막내아들마저 가슴에 묻은 후에야 부처님의 품안에 안겨 회한의 삶을 마쳤다.

고통을 딛고 일어서는 순간 그녀를 끌어안은 마지막 품이 불교였고, 그때서야 그녀는 배신과 복수로 점철된 윤회의 수레바퀴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탁효정 기자 takhj@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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