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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 ④

기자명 법보신문

중생심이 일체의 세간·출세간법 통섭

기신론의 다섯 가지 큰 구성에서 두 번째 입의분은 기신론의 대의를 천명한 것으로 일심(一心), 이문(二門), 삼대(三大)를 제시한다. 기신론은 일심을 중생심이라 한다. 이 중생심이 일체의 세간법(세간의 생사법)과 출세간법(열반의 법)을 통섭하는데 이는 이 중생심의 진여상이 대승의 체를 나타내며 중생심의 생멸인연상이 대승자체의 상(相)·용(用)을 나타낸다는 뜻이기도 하다.

여기서 중생심이 일체의 세간법과 출세간법을 통섭한다고 한 것은 대승법이 소승법과 다름을 나타내는 것이다. 왜냐하면 소승법에서는 일체의 모든 법이 각각 자체가 따로 있지만 대승법에서는 모든 법의 자체가 오직 일심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원효는 별기에서 기신론이 진여법과 세속법이 그 체가 다르다는 치우친 고집을 꺾기 위해 출현한 것이라는 말을 하기도 한다.

그런데 일심이 일체의 세간법과 출세간법을 통섭한다는 것은 한편으로 열반법을 나타내는 진여문과 생사법을 나타내는 생멸문이 서로 여의지 않는 불상리성(不相離性)을 뜻하는 것이다. 원효는 별기에서 이 이문의 관계를 미진(微塵)과 와기(瓦器)의 관계로 설명한다. 즉 미진이 모든 와기들의 통상(通相)이어서 통상 외에 따로 와기가 없으며 따라서 와기들은 모두 미진에 포섭되는 것처럼 진여문은 염정(染淨)의 모든 법에 통상이 되므로 통상 이외에 따로 염정 제법(諸法)이 없으며 염정 제법은 모두 통상에 포섭된다는 것이다.
 
또 미진의 성질이 모여 와기들을 이루지만 항상 미진의 성질을 잃지 않는 까닭에 와기문(瓦器門)이 곧 미진을 포섭하는 것처럼 생멸문이란 선·불선의 인(因)인 진여가 연(緣)과 화합하여 염정 제법을 변작하는 것으로 비록 제법을 변작하고 있지만 항상 진성을 잃지 않기 때문에 이 생멸문에서도 역시 진여를 포섭하고 있다고 한다.

이와 같이 진여·생멸 이문이 서로 융통하여 한계가 구분되지 않기 때문에 다 각각 일체의 염정 제법을 통섭하는 것이며 따라서 이문은 서로 떠날 수 없는 밀접한 관계를 가지는 것이다.

삼대란 체대(體大)·상대(相大)·용대(用大)를 말한다. 앞서 중생심의 진여의 모습은 대승의 체를 나타내고 그 생멸(인연)의 모습은 대승 자체의 상·용을 나타낸다고 했는데 즉 체대는 진여문에, 상대·용대는 생멸문에 배속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첫째 체대는 평등법계의 진여본성자리로서 일체의 상을 여읜 것이며 범부에서 부처에 이르기까지 증감이 없어서 끝내 변하지 않고 머문다. 둘째 상대란 그 진여본성이 갖추고 있는 공덕상(功德相)을 말한다. 기신론에서는 진여 자체에 대지혜광명, 법계를 두루 비침(照法界), 진실하게 앎(眞實識知), 자성청정심, 상락아정(常樂我淨), 청량(淸凉)하고 불변(不變)하고 자재(自在)함의 뜻을 갖추고 있다고 한다.

심성에 망념이 일어나지 않는 것은 ①대지혜광명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②만약 마음에 어떤 망견을 일으킨다면 보지 못하는 상이 있는 것이며 심성에 망견을 여의면 바로 법계를 두루 비추는 것이다. ③만약 마음에 움직임이 있으면 참으로 아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④청정한 자성이 없게 되며 ⑤상(常)도 아니고 락(樂)도 아니고 아(我)도 아니고 정(淨)도 아니다. ⑥이리하여 열뇌(熱惱)하고 쇠변(衰變)하면 자재하지 못하며 이에 간지스 강의 모래들보다 많은 망염(妄染)을 갖게 된다.

그러니 심성의 움직임이 없으면 간지스 강의 모래들보다 많은 온갖 깨끗한 공덕상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셋째 용대란 모든 부처와 여래가 본래 인지(因地)에서 대자비를 일으켜 모든 바라밀을 닦아서 중생을 섭화(攝化)하며 크나큰 서원을 세워 모든 중생계를 모두 도탈시키고자 하여 겁수를 한정하지 않고 미래에까지 다하는 것이다.

이에 모든 중생 돌보기를 자기 몸과 같이 하며 그러면서도 중생상을 취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모든 중생과 자기의 몸은 다 같이 진여로써 평등하여 다름이 없는 것인 줄 여실히 알기 때문이다.

이러한 대방편지(大方便智)가 있기 때문에 무명을 완전히 없애어 본래의 법신을 보게 되고(自利), 자연히 불사의업(不思議業)의 여러 가지 작용을 갖는 것이니(利他), 그러면서도 모양 지을 만한 작용도 없다. 다만 중생의 견문에 따라 이익 되게 하기 때문에 용(用)이라 말하는 것이다.
 
은정희 전 서울교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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