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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허 스님 중국 항일운동 유적지를 가다 上

기자명 법보신문

스님 육신은 자취를 감췄지만
뜨거운 애국혼, 후손에 ‘손짓’

<사진설명>독립운동가들의 중국 내 유적지를 찾아 50명의 대학생 탐방단이 8박 9일의 긴 여정을 떠났다.

“희망은 본래 있다고 할 수도 없고, 없다고 할 수도 없다. 그것은 땅 위의 길과 같다. 사실은, 원래 땅에는 길이 없었는데, 걸어 다니는 사람이 많아지자 길이 된 것이다.”(루쉰의 ‘고향’ 중)

그도 1921년 작품인 루쉰의 ‘고향’을 읽었을까. 태허 스님은 ‘희망의 길’을 열고자 중국으로 떠났다. 그가 품고, 세상에 보이고자 했던 희망은 ‘조선독립’ 하나 뿐이었다.

임시정부 산파는 3·1운동

(사)운암김성숙기념사업회(회장 민성진)가 주최하고 (주)골든프레임네트웍스가 협찬한 ‘제2기 운암 김성숙 중국 항일운동 사적지 대학생 탐방단(단장 남기형, 이하 탐방단)’이 8월 7일 중국 대륙에 첫 발을 디뎠다. 탐방은 광복절인 8월 15일까지 8박 9일간의 긴 여정. 상하이(上海)를 시작으로 난징(南京), 우한(武漢), 광저우(廣州), 충칭(重慶), 베이징(北京) 등 중국 내 정치변화와 일본의 감시를 피해 독립운동을 펼쳤던 이들이 남겨 놓은 유산은 뭘까. 탐방은 고민과 함께 시작됐다.

일제의 발아래 35년 동안 무참히 짓밟힌 조국. 한민족의 장구한 역사상 단 한번 뿐인 치욕적인 기억 속에서 중국 내 독립운동가들의 흔적을 찾는 일은 쉽지 않았다. 40도에 이르는 불볕더위가 태허 스님이 정열적인 저술활동을 펼치며 ‘아리랑’의 주인공 김산(장지락)을 도왔던 상하이(上海)를 찜통처럼 뜨겁게 달궈놓았다. 오후가 되어서야 대한민국임시정부 청사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1919년 조국 독립의 열망이 담긴 3·1운동이라는 민족 에너지를 산파로 태어난 임시정부. 일본의 감시를 피해 상하이 노만구 백래니몽 마랑로 보경리 4호에 자리한 임시정부 청사는 1990년 노만구 문물보호단위 제174호로 지정돼 원형을 보존하고 있었다. 삐걱거리는 낡은 계단. 계단은 독립에 대한 고민의 무게를 80여 년 간 온몸으로 견뎌내고 있었다.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은 1926년 3월부터 1932년 5월 항저우(杭州)로 청사를 이전할 때까지 이 계단을 오르내리며 6년 동안 조국의 앞날을 걱정했다.

특히 1940년 임시정부는 태허 스님이 독립운동 좌파 노선을 걷던 조선의용대 김원봉에게 김구 계열의 우파 노선과 통합 독립전선을 구축하도록 이론적 틀을 제시했던 역사적 사실이 숨 쉬고 있다. 탐방단은 이어 고 윤봉길 의사가 일제의 군부와 정관계 수뇌부에게 도시락 폭탄을 던진 곳으로 추정되는 노신공원(당시 홍구공원) 내 루쉰 동상 앞을 찾았다. 조국 독립이라는 끝이 보이지 않았던 길을 택한 독립운동가들의 애환을 어찌 다 말로 표현하랴. 고 윤봉길 의사가 던진 도시락에는 독립을 갈망하는 민족의 염원과 일제에 대한 응분이 담겨 있었으리라.

죽은 자들의 도시 난징

탐방 이틀째인 8월 8일 우한, 충칭과 함께 중국의 ‘3대 화로’로 불리는 난징에 들어섰다. 도시 전체를 불가마에 넣어 놓은 듯 난징의 온도는 최고온도 44도를 기록하며 탐방단의 발을 무겁게 했다. ‘죽은 사람들의 도시’라 불리는 난징. 오나라의 손권을 비롯해 탁발승으로 지내다 명나라 초대황제가 된 주원장, 중국 혁명가 쑨원(孫文)이 묻혀 있으며 1937년 12월 13일부터 38년 1월까지 일본군에 의해 무려 30여만 명의 난징 양민이 학살당한 피비린내 나는 아픈 기억까지 안고 있었다.

탐방단은 김원봉이 1932년 7월 설립한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의 훈련장소인 천녕사로 향했다.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는 1923년 태허 스님이 가입한 의열단의 간부학교로도 알려져 있다. 125명의 독립투사를 양성한 천녕사는 1930년 대 만주사변 등 급변하는 중국 정세로 변화를 꾀하던 독립운동 좌파 계열의 새로운 독립노선의 활로였다.

그러나 탐방단의 발길을 막은 것은 채석 작업이었다. 발파로 인한 안전사고의 우려로 출입이 통제된 것. 작은 암자인 천녕사에 배어있는 청년투사들의 진한 땀 냄새를 간혹 부는 바람에 의지할 수밖에. 아쉬운 발걸음을 뒤로 하고 임시정부 주화대표단 본부 자리로 발을 옮겼다. 주화대표단은 1945년 독립 후 중국 내 한인교포들의 생명과 재산, 귀국문제를 중국과 협의하는 기구이자 최초의 주중한국대사관이었다. 그러나 난징대학살 기념관은 정문과 기념관 보수 공사로 끝내 탐방단의 발길을 거부했다.

6인 1실의 침대칸이 마련된 야간열차에서 12시간을 보내고 8월 9일 우한에 도착했다. 우한은 중국의 신해혁명(辛亥革命)에도 가담한 신규식과 태허 스님을 필두로 민족주의 좌파 계열이 의기투합하고 조선의용대가 창설된 곳이다. 탐방단은 1927년 한국청년 200명이 교육을 받았던 무한중앙군사정치학교 부지를 거쳐 조선민족전선연맹 본부 자리를 찾았다. 일본이 1937년 일본이 중일전쟁을 일으키자 그해 8월 김구는 우파를 묶어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를 결성한다. 이에 좌파 역시 태허 스님이 이끄는 조선민족해방동맹과 김원봉의 조선민족혁명당, 유자명의 조선혁명자연맹 3곳이 11월 난징에서 조선민족전선연맹(이하 민족전선)을 조직하기에 이른다. 민족전선은 일본군에 의해 난징이 함락되기 직전 이곳 우한으로 이동해 대화가 15호 동명면옥에 정착한다. 현재는 옆 건물 사우나의 차고로 쓰이는 이곳에서 태허 스님은 ‘조선민족전선’이라는 기관지를 등불로 밤을 밝혀가며 발행했었다. 그러나 오물로 인한 악취는 태허 스님의 자취가 남은 이곳에 쓸쓸함만 더했다. 몇몇 대학생들은 태허 스님에게 합장 반배의 예를 올린 후 착잡한 심정으로 발을 뗐다.

운암 독립사상과 사랑 만나

<사진설명>장개석의 국민당 군사에 희생된 한인대학생 200여명을 추모하고자 세워진 중조인민혈의정. 그 앞에 못다핀 무궁화가 처연하다.

탐방 4일 째인 8월 10일. 중국 1차 국공합작의 중심지 광저우에는 태풍의 영향으로 아침부터 빗물이 흩날리고 있었다. 사진과 사료에만 남은 독립운동가들의 흔적들이 외로웠던 탓일까. 빗물은 가냘프게 내렸다.

1924년 6월 장개석을 교장으로 광저우 장주도 황포에 설립됐던 황포군관학교는 의열단 간부와 한인청년들 73명의 군사훈련 장소였다. 실제 황포군관학교 안내책자에는 이곳에서 교관 생활을 했던 양령의 사진과 기록이 남아있어 전시관을 뒤졌지만 끝내 찾지 못했다.

잊혀져가는 흔적들을 위로했던 빗줄기를 뒤로 하고 1926년 태허 스님이 재학했던 중산대학(당시 광동대학)으로 발길을 재촉했다. 중산대학은 1924년 1월 중국 국민당과 공산당의 합작과 함께 국민혁명에 필요한 인재를 양성하기 위한 대학으로 태허 스님이 정치학을 공부하며 정신적으로 독립운동의 사상을 재무장했던 곳으로 유명하다. 그는 이곳에서 첫 여자 입학생이던 두군혜 여사를 만나 사랑을 나누고, 독립운동을 전개했었다. 학생 신분임에도 300여 명의 한인청년들을 규합하고 유학한국혁명청년회를 결성해 기관지 ‘혁명운동’을 간행하는 등 피압박민족의 해방을 주창했다. 그는 장개석이 국공합작을 깨는 ‘반공쿠데타’를 일으켜 공산당을 탄압하는 등 급박한 상황에서 두군혜 여사와 중산대학에서 한인 학생들에게 중국인 옷을 입혀 탈출을 시켰으며 광저우에서 민국일보 기자와 중산대학 초빙교수직을 역임하기도 했다. 기념사업회와 중산대학이 오는 2010년 7층 규모의 ‘중산대학성숙군혜기념관’을 세운다고 하니 고혼이 된 그와 그의 아내에게 작은 위로가 되길 바랄 뿐이다.

탐방단은 이날 중산대학에 앞서 광주기의열사능원(廣州起義列士陵園)을 찾아 1927년 장개석의 공산당 탄압에 희생된 한인대학생 200여 명의 넋을 기렸다. 민족주의 좌파 계열인 태허 스님은 당시 독립운동 노선을 공산당과 함께하며 중대규모의 공산당 제2영 제5련의 책임자로 한인대학생과 국민당과 치열하게 맞서기도 했다. 특히 탐방단은 안내책자에만 나오던 ‘중조인민혈의정(中朝人民血誼亭)’을 찾아 묵념으로 그들의 뜻을 되새겼다.

길은 생소한 것들의 만남을 예견하는 떠남이다. 탐방단은 또 다시 설레이는 마음을 안고 꾸이린(桂林)발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최호승 기자 sshoutoo@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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