⑬ 주조장 김 용 섭
⑬ 주조장 김 용 섭
  • 법보신문
  • 승인 2007.09.12 09:3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40 여정 ‘푸른 숨결’로 빚은
원만한 우리 부처님
만인에 자비 전해주시기를

18세 김만술 선생 문하 입문 후 조각에 눈 떠
원만 상호-조형미 위해 과학 접목 시도 결실

그리움으로 여기 섰노라/ 호수와 같은 그리움으로,
이 싸늘한 돌과 돌 사이 / 얼크러지는 칡넝쿨 밑에 / 푸른 숨결은 내 것이로다.
세월이 아주 나를 못 쓰는 티끌로서/ 허공에, 허공에, 돌리기까지는 / 부풀어오르는 가슴속에 파도와 / 이 사랑은 내 것이로다. .......중간 생략......
허나 나는 여기 섰노라./ 앉아 계시는 석가의 곁에/ 허리에 쬐그만 향낭을 차고
이 싸늘한 바위 속에서/ 날이 날마다 들이쉬고 내쉬이는/ 푸른 숨결은/ 아, 아직은 내 것이로다.
(서정주 시 ‘석굴암관세음의 노래’중에서)

경주 석굴암 본존불을 보는 사람들은 저마다 탄성을 자아낸다. 그러나 그 탄성은 보는 순간 터져 나오기보다 시간을 두고 유심히 들여다보는 어느 순간 저 가슴 깊은 속에서 일렁이는 작은 감흥에서 시작된다. 그 누구든, 석굴암 부처님을 한 번 보고 지나갔다가도 이내 다시 돌아가 보고, 아쉬운 마음을 뒤로한 채 발길을 돌리지만 몇 년 안 돼 또 한 번 마주하고야 만다. 급기야, 여래가 전하는 ‘이심전심’에 눈을 뜨는 순간, 조용한 탄성과 함께 웃음을 보이며 그 앞에 정성스레 합장한다.

미당 서정주 시인도 그러했다.

시 속의 화자는 본존불 뒤에 조용히 응시하고 있는 관세음보살이다. 관세음보살이 본존불에 생명을 불어 넣고 있는 듯하지만, 좀 더 시 속으로 빠져 들어가 보면 그 관세음보살은 본존불에 의해 생명을 얻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다.

관세음보살과 석가여래의 마음이 하나가 되는 순간 서정주 시인 역시 부처님과 하나가 된다. ‘허리에 쬐그만 향낭을 차고’ 석굴암 ‘석가의 곁에’서 ‘날이 날마다 들이쉬고 내쉬이는 푸른 숨결은 내 것’이라고 말하는 이는 어느새 서정주 자신이 되고 만 것이다.
청년 김용섭도 그러했다. 10대 후반에 처음 본 석가여래.

“어떤 전율 같은 것이었는데 그게 뭔지는 잘 몰랐어요. 그저 대단한 부처님이시구나 하는 거였지요. 이후, 스승님의 허락도 받지 않고 석굴암으로 달려가 본존불을 친견하고 또 친견했지요. 정말 지금 보아도 과연 저 부처님을 사람이 빚은 것인가 하는 의문을 갖습니다. 불가사의할 뿐입니다.”

서울 롯데월드 3층 민속관에 자리한 석굴암. 경주 석굴암을 2.2/1로 축소 조성한 것인데 바로 그 석굴암을 제작한 주인공이 김용섭 장인이다. 1988년 ‘모방’이지만 그는 마음속에 그토록 담아 두었던 석가여래를 자신의 손으로 직접 빚어 보았던 것이다.

1949년 강원도 삼척 출생인 그는 현재 우리나라에서 내로라하는 불상 주조장이다. 일본에서의 명성도 이미 쌓은 지 오래다. 그가 30대 초반 제작한 불상은 거의 전량 일본으로 수출됐다.

그는 일반 불상 제작인들과는 달리 그 누구보다 인체비율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 따라서 현대과학 접목도 당차게 시도하고 있는데 그의 이러한 남다른 열정은 스승 김만술 장인으로부터 시작됐다.

밀양중학교를 졸업한 그는 수월 김만술 선생 문하로 들어가 조각에 눈을 뜬다.

수월 선생은 그 유명한 김복진 선생의 직속 제자다. 김복진 선생은 20세기 전반기의 뛰어난 미술비평가로서 당대 모든 미술학도의 스승으로 불렸던 인물이다. 우리나라 근대 조각가로서 최초로 서양 조각을 한국화단에 도입해 우리나라 미술계에 한 획을 그었지만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KAPE)에 가담한 이유로 투옥되었다. 출옥 후 그는 여생 동안 불상 조각과 초상 조각 제작에 전념했다.

청년 김용섭도 김만술 선생으로부터 김복진 선생의 가르침을 간접적으로 이어 받았다.

“수월 스승님도 항상 말씀하셨습니다. 주먹구구식 데생을 바탕으로 한 조각은 맞지 않다. 비록 서양 기법이라 해도 우리 조각에 투영해 제대로 된 인물상을 만들어야 한다고 하셨지요.”

사실 서양의 데생이라 하면 ‘채색을 하지 않고 선으로 그리는 표현’법으로써 동양묘법 가운데 선으로 윤곽을 나타내는 ‘구륵법’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동양에서는 먹의 농담으로 명암까지 나타내는 ‘몰골법’도 있는데 이러한 선묘법은 모두 소묘에 속하기에 언뜻 보아서는 서양의 데생이 그리 중요한 것인가 하는 반문이 들 수도 있다.

그러나 동양 데생에 비해 서양 데생은 인상 파악과 그에 따른 운동감과 명암 등이 좀 더 사실적이며 분석적인 것이 특징. 현대에 들어서는 동서양의 데생이 좀 더 깊이 연구되고 있기에 각기의 특징을 살려내는 데 부족함이 없지만 청년 김용섭이 조각을 배울 때는 사정은 지금과 많이 다르다.

“조선시대의 불상을 보면 역작도 있지만 어딘가 부족하고 어설픈 감이 있는 부처님이 많아요. 불상조성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이 많지 않아 스님들이 손수 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일 겁니다. 물론 그 연유는 조선시대의 ‘배불정책’에 있겠지요. 강경한 정책에 따라 불상 조성도 멀리하는 폐단도 이어졌을 겁니다.”

그래서일까! 그는 수월 스승 문하서 공부할 때부터 데생을 즐겨 했기에 소묘는 물론 조각에도 조예가 깊은 인물이다. 따라서 그는 불상을 제작하려 하면 기본 데생에서부터 조각, 그리고 청동불 제작과 개금까지도 손수 해낸다. 수은도금에도 조예가 깊다. 불상 전 과정을 아우르는 우리나라 몇 안 되는 장인이라 할 수 있다.

대한민국 불교미술 전람회 제4회(관음입상), 6회(비천상) 특선 입상 경력이 있는 그는 서산고란사 삼존불 형태 조성을 비롯해 동화사 석조 약사대불 원형 조성, 천태종 삼광사 구층 오십삼불석탑 원형, 천태종 삼운사 석가여래 등 수 많은 불상을 조성해 오고 있다.

전통주조 공법인 밀랍주조와 사형주조공법을 모두 이용하는 그는 시중에 나와 있는 청동궤를 사용하지 않는다. 원석에서 전기분해를 통해 직접 얻은 전기동에 주석, 합금처리를 함으로써 ‘성스러운 불상’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

<사진설명>석가모니 삼존불.

“일반 초상 작품이라면 그리 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불상은 성보입니다. 저 만의 ‘작품’ 이 아닌, 사부대중이 친견하며 기도하고, 절을 올리는 ‘부처님’입니다.”

그가 할 수 있는 역량 내에서 만큼은 가장 깨끗하고도 맑은 부처님을 조성하고자 하는 원력이 담겨 있다. 그의 이러한 심성은 조성 전부터 이뤄진다. 그는 지금도 부처님을 조성하기 전에는 제자들과 함께 반드시 예를 올리며 서원한다.

“삼라만상에 제 마음을 담아 정성스럽게 부처님을 조성하고자 하옵니다. 부디, 성스럽게 나투시어 만인에게 자비와 지혜를 전해주시기를 바라옵니다.”

비록, 자연에서 얻은 물질로 부처님을 조성하지만 마음을 담아 생명을 불어넣어 보겠다는 김용섭 장인의 대원력이 담겨 있는 것이다.

<사진설명>대구 최정사 6층53불 청동탑.

일본을 비롯한 국내외에 이미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부처님을 조성해 온 그 이지만 그는 아직도 불상 연구에 여념이 없다. 동국대학교 불교대학원 사학과 예술사를 2년간 수료(1992년)한 것도 이 때문이다. 좀 더 완벽한, 그러니까 좀 더 원만한 부처님, 석굴암 부처님과 같은 부처님을 조성해 보고자 하는 바람에 따라 그의 연구는 인체비례를 비롯한 조형미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는 이를 위해 동서양의 미술 기법은 물론 현대 과학 접목도 서슴지 않는다. 그의 이러한 노력은 이제 하나씩 하나씩 결실로 맺어지고 있다.

일반적으로 작은 불상은 멋지게 제작할 수 있지만 그 크기가 클수록 조형미와 상호감은 떨어지는 게 다반사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한계를 넘어서고 있다. 3m의 작은 원형(기본 조각)을 3배 5배, 심지어 10배 이상 확대해도 원형이 갖고 있는 사실감과 조형미를 살리는 ‘비법’을 터득한 것이다.

높이 20m에 가까운 제작소를 보유하고 있는 그는 이미 그 곳에서 16m가 넘는 대형 불상을 제작 중이다. 이에 따른 대형 주물공장도 확장하고 있다. 그의 말대로라면 108m 이상의 대형 입좌상도 아름다고 성스럽게 조성해 낼 수 있을 듯하다.

그가 아끼는 ‘제일 제자’는 그의 동생 김문섭 씨일 것이다. 사실 그의 동생은 제자라기보다 도반에 가깝다. 지난 30여년동안 동고동락 하며 불상 주조의 길을 걸어왔다. 김용섭 장인의 가계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의 장남인 김신호 씨도 본격적인 제자 수업에 들어간다고 한다. 이미 많은 제자들을 배출 해 낸 그이지만 후학에 대한 아쉬움도 있다.

“원력을 갖고 배우러 이곳에 오지만 1,2년 아니 몇 개월도 안 돼 떠나는 젊은이가 많아요. 나름대로 사정과 이유가 있겠지만 이 일은 신심이 있어야만 합니다. 원력을 갖지 않고는 고난한 이 일을 배우기도 어렵지만 지속할 수도 없지요. 안타까울 뿐입니다.”

경기도 가평 청평면에 자리한 그의 작업실(031-584-0346)에서 그는 동생을 비롯한 제자들과 함께 오늘도 부처님 조성에 매진하고 있다. 그의 법명은 도명(道明). ‘법을 밝혀 만인의 등대’가 되고자 하는 그의 원력은 불상에 그대로 배어져 있다. 석굴암 석가여래가 만인에게 법을 전하듯 그의 부처님도 자비와 지혜를 전하는 부처님이 되기를 원하고 또 원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40년 여정 속에 단 한 번도 석굴암 부처님을 잊은 적이 없다. 지금도 세파의 상념을 날려버리고 싶거나, 가슴을 열어 ‘푸른 숨결’을 들이 내쉬고 싶을 때는 그 석가여래를 떠올리고 있다.
 
채한기 기자 penshoot@beopbo.com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