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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부로 신하 등용하면 왕권 약해져”

기자명 법보신문
  • 교학
  • 입력 2007.10.01 2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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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현 교수 「원효와 경흥의 국왕론」 발표

옛 고승들은 국정책임자들을 어떻게 대했을까.

대통령이 법회에 참석한다는 소식이 들리면 홍보가 전무해도 수백명의 스님이 호텔을 가득 채우고, 이교도인 대통령 후보의 후원모임을 앞장서서 마련하고, 대통령을 수행하는 이에게 줄을 대서 대형불사를 일으키는 우리시대 불교의 모습을 보면서 무엇이라 평가했을지 의문이다.

대선을 앞두고 일부 정치승들과 권력층간의 결탁관계에 대한 비판이 쏟아지고 있는 가운데 동국대 김상현〈사진〉 교수가 신라시대 국왕과 정치, 불교의 관계를 조망한 논문을 발표해 주목되고 있다.

김 교수는 동국대 신라문화연구소에서 발간한 『신라문화』 제30집에 「7세기 후반 신라불교의 정법치국론(正法治國論)-원효와 경흥의 국왕론을 중심으로」를 발표했다.

김 교수는 “7세기 후반 신라 중대왕실의 국왕들은 독실한 불교신자였고 원효나 경흥 같은 당대의 고승을 초청해 설법을 듣거나 정치적 자문을 구했다”며 “이들은 치국(治國)에 대해 분명하게 인식하면서 왕이 지켜야 할 도리를 제시했다”고 주장했다.

불교가 국가 이데올로기로 기능했던 7세기 후반 신라 중대사회에서는 국왕의 통치이념을 불교에서 찾았고, 이를 담당한 이들은 당대의 고승 원효와 경흥이었다. 신라의 왕들이 고승들의 경연을 통해 국왕의 바람직한 자세를 배웠다는 기록이 등장하지만 사료의 부족으로 인해 신라 중대의 불교정치사상을 구체적으로 검토한 연구는 거의 없었다.

김 교수는 원효와 경흥이 『금광명경』, 『왕법정리론』, 『출애왕경』, 『살차니전자경』 등의 경전을 주로 인용했다는 사실에 주목, 여기에 등장하는 불교정치사상을 검토했다. 또 원효와 경흥이 남긴 주석서에 등장하는 정치사상을 고찰했다.

김 교수에 따르면 원효와 경흥이 강조한 국왕의 첫 번째 덕목은 ‘대자재(大自在)’였다. ‘왕이 모든 명령을 내려 선포했을 때 거리낌이 없는 것’은 『왕법정리론』에서 국왕의 아홉가지 공덕 중 첫 번째로 꼽히는 덕목이기도 하다.

김 교수는 왕법정리론에 나오는 “왕이 만약 과실을 범한다면 큰 창고가 있고, 많은 보좌관이 있으며, 수많은 군사가 있다고 하더라도 존경하며 따르지 않을 것”이라고 한 대목에 주목했다.

김 교수는 “원효와 경흥이 국왕의 9종 과실에 대해 주목했고, 이에 근거해 국왕의 악을 경계했다”고 설명했다.

왕법정리론에 소개된 왕의 9가지 과실은 △자재로움을 얻지 못한 것 △성품이 포악한 것△사납고 날카로워 화를 잘 내는 것 △은혜가 지나치거나 또는 얇은 것 △하는 일에 대해서 생각도 하지 않고 법칙에 순종하지도 않는 것 △착한 법을 돌아보지도 않는 것 △차별을 알지 못함으로써 은혜 베풀 것을 잊어버리는 것 △한결같이 하고 싶은 대로 하여 오로지 방탕하고 안일함을 일삼는 것이다.

왕법정리론은 또 왕권이 약해지는(衰損門) 첫번째 요인으로 ‘잘 관찰하지 않고 여러 신하를 섭수하는 것’을 꼽고 있다.

또 당시의 스님들은 국가의 주요사업에 대해서도 상당부분 조언했던 것으로 보인다. 문무왕이 도성을 새롭게 축성한다는 소식을 듣자 의상대사가 국왕에게 글을 올려 간한 기록이 『삼국유사』 권2 ‘문무왕법민조’에 등장한다.

“왕의 정교(政敎)가 밝으면 비록 풀밭에 선을 그어서 성이라고 하여도 백성이 감히 넘지 못하고, 재앙을 씻어 복이 될 것이며, 정교가 밝지 못하면 비록 장성(長城)이 있다 하더라도 재앙이 없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이 글을 받은 직후 문무왕이 축성공사를 중지했다.

김상현 교수는 “문무왕이 의상의 편지 한 장으로 대공사를 중단했다는 사실은 그 내용이 직접적으로 불교교리와 연결되는 것은 아닐지라도 당시 스님들이 현실정치와 불교를 연결시키는 높은 정치철학을 제공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신라 중대의 불교와 고려 후기의 불교는 정치권력과 결탁했다는 공통점을 안고 있으면서도 그에 대한 역사적인 평가는 극과 극을 달린다. 신라 중대 불교는 삼국통일의 정신적 틀을 제시했다고 평가받는 반면 고려불교는 권력에 의지한 채 타락하고 부패해 스스로 자멸을 초래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당시의 스님들이 정치권력과 사회문제에 대해 어떤 자세를 취하고 어떤 철학을 제시했느냐에 불교의 명운이 달려있었다는 점은 지금의 불교계에 커다란 시사점을 던진다.
 
탁효정 기자 takhj@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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