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2000만 태극 물결로 비폭력 운동 견인

기자명 법보신문
  • 교학
  • 입력 2007.10.01 20:48
  • 댓글 0

탄생성지 죽림정사 성역화 회향
겨레의 보살 용성 조사
中 3·1 운동과 독립운동

“용성 큰스님께서 계속 보내주신 독립운동 자금으로 나라의 광복을 맞이하는 데 크게 이바지 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매헌 윤봉길 의사를 보내 주시어 만대 귀국 충절 순국의 사표가 되도록 하여 주셨나이다.”

때는 1945년 12월 12일, 일제 강점기에 맞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이끌었던 백범 김구 선생이 3·1 독립만세의 진원지였던 종로 대각사를 방문해 용성 조사의 영정 앞에서 흐느끼며 인사를 올렸다. 풍전등화와도 같았던 민족을 구하였기에 ‘겨레의 육신보살’이라 추앙하며 대한민국 임시 정부 요인들이 함께해 머리를 숙이며 눈시울을 적시었다. 3000리 금수강산을 터전삼아 살다가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2000만 겨레를 구하는데 일생을 바쳤기에, ‘겨레의 육신보살’이란 호칭이 임시 정부 요인들 사이에서 자연스레 흘러 나왔을 것이다.

3·1 운동은 한 두 사람의 선각자에 의해서가 아닌 민족 전체가 분연히 일어난, 세계적으로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무저항 비폭력 운동이다. 이 운동의 시작에서부터 회향에 이르는 과정에는 바로 용성 스님의 치밀하고도 드높은 덕화와 함께 민족을 향한 끝없는 애족의 마음이 배어 있다.

“큰스님은 3·1 운동을 위해 모임 민족 대표들이 독립선언 중 밖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각 대표들의 두루마기와 모자, 신발을 모두 받아 따로 보관토록 지시했지요. 민족 대표들 모두가 일제에 의해 강제 연행되도록 해 궁극에는 3·1 운동이 무저항 비폭력 운동이라는 점과 함께 일제의 총칼 앞에서도 의연한 기개를 잃지 않은 우리 민족의 모습을 만방에 알리기 위한 조치였습니다.”

스님의 수법제자인 동헌 완규 스님은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용성 스님의 가르침대로 3·1 운동은 민족의 공성이 되어 들불처럼 번졌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일체 중생이 조복하듯 3·1 운동 이후 3개월간 이어졌다. 이 기간 동안 집회 횟수는 1542회에 달했으며 동참자만도 202만 3089명으로 집계됐다. 사망자 7509명에 부상자 1만 5961명, 구속된 동포만도 4만 6948명에 이르렀으니 세계를 대표할만한 무저항 비폭력 운동이리라.

불교와 천도교, 기독교 등 종교계가 하나 돼 2000만 겨레를 응집하게 한 3·1 운동의 상징인 태극기 역시 온 겨레가 생사고해를 건너 열반에 이르기를 발원하는 용성 스님의 깊은 지혜를 담아 제작됐다. 3·1 운동을 함께 준비했던 만해 한용운 스님이 “대다수 민족 대표들이 만세운동 때 조선 반도기를 깃발로 제작해 사용하자는 데 뜻을 함께하고 있다”고 하자, 용성 스님은 미리 준비해 둔 태극기에 대한 설명문을 내보이며 태극기에 대한 정의를 내렸다.

“일체 존재는 체(體)와 상(相), 용(用)의 삼대원리(三大原理)에 의해 연관되어 있지 않은가. 그러기에 만세운동을 통해 태극기 물결을 일으키자는 것일세. 열반의 경지인 무극(無極)이 체가 되고 태극(太極)이 상(相)이 되며 음양(陰陽)이 용(用)이 아니겠는가. 천도교의 한울도, 기독교의 천국도 태극기이며, 불교 최고의 이상인 열반의 다른 이름이 바로 무극(無極)인 것이다.”

3·1 운동은 일제의 강압으로 자칫 분열할 수도 있었던 우리 민족의 마음을 하나로 묶는 계기가 됐다.

용성 스님의 독립운동이 어디 3·1 운동에만 국한됐을까, 스님은 1911년부터 무려 6년여 동안 전국 방방곡곡을 순례하면서 조선시대 정승과 360 고을의 벼슬을 지낸 이들을 일일이 찾아 다녔다. 나라의 녹을 먹은 이나 그 후손들에게 독립운동에 동참하거나 후원자가 되어 줄 것을 간청하기 위해서였다. 모든 이들이 스님의 뜻을 따르지 않았으나 참운봉 현감 임상학 공의 아들 임동수 거사만이 뜻을 함께 해 독립운동을 후원하기에 이른다.

수행과 일이 하나이듯, 독립운동과 불교중흥 역시 스님에게는 늘 하나였다. 화과원(華果園)을 세워 선농일체(禪農一體)를 실행했던 용성 스님은 이곳에서 벌어들인 모든 재정을 상해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보내 독립운동 자금으로 사용하도록 했다.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 등 일제가 침략전쟁에 혈안이었던 시기인 1938년, 왜색에 물든 식민 불교 퇴치는 물론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교육과 개혁 불사에 진력해 온 용성 스님과 대각교는 일제의 눈엔 눈엣가시였다. 일제는 불교와 민족중흥을 위해 정진하던 스님과 대각교의 독립운동을 무자비하게 탄압하더니 끝내 대각교를 강제 해산시킨다. 그러나 불퇴전의 원력으로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던 스님의 독립운동은 결코 식지 않았다. 방법을 달리해 중국을 방문, 장개석 총통과 모택동 주석을 만나 “중국의 국부군, 공산군 그리고, 조선의 의사군이 함께 일제를 물리치자”고 제안해 이에 관한 밀약을 끌어 내기도 한다.

스님은 1930년 대각사에서 윤봉길 의사와 철생 임철호 지사가 삼귀의와 오계를 수지하도록 하는 등 독립운동을 위한 인재를 발굴하는 데에도 남다른 열정을 쏟았다. 윤봉길 의사를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이끌고 있었던 백범 김구 선생에게 보내 홍구공원 의거를 실행토록 했으며 임철호 지사에게는 부처님의 혜명을 받들어 한국 불교의 개혁을 잇게 했다
.
민족의 독립을 위해 끊임없이 정진했던 용성 스님, 그러나 정작 자신은 끝내 독립을 보지 못한 채 1940년 음력 2월 24일 열반에 들었다. 5년 뒤 스님의 영정 앞에 머리를 숙인 임시정부 요인들의 눈물엔 독립을 맞이하지 못한 채 열반에 든 용성 스님의 한없는 안타까움이 배어 있었으리라.
 
남배현 기자 nba7108@beopbo.com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