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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경 한글로 번역한 ‘역경 선구자’

기자명 법보신문
  • 교학
  • 입력 2007.10.08 14:36
  • 댓글 0

탄생성지 죽림정사 성역화 회향
겨레의 보살 용성 조사
下 근세 불교 중흥과 개혁 불사·끝

“ 3·1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용성 조사께서 서대문 감옥에 계실 때 깜짝 놀라셨다고 합니다. 함께 수감돼 있던 목사님들이 한글 성경을 읽고 계셨기 때문이었죠. 불교가 들어온 지 1600여년이란 긴 세월이 흘렀는데도 한글로 번역된 불경이 없었기에 가슴을 치신 겁니다.”

법손인 죽림정사 조실 도문 스님의 용성 진종 조사에 대한 회고이다. 일제 강점기만 해도 불경은 모두 한문이었다. 불자들은 복을 빌며 기도만 하는 기복 불교에 매달렸을 뿐, 부처님의 가르침을 체계적으로 공부할 길이 막막했다. 불경은 스님들만의 ‘전유물’이었다. 3·1 운동 당시 처음으로 독립운동과 민족의 상징물로 태극기를 쓰자고 제안했던 용성 스님은 한문으로 된 불경을 한글로 풀어쓴 ‘역경의 선구자’이기도 하다.

세수 58세 되던 해인 1921년, 1년 6개월간의 옥고를 마친 용성 스님은 삼장역회(三藏譯會)를 조직, 한문으로 되어 있는 불교 경전의 한글 역경 불사에 착수한다. 신문 등 언론들은 역경 불사를 두고 세종대왕이 이루지 못한 위대한 업적이라며 찬사를 보냈다. 스님의 삼장역회 주도로 원각경을 비롯한 금강경과 능엄경 등 난해한 한문 경전들이 누구나 쉽게 읽고 이해할 수 있는 한글로 번역된다. ‘불교 스스로 산중에서 거리로 나와 대중에게 다가가야 한다’는 신념으로 마음 수행의 기본인 『수심론』 등 20여종의 어록을 저술하기도 한다.

교육과 교화를 통해 온 겨레가 깨치지 못한다면, 조국의 독립은 물론 불교의 중흥도 어렵다는 판단 아래 용성 스님은 독립운동과 함께 근세 불교의 지성화·대중화·생활화를 위해 정진하면서 불교를 개혁하고 정화하는데 일생을 바쳤다. 부처님과 역대 조사들의 가르침에 따라 불교사상을 재정립하지 않고는 불교계는 결코 구태를 벗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 착안한 것이 바로 대각교 운동. 스님은 1921년 4월 대각교를 창립, 대각교 운동을 펼친다. 이 운동의 근본 목표는 불교의 지성화·대중화·생활화이며 민중이 바로 불교 신앙 및 정법 포교의 주체가 되는 것을 기본으로 삼았다. 대각교 운동은 당시 일제에 의해 힘을 잃어가던 민족의 정기를 세우고 사회를 개혁해 조선 사회를 하나로 통합하고 민족의 정체성을 복원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1927년 64세의 노구에도 용성 스님의 불교 중흥을 위한 정진은 쉼이 없었다. 『대각교 의식집』을 발간하면서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찬불가인 왕생가(往生歌)와 권세가(勸世歌) 등 국악조의 창작 찬불가를 직접 작사, 작곡했다. 최초의 찬불가들은 ‘한국 불교 음악’이란 새로운 장을 열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대각사 일요학교에서 손수 오르간을 치며 어린이 법회를 지도했으며 한문으로 된 불교 의식을 한글화하여 불공과 제사 등을 봉행, 불교의 대중화를 위한 바탕을 공고히 했다.

용성 스님의 끊임없는 정진과 노력에도 우리의 전통 불교는 군국주의의 힘을 업은 일본 불교에 의해 왜색으로 물들어 갔고 일본 불교의 종단들은 조선 불교 전체를 병합, 통치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음모를 획책했다. 스님이 겨레를 구하기 위한 독립운동과 불교 중흥을 위한 정법 운동을 하나로 여긴 연유이다. 대한제국 고종황제 재위 당시인 1900년대에 이르러서는 일련종을 선두로 아미타 정토종과 조동종 등 일본의 왜색 불교들이 조선에 들이닥쳤다. 일제의 비호를 받은 일본 불교의 종단들은 서울과 부산에 사찰을 창건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일제의 이런 계획은 스님들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혀 수포로 돌아갔다.

식민정책의 일환으로 우리 불교를 일본화 하기 위한 일제와 조선총독부의 음모는 집요하고도 치명적이었다. 조선의 스님들에게 대처육식과 음주가무를 즐겨하는 분위기를 조장하고 은근히 권장하기도 했다. 참다못한 스님은 1926년 5월과 9월 조선총독부의 조선 불교 죽이기에 맞서 파계 금지에 관한 건백서(建白書)를 비구 127명의 명의로 제출했다. 범계(犯戒)를 권장하고 주지 자격에서 비구계 조항까지 삭제하려 했던 조선총독부는 용성 스님의 지적을 끝내 외면했다. 조선의 스님들을 향한 일대 각성과 정화를 촉구한 용성 스님이 근세 불교의 정화를 주도한 초조(初祖)로 평가받는 대목이리라.

용성 스님은 이웃 나라 고승들과도 빈번히 교류했다. 국적은 스리랑카였으나 인도의 스님이 되어 4대 성지를 보존하는데 앞장섰던 담마팔라 대사로부터 호신 불사리 3과를 기증받아 서울 조계사와 고불총림 백양사에 불사리를 봉안, 석탑을 세우도록 했다.

스님의 일생은 일제 강점기에도 조선의 숭유억불로 인해 땅에 떨어진 불교의 위상을 제고하고 사실상 끊기다시피 한 계맥과 법맥을 복원하는 호법 보살의 삶 자체였다. 스님이 남긴 유훈 10사목(事目)은 스님의 일생이 겨레를 구한 육신 보살이자, 불교를 중흥시킨 호법 보살이었음을 대변해주고 있다. 유훈 10사목은 △가야를 비롯한 고구려, 백제, 신라 등 고대 국가의 초전법륜 성지를 잘 가꾸어라 △금오산과 신라의 진산인 낭산을 잘 가꾸어라 △고위산 천룡사 폐허 성지를 잘 가꾸어 수도, 참회, 발원, 교화 도량의 언덕으로 삼으라 △인도의 5대 성지를 잘 가꾸어라 △불경과 어록을 100만권이 넘도록 발간하라 △수계 제자가 100만명이 넘도록 할 것이며, 이 수계 제자들에게 후손을 출가 봉공(奉公)하게 하라 △온 겨레, 전 인류와 성불 인연을 지으라 △안으로 수행은 비묘엄밀(秘妙嚴密)하게 하고 교화는 중생의 근기에 따라 하되, 가리지 말고 인연 따라 스님을 만들고 가리지 말고 인연 따라 신도를 삼으라 등이다. 

남배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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