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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흥사는 위덕왕이 죽은 아들 위해 지은 사찰”

기자명 법보신문
  • 교학
  • 입력 2007.10.24 11:59
  • 댓글 0

왕흥사지서 명문 적힌 사리구 발견
문화재硏 24일 왕흥사지 출토유물 공개

백제 위덕왕이 죽은 왕자를 기리기 위해 정유년(577년) 2월 왕흥사를 세웠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부여 왕흥사지에서 사리기가 봉안된 사리장엄구와 함께 사리함에서 왕흥사 창건연대를 알려주는 명문이 함께 발견됐다.

문화재청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소장 김용민)는 10월 24일 왕흥사지 제8차 발굴조사 자문위원회를 개최하고 왕흥사지에서 출토된 유물을을 공개했다.

이번 조사에서는 사리장엄구의 출토와 함께 사리함에서 왕흥사 창건 관련 명문기록이 발견되고, 백제 귀금속 및 장신구 등 다량의 보물들이 출토됐다. 

사리함 동체부에는 ‘丁酉年二月/十五日百濟/王昌爲亡王/子立刹本舍/利二枚葬時/神化爲三(정유년 2월 십오일 백제왕 창이 죽은 왕자를 위하여 절을 세우고 본래 사리 두매를 묻었을 때 신의 조화로 셋이 되었다.’라는 명문이 적혀 있다. 백제왕 창은 위덕왕의 생전 이름이다.

삼국사기에는 왕흥사가 법왕 2년(600)에 축조돼 무왕 35년(634년)에 낙성된 것으로 기록돼 있다. 하지만 이번 명문의 발견에 따라 왕흥사의 실제 축조연대가 577년(위덕왕24년)이라는 것과 위덕왕이 597년(위덕왕44년) 일본에 사신으로 보낸 아좌(阿佐)태자 이외에 또 다른 왕자를 두었다는 역사적 사실이 밝혀졌다.

높이 10.3cm의 사리함은 장방형 심초석(100×110㎝) 남쪽 끝단에 16×12×16㎝의 크기로 마련된 사리공 내부에 단면 사다리꼴의 화강암 뚜껑에 덮여 봉안 되어 있었는데 재질은 청동으로 원통형 동체에 보주형 손잡이가 부착된 볼록한 뚜껑을 덮었다. 함 내부에는 다시 은제사리병(외병)을 봉안하였고 이 은제 사리병 안에는 다시 금제사리병(내병)이 봉안되어 있었다. 실제 사리는 별도로 확인되지 않았다.

<사진설명>사리함에 새겨진 명문.

연구소 측은 “ 명문 및 사리구의 구성내용을 통해서 절의 축조가 같은 위덕왕 대에 만들어진 능산리사지(567년) 보다 10년 뒤에 조성되었다는 절대연대가 밝혀짐으로써 백제사 편년과 동시기 고고학적 자료연구에 있어서 중요한 전기가 마련됐다”며 “백제 위덕왕대의 정치·사회·문화적 흐름을 연구하기 위한 새로운 단서를 확보하게 됐다”고 밝혔다.

탁효정 기자 takhj@beo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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