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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소유 일고(一考)

기자명 법보신문

이기화 서울대 명예교수

정해(丁亥)년이 저물어 가고 있다. 금년이 황금돼지의 해로서 수백년 만에 돌아오는 대 길운의 해라고 모두 가슴 설레며 큰 기대를 가졌던 연초가 엊그제 같이 느껴지는데.

불교계의 입장에서 돌이켜 볼 때 과연 금년이 그렇게 길운의 해였던가? 참으로 우울한 일들이 많았었던 것 같다. 제주 관음사, 충남 마곡사, 동국대 신정아 사건 등은 우리 불자들이 차마 얼굴을 들고 다니기가 민망할 정도로 부끄러운 불상사들이었다. 이러한 참담한 사건들은 금년이 행운의 해보다 오히려 불운의 해라고 단정하기에 부족함이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이 모든 불상사들에도 불구하고 금년이 대 길운의 황금돼지 해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참으로 경사로운 일이 느지막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삼성동 봉은사의 주지 명진 스님이 봉은사의 재정을 만천하에 공개하였다. 참으로 어려웠으리라고 생각된 명진 스님의 용단은 앞으로 한국불교를 정화하여 국민들로부터 진정으로 존경받는 종교로 거듭나게 할 중요한 계기가 되리라 생각한다. 우리나라 불교사에 길이 빛날 경사가 아닐 수 없다.

한국불교 정화의 첫걸음은 모든 부정과 비리의 뿌리가 되는 돈 문제로부터 스님들이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승가는 철저한 무소유의 청정행을 실천하고, 사찰의 재정문제는 신도들이 담당하며 이를 스님들이 감독 관리만 하면 된다는 명진 스님의 말씀은 지당하다.

그러나 공개된 강남 제일의 사찰인 봉은사의 재정은 타 종교의 살림살이에 비하면 그 규모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초라하다고 한다. 이점은 일반적인 현상으로서 우리나라 불교와 기독교의 재정규모의 비는 북한과 우리나라의 경제규모의 비로서 비교될 수 있다고 한다. 이것은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종교집단의 재정이 주로 신도들의 보시에 의하여 이루어짐으로, 타종교에 비하여 부끄러울 정도로 영세한 불교 사찰의 재정은 자칫하면 불교인들은 대부분 가난한 사람들이라는 세간의 오해를 불러올 수 있다. 즉 무종교의 일반인들에게 불교가 무욕의 청빈한 삶을 권장함으로 불교를 믿으면 가난하게 산다는 생각을 갖게 할 수도 있다.

법정 스님의 수필집 『무소유』는 청정한 수도승의 살림살이를 진솔하게 보여줌으로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고, 이러한 점에서 불교의 포교에 기여한바 지대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자칫하면 ‘무소유’의 삶, 즉 물질적으로 가난한 삶이 이상적인 불자의 삶이라고 오해하게 될 여지도 있다. 특히 ‘무소유’의 낭만적인 어감은 감상적인 젊은이들로 하여금 물질적인 부의 추구를 비속하게 생각하게 할 수도 있다. 여기서 우리는 재가불자의 삶에서 ‘무소유’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하는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는 것 같다.

부양할 가족이 있는 재가불자의 경우에 진정으로 물질적으로 청정한 무소유의 삶이 과연 가능할까?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또 그렇게 살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다. ‘무소유’가 아니라 ‘무집착’의 삶이 진정한 부처님의 가르침이라고 생각한다. 아무리 재산이 많아도 소유한 재산에 ‘무집착’하고 그 재산을 아름다운 불사에 사용한다면 재산이 많으면 많을수록 더 좋다고 생각한다. 불경에 나오는 기수급고독원의 수달다장자는 거부였다.

우리는 오직 우리가 소유한 것만을 남에게 줄 수 있다. 남을 돕는 대승적인 삶을 살려면 우리는 우선 ‘무소유’에 앞서 ‘소유’해야 한다. 따라서 재가불자들은 ‘무소유’보다 ‘무집착’의 정신으로 가능한 한 많은 부도 정당한 방법으로 축적하는 것은 무방하다고 생각한다. ‘무소유’의 승가와 ‘무집착’의 재가불자들이 손을 맞잡고 나아간다면 한국불교는 거듭나고 그 전도는 양양하리라 믿어진다.

 

이 기 화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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