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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쓰는 근현대 불교사] 40.미군정의 불교정책

기자명 법보신문

천주교-개신교만 공인…일제 불교재산 기독교에 넘겨

軍牧 기독교 독점…“그리스도 정신으로 건국”망언
일제잔재 사찰령 유지…기독교에만 각종 혜택 부여
<사진설명> 1945년 11월 이승만이 중국에서 귀국한 임시정부 김구 주석을 미군정 점령군 사령관 하지에게 소개하는 장면. 『이승만의 삶과 꿈』(1996. 유영익)에 사진수록.

우리나라는 해방과 더불어 민주공화국이 수립되지 못하고 3년이라는 미군정 시기를 거치게 된다.
1945년 9월 일본 오키나와(沖繩)에 주둔하고 있던 미군은 인천을 통하여 상륙하였고, 시민들은 미군을 해방군으로 환영하였다. 미군이 진주한 시점부터 제1공화국이 탄생하는 시점까지를 해방공간이라고 부른다. 미국은 잘 알려진 것처럼 영국에서 건너 온 청교도들이 세운 나라이다. 이 기간 동안에 기독교 우선 정책이 시행되었다는 것은 쉽게 짐작이 가는 사실이다. 미군정 시기는 우리가 자주적인 국가 건설을 준비하는 때로써 현대사의 방향을 설정하는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특히 종교 문제에 있어서는 기독교가 정착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된 시기였다고 본다.

미군정 시기 한국의 종교계는 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대체로 일제 잔재 청산과 현실 정치 상황에 따른 좌·우익의 갈등을 겪고 있었다. 일제잔재 청산 문제에 있어서 미군정이 일제시기 기득권 계층과 우호적인 관계를 형성함으로써 불가능하게 되었다. 더구나 해석에 논란이 될 수 있는 두 가지 법령을 발표함으로써 혼선을 빚었다. 1945년 10월 9일에 발표된 ‘미군정청 법령’ 제11호에는 “치안유지법을 비롯한 제 치하의 제악법의 폐지를 선언함”이라고 하여 일제와의 단절을 선언하였다.

같은 해 11월 2일에 발표된 ‘미군정청 법령’ 제21호에는 “모든 법률 또한 조선 구정부
가 포고하고 법률적 효력을 가지는 규칙·명령·고시 기타 문서로서 1945년 8월 9일까지 실시 중인 것은 그간에 폐지된 것을 제외하고 조선 구정부의 특수 명령으로 이를 폐지할 때까지 완전한 효력으로 그를 존속함”이라고 하였다.

이 법령에 따라 불교계에는 일제시대의 ‘사찰령’과 ‘포교규칙’이 그 효력을 유지하였다. 사찰령은 이승만 정권 때도 그대로 존속하다가 1962년 제3공화국이 되어서야 폐지된다. 이러한 사실은 집권 세력이 불교계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었다는 뜻이다. 뒤집어 말하자면 불교계에서도 사찰령 철폐에 대한 의지가 그리 강하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보다 본질적인 원인은 이 기간 동안에 ‘정화불사’라는 내홍을 겪으면서 그럴만한 여유가 없었다고 보인다. 문제는 1980년대까지 불교학자 가운데서도 사찰령이 불교계 재산보호에 기여하였다고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근현대 불교사를 공부하는 사람이 적었던 까닭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미군정은 한국을 통치하는데 행정의 전권을 가지고 있었으며, 영어를 공용어로 사용하였다. 영어와 한국어의 불일치가 생길 경우에는 영어를 기본으로 한다고 명시하였다. 미군정은 영어를 구사할 줄 아는 천주교와 개신교 인사들의 도움을 필요로 하였고, 점령군 사령관 하지 중장은 노기남 주교에게 사람을 보내어 한국의 지도급 인사 명단을 작성해 줄 것을 부탁하였다. 노기남 주교는 60명의 지도급 인사들의 명단을 작성해 주었다.

이러한 까닭에 과도입법의원 90명 가운데 21명이 개신교인이 될 수 있었다. 미군정의 종교정책은 공인교정책이었다. 공인교정책이란 국가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종교에 대해서는 각종 혜택을 부여하지만 여타의 종교는 종교로 인정하지 않는 정책을 말한다. 미군정은 천주교와 기독교만을 종교로서 인정하였다. 그런 까닭에 1945년 10월 여태까지 써오던 일본의 축제일을 폐지하고 한국과 미국의 축제일만을 공휴일로 인정하기로 하였다. 미국의 축제일은 1월 1일, 독립기념일(7월 4일), 평화기념일(11월 11일), 추수감사절, 크리스마스 등 5일이었다.

크리스마스는 미군정 이후에도 계속 공휴일로 지정되었다. 기독교계는 1947년 3월부터는 일요일마다 공영방송이던 서울 방송을 통해 복음을 전파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제1공화국을 탄생시키는 선거일이 1948년 5월 9일 일요일로 정해지자 기독교 계열에서는 주일에 선거를 할 수 없다는 이유로 강력하게 반대하였다.

이들은 북한의 선거일이 1946년 11월 2일 선거를 실시하자 기독교인들이 이것을 반대하다가 많은 희생을 당하였다는 점을 상기시키면서 선거일을 변경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결국 행정 당국은 기독교 세력의 반대에 부딪혀 선거일을 5월 10일로 변경하였다. 나아가서 마군정은 형무소 재소자들의 교화사업을 기독교인들이 독점하도록 하였다. 1945년 12월에 형목 제도가 시행되었는데 전국 18개의 형무소 교도과장직에 목사들만이 임명되었으며 이들은 모두 정식 공무원 신분을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형목 제도는 이승만 정권하에서도 계속되다가 제2공화국 장면 정권이 들어서서 개신교가 재소자들의 교화사업을 독점한다는 비난에 부딪혀서 무보수 촉탁제로 바뀌었다.
1945년 9월 7일 태평양미국육군총사령관 맥아더의 이름으로 포고 제1호를 발표하였다. 그 가운데 ‘민족과 종교’라는 조항에 ‘전 조선 학교 교육에 있어 민족과 종교의 차별을 철폐함’이라는 내용이 들어있다. 이 조항은 해방된 한국인들에게 종교의 자유를 보장함으로써 종교로 인하여 그 어떠한 차별도 받지 않게 하겠다는 의지의 천명으로 보인다. 불교계는 일제의 간섭으로부터 자유로워진 해방 공간에서 전 국민의 2~3% 정도의 신도를 가지고 있던 기독교계만큼 종교의 자유를 누렸는가 하면 그렇지 못했다. 1947년 10월 9일 미군의 군정장관 대리였던 헬맥은 로마 교황청 사절을 환영하는 자리에서 “건국은 그리스도 정신을 기초로 하여야 한다”는 요지의 연설을 하였다. 미군정은 전후 세계 지배원칙에 부합하는 종교를 지원하는 형식을 취하였다.

<사진설명> 1946년 3월 미군정 시기 최초의 전국 승려대회의 결과로 탄생된 조선불교중앙총무원의 기관지 ‘신생’.

그 원칙은 첫째는 반일이나 통일보다는 반공 이념에 충실한 종교, 둘째는 미국과 인적 교류가 가능한 종교, 셋째는 미군정과 연결 고리를 가질 수 있는 서구식 교육을 받은 인재가 있는 종교였다. 이러한 조건에 가장 부합하는 종교는 개신교였으며 불교계는 이러한 조건에 부합되는 인재가 적었다. 미군정의 개신교 우대 정책은 일본인들이 남기고 떠난 이른바 적산재산 처리 과정에서 잘 드러난다.

해방 직전 천리교·신리교(神理敎)·금광교·부상교(扶桑敎) 등의 교파 신도의 포교당 327개 가운데 250여 개가 남한에 있었다고 한다. 일본 불교 사원은 진종 대곡파(大谷派)·일련종·진언종·정토종 등 9개종 17파의 138개가 남아 있었는데 이 중 120여 개가 남한에 있었다. 미군정이 이러한 적산재산을 어떻게 처리하였는지에 대해서는 분명한 자료가 남아 있지 않지만 처리 원칙은 일본 불교의 재산은 한국 불교계에 불하하고, 일본 기독교의 재산은 한국 기독교계에 불하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실제 운용에 있어서는 이 원칙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고, 일본 불교계의 재산 가운데 많은 부분이 기독교 계열에 편입되었다. 미국 유학 경험이 있었던 한경직·송창근·김재준 목사 등은 천리교의 적산을 양도받아 오늘날 개신교 발전의 토대를 마련한 것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뿐만 아니라 남산에 있던 일본 동본원사는 1948년 국민대학교 교사(校舍)로 사용되어 불교계는 그 관리권마저도 상실하였다.

일본 불교계의 적산 재산 가운데 한국 불교계로 양도되지 않고 기독교회로 양도된 사례가 많았다. 1946년 8월 26일 조선불교중앙총무원에서 경기도 관재청장에게 보낸 ‘일본 불교 적산 사원 상황에 대한 보고서’에는 서울 지역 40여개의 적산재산 가운데 불교계가 사용하고 있는 곳은 11개에 지나지 않는다고 나타난다.

일본 불교계의 재산이 이렇게 다른 곳으로 넘어가는 사실에 대하여 당시 조선불교총무원장이었던 김법린은 미군정청 관재청장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긴 공문을 보내어 항의하였다.
“당연히 불교계에 양도되어야 할 일본 불교 적산이 하등의 연고도 없는 단체, 또는 개인에 의해 불법점거 또는 부적당하게 이양되고 있으며 이미 점유 중에 있거나 임대차 계약이 완료된 재산까지도 다른 곳으로 이양되어 있다”고 하면서 일본 불교계의 적산이 한국 불교계로 이양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미군정의 종교정책은 기독교 우대 정책이었으며, 정책 결정 과정은 소수의 권력자들에게 권한이 집중되어 있었으며, 투명성이 결여되어 있었다. 이 시기 불교계는 정책을 결정하는데 있어서 교계의 의사를 반영할 수 없었고 미군정의 불교 정책은 실수요자들의 현장 목소리를 외면하였으므로 실효성을 거둘 수 없었다.

더구나 기독교 우선 정책을 시행함으로써 기독교는 교세와는 어울리지도 않는 여러 가지
혜택을 입었고, 불교계는 당연히 확보해야 할 재산도 남의 손으로 넘어가는 현상을 지켜보아야 하였다. 해방 공간의 기독교 우선 정책은 초대 대통령이 독실한 감리교 신자인 이승만이 취임함으로써 제1공화국 정권하에서도 그대로 지속된다.
김순석(한국국학진흥원 수석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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