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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법문 명강의] 조계종 포교원장 혜총 스님

기자명 법보신문

“포교는 베품이요 인생의 참 의미입니다”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오늘 포교원에서 주관하는 포교·신도단체임원대회에 참석해 주신 여러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이 먼 곳까지 오시느라 다들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이번 임원대회를 위해 우리가 모인 양양 낙산사는 의상 스님께서 창건하신 유서 깊은 곳입니다. 또 동해바다는 새벽을 뜻하기도 하지요. 그래서 올 해에는 희망찬 포교가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이곳으로 대회 장소를 잡았습니다.

마음-몸짓 하나 하나가 포교

포교를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해 노력하고 있는 각 단체 여러분들에게 오늘은 포교에 대한 얘기를 들려드리고자 합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포교라는 것은 마음 하나하나, 또는 몸짓 하나하나가 다 포교입니다. 포교가 따로 있겠습니까? 불자라면 스님이든 재가자든 간에, 일반인들에게는 특별한 그 무엇이 있는 뭔가 다른 사람들처럼 여겨지기 마련입니다.

오늘 서울에서 이곳으로 내려오는 길이었습니다. 점심을 먹기 위해 휴게소에 잠시 들렸습니다. 그곳에서 우동 한 그릇을 먹기 위해 자리를 잡고 앉았지요. 그런데 그 자리에서 저는 이웃종교 신자들이 두 손을 곱게 모으고 기도를 올린 뒤 비로소 식사에 임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비록 가타부타 물어보거나 그 분이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그 모습에서 그 분이 기독교 신자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 행동을 통해 그 분의 마음가짐을 들여다 볼 수 있었습니다. 이런 광경은 우리 불교신자들에게도 마찬가지겠지요.

우리는 불교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불자들은 우리 자신을 위해, 가정을 위해, 내 일을 위해, 내가 해야 할 임무를 위해 충실히 하루하루를 살아가다 보면 “아~이것이 바로 불교로구나”하는 것을 종종 느낄 수가 있습니다. 자연스럽게 순간순간 불자로서의 삶을 살게 되는 것이지요. 우리 불자들의 행동 하나하나가 틀려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우리 스스로에 대한 마음가짐뿐 아니라 타인에게 보이는 모습에서도 불자는 무언가가 틀린 것이 있어야 하는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아무리 “나는 불자다”라고 말하고 다녀도 사실은 마구니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옛날 가섭 존자가 포교하러 다니실 당시의 이야기입니다. 가섭 존자가 길을 가는데 어느 여인이 물에 빠져서 자살을 하려 했지요. 그 여인이 자살을 하려는 이유는 너무 살기가 힘들기 때문이었습니다. 가섭 존자는 고귀한 생명을 그대로 바라만 보고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당연히 그 여인을 구했지요. 그런데 생명을 구해 놓으니까 이 여인이 가섭 존자에게 적반하장 격으로 나오는 겁니다. “세상이 너무 험해서 살기 힘들어 죽으려는데, 왜 스님이 나를 구해서 살게 만드느냐”고 따지고 들었습니다. “스님이 나를 구해놨으니 나를 책임져라”면서 악을 쓰는 거예요. 얼마나 난처한 상황입니까. 여러분들은 그 상황에 어떻게 대처하시겠습니까? 과연 저라면 그 상황에 어떻게 대처했을까요?

존자는 여인에게 말합니다.
“아무리 집안이 망했기로 밥 먹을 그릇 하나 없느냐? 깨진 사발이라도 밥을 담을 그릇은 있을 것 아니냐? 그럼 그 그릇을 깨끗이 씻어서 네 곁을 오고가는 사람들에게 깨끗한 물을 한 그릇씩 바쳐봐라. 그럼 느끼는 바가 있을 것이다.”

어차피 밑져야 본전 아니겠습니까. 여인은 자기 손에 남은 유일한 물건인 밥그릇에 깨끗한 물을 담아 정성스럽게 사람들에게 공양을 올렸지요. 그 물을 받아 마시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여인은 그제야 깨닫게 됩니다.

주어진 역할에 최선을 다하라

불교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나’라는 존재가 수십억 만년을 살면서 쌓아온 업들로 인해 내 몸, 내 마음으로 나타난 결정체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내가 내 모양을 바로 보고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서 왔는가, 나는 어디로 가는가’를 확실하게 알아야 합니다. ‘나’라는 존재의 의미를 확실히 알게 됐을 때 우리는 비로소 자발적인 포교를 할 수 있는 겁니다.

여러 자리를 통해 누누이 말하지만 베풀지 않은 자는 가난을 면치 못합니다. 그래서 육바라밀 중에 보시 바라밀이 첫 번째인 것입니다. 부처님 말씀을 되짚고 되짚어도, 스님에게 물어보고 물어봐도 안 될 때, 우리는 왜 보시 바라밀이 첫 번째 덕목인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보시는 그냥 수박 겉핥기처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그겁니다. 인생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자에게 인생의 참의미를 가르쳐 주는 것이 바로 포교입니다. 포교는 바로 보시를 통해 이뤄지는 것입니다. 나와 남이 다르지 않음을 깨닫고 하나라도 더 베푸는 행동이 바로 포교의 출발입니다. 포교는 어떤 위대한 힘이 만들어주는 것이 아닙니다. 내 자신이 만드는 것입니다. 모든 출발이 바로 나에게 있음을 알고 실천하는 것이 불교라고 할 수 있겠지요.

전국 방방곡곡에서 포교를 하는 단체들이 참 많습니다. 이 자리에 모인 단체들도 많습니다. 그 단체의 모든 분들에게 오늘 이 자리를 빌려 선물을 나눠 드리고 싶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할 수는 없습니다. 포교원이 집행하고 있는 예산 20억도 모두 전국의 각 사찰이 갹출해서 가져다 준 큰돈입니다. 혈세입니다. 한 푼, 한 푼이 그냥 보통 돈이 아닙니다.

다들 아시다시피 이 나라가 지금 얼마나 어렵습니까. 살림들이 어렵다보니 절에 돈 가져다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다보니 여러분들도 어렵고, 여러분들이 어려우니 종단도 어렵습니다.

그러나 어려우면 포교 안 할 겁니까? 여러분들이 어렵다면 내가 어떤 도움을 줘야 할까요? 받는 기쁨이 우선입니까, 주는 기쁨이 우선입니까? 받는 기쁨은 어차피 빚입니다. 세세생생 갚아야 할 빚입니다. 그러나 주는 기쁨은 복전입니다. 부모님에게, 아들 딸에게, 스님, 부처님에게 바치는 마음이 바로 보리종자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믿어야 합니다. 정말 우리가 종단을 위해, 포교를 위해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고민해야 합니다.

베풀지 않았는데 뭘 받으려 하나

제가 올해 66세입니다. 11살에 절에 들어와서 50년 넘게 이 짓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시 태어나도 저는 이 짓을 할 겁니다. 어쩌면 내가 하고 있는 이 일은 나라를 위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내 주변을 위해, 그 사람의 가정을 위해, 이 사회를 위해, 이 나라를 위해 공부하는 것입니다. 우리와 함께 호흡하고 있는 그 많은 사람들을 위해 공부하자 이겁니다.

각 분야에서 맡은 바 충실히 할 때 이것이 바로 포교입니다. 열심히, 충실히 하지 않으면 포교가 될 수 없습니다. 포교를 하기 위해서 우리가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행복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요. 내가 행복하기 위해서는 남도 행복해야 합니다. 아들 딸, 아빠, 아내가 행복하고 건강하면 나라가 행복해지고, 나라가 행복해지면 세계가 행복해 집니다.
올해 포교원은 ‘포교는 희망입니다’를 슬로건으로 정했습니다. 여러분, 포교가 희망 아니겠습니까?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포교를 해야겠습니다. 그러나 포교를 할 수 있는 시간은 정해져 있습니다.

30살까지는 부모에 의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30살부터는 남에게 포교할 수 있는 시간입니다. 저도 올해 60살이 넘었지만 포교한다는 것은 여러 가지로 힘듭니다. 하지만 포교하지 않고는 우리는 행복할 수 없습니다.
베풀지 않았는데 뭘 받으려 합니까. 우리가 포교하지 않으면 이 세상이 남아나지 않을 겁니다. 세상이 얼마나 각박해 지겠습니까? 우리가 행복을 누리고 사는 것은 다 부처님 덕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 불자들은 세상을 행복하게 만드는 사람들입니다. 자부심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수십억만 년 전부터 살아왔습니다.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겁니다. 그렇다면 오늘 이 시간을 통해 앞으로 내 행동, 내 말 하나하나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생각해 봅시다. 세세생생 선업을 쌓고 지혜 종자를 발아시키는 포교 일선에 많은 불자들이 동참해 주기를 우리 모두 기원합시다.

정리=정하중 기자 raubone@beopbo.com

 


이 법문은 1월 19일 양양 낙산리조트에서 열린 포교신도단체임원대회에서 포교원장 혜총 스님이 설법한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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