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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의 마음

기자명 법보신문
글·김월순

그림·이진경



하얀 아침 햇살이 석이 방 앞으로 눈부시게 비추었어요. 석이는 속삭이는 소리에 살며시 눈을 떴어요.

할머니는 다른 날과 똑같이 염주를 굴리면서 불경을 앞에 놓고 작은 소리로 독송을 하고 계셨어요. 할머니 모습은 평화롭고 아름답게 보였어요.

“할머니, 오늘도 부처님 만났어요?. 오늘은 무엇을 빌었어요 ?” “벌써 깼느냐?”

할머니는 안경을 콧등에 걸치고 석이를 힐끗 바라보았어요. 그리고 씽끗 웃으며 말했어요.

“우리 가족 건강하고 늘 자비를 주시라고 말씀드렸다.” “할머니, 또 똑같은 말.”

석이는 이불을 콧등까지 덮어쓰면서 코맹맹이 소리를 했어요.

“응, 우리 석이 짝꿍은 예쁜 여자아이가 되길 바랬지 .” “앵! 할머니, 내 마음을 어떻게 알았어요?”

석이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할머니 품속으로 뛰어들었어요. 그리고 할머니 가슴에 귀를 쫑긋 세우고 무슨 소리라도 들어보려는 눈치였어요.

“할머니, 부처님께 소원을 빌면 다 들어주세요?”

할머니는 대답 대신 빙그레 웃으며 석이 등을 토닥거렸어요.

“석이야, 이제 일어나라. 입학식인데 늦으면 안되지.”

할머니는 불경과 염주를 책상 위에 올려놓았어요. 석이는 이부자리를 번개처럼 개면서 말했어요.

“네. 보살님.”

석이는 함박꽃처럼 환하게 웃으며 방이 떠나갈 것처럼 큰소리로 힘차게 말했어요. 언젠가 절에 갔을 때 스님이 할머니를 부를 때 들었던 호칭을 석이는 기분이 좋을 때만 말을 했어요. 할머니는 보살님이라는 호칭을 무척 좋아했어요.

석이 입학식 때문에 일손이 바빠진 석이 엄마는 정신이 없었어요. 바쁘게 학교 입학식에 갈 준비를 끝내고 대문을 나설 때 석이 입에서 꾀꼬리 같은 휘파람 소리가 휙휙 나왔어요. 까만 양복에 하얀 와이셔츠 빨간 나비 넥타이를 맨 석이 모습은 귀엽고 앙증스러운 꼬마 신사 같았어요.

“우리 석이가 정말 미남자구나.”

할머니가 석이 머리를 쓰다듬으며 싱글벙글 웃었어요. 할머니 주름진 얼굴이 물결처럼 춤을 추었어요. 그 옆에 있던 엄마도 눈웃음을 지으며 석이의 까만 눈망울을 사랑스럽게 바라보았어요.

초등학교 넓은 운동장 안에는 아이들의 울긋불긋한 화려한 옷차림이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어요. 어른들의 하하 호호 웃음소리 아이들의 떠드는 소리 마이크에서 나오는 음악소리가 어우러져 학교는 축제 분위기였어요.

1학년 1반줄에 선택되어 앞쪽에 서있는 귀여운 석이를 할머니는 흐뭇한 얼굴로 바라보고 계셨어요.

“어머니, 석이 짝꿍이 참 예쁘네요.”

석이 엄마는 환한 웃음으로 할머니에게 석이 옆에 있는 여자아이를 향하여 손가락을 세웠어요.

왕눈이 까만 눈에 콧날이 오똑하고 하얀 얼굴을 한 여자아이는 빨간색 코트를 입고 빨간색 리본을 머리에 달고 있었어요. 갑자기 얌전해진 석이는 여자아이 손을 꼭 잡고 있었어요. 입학식이 끝난 그 날 저녁 식탁에 둘러앉아서 식사를 할 때 석이가 식탁 밑으로 발을 덜렁덜렁 흔들며 콧노래를 흥얼거렸어요.

“우리 석이가 학교에 입학하더니 무척 좋은가 보구나. 허허허.”

석이 아빠는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갑자기 씩씩하고 의젓해진 석이를 바라보았어요.

“석이 짝꿍이 아주 예뻐요.”

엄마가 석이를 힐끗 처다 보며 쌩끗 웃었어요.

“이름도 예쁘더라. 예솔이라나.”

할머니는 아빠의 탁 벌어진 입을 처다 보며 말했어요.

“할머니 마음은 부처님이지요?”

눈망울을 반짝이며 말하는 석이 말에 아빠와 엄마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어요.

“석이가 할미 맴을 아는구나.”

고개를 끄덕이며 할머니는 가슴 앞으로 두 손을 모았어요.



염주 망가뜨리고 신발 감춘 석이

그래도 “티없이 살아라” 다독여



석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한지도 여러 날이 지난 어느 날이었어요. 할머니가 큰집으로 나들이를 다녀오신 오후였어요. 할머니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거실에서 찬바람이 쌩쌩 불어왔어요.

“두 손 번쩍 들고 있어. 반성해.”

석이가 무릎을 끓고 두 손을 번쩍 들고 마루바닥위로 눈물을 툭툭 쏟고 있었어요. 할머니는 깜짝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어요.

“아니, 웬일이냐.”

할머니는 석이 곁으로 황급히 다가가서 석이 팔을 잡아끌며 일으켜 세웠어요. 그러나 석이는 할머니 팔을 뿌리치며 마루바닥에 털썩 주저앉았어요.

“어머니, 그냥 두세요.”

화난 엄마 목소리는 무섭게 들렸어요. 할머니는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며 고개를 갸우뚱거렸어요. 분명히 석이가 큰 말썽을 부린 것 같았어요.

그 날밤 석이는 한마디 말도 없이 이불을 똘똘 말고 벽을 향해 돌아 누웠어요.

“석이야, 왜 엄마한테 혼났니?”

“ ……”

석이는 자는 척하면서 대답이 없었어요. 할머니는 석이 엉덩이를 가볍게 툭툭 치면서 할머니 이불을 석이에게 덮어주었어요.

그 이튿날 새벽이었어요. 할머니가 석이를 살살 흔들어 깨웠어요.

“석이야, 할머니 염주 못봤니?” “몰라요.”

석이 목소리는 겨울 바람처럼 차가웠어요.

“이상하네. 분명 여기 있었는데……”

할머니는 혀를 끌끌 차며 책상 위에 있는 불경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청아한 목소리로 불경을 독송하기 시작했어요.

“할머니 마음은 거짓말쟁이야.”

석이가 입을 쑥 내밀며 퉁명스럽게 말을 했어요.

“그게 무슨 말이냐?”

할머니는 깜짝 놀라며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을 했어요.

“몰라요.”

석이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어쓰며 짜증스런 말투로 말을 했어요.

부산했던 집이 조용했어요. 석이가 혼자서 학교에 가고 석이 엄마는 집안 청소까지 끝내면 언제나 할머니와 커피를 마셨어요.

따끈한 커피를 마시고 달콤한 딸기를 먹고 있을 때 석이 엄마가 방으로 들어가 염주를 들고 나와 할머니 앞으로 조심스럽게 내려놓았어요.

“어머니 용서하세요. 제가 자식을 잘못 키웠네요.”

석이 엄마는 마루바닥에 무릎을 끓고 고개를 푹 숙이며 앉았어요.” “아이구! 에미야, 일어나라.”

할머니는 작은 눈을 크게 뜨면서 석이엄마 팔을 잡아 일으켰어요.

“어머니, 석이 가방을 정리하다가 어머니 염주를 발견했어요. 망가져 알이 모두 쏟아져 있지 뭐예요. 그래서 제가 새것으로 준비했어요.”

탁자 위에 염주가 반짝이며 향기로운 냄새를 솔솔 풍기고 있었어요.

할머니는 고개를 끄덕였어요. 그래서 석이가 이상한 행동을 했다는 생각을 했지요.

“허허허, 뭘 그것 때문에….”

언제나 너그러운 할머니 입가에 편안하고 행복한 웃음이 잔잔히 흘러 나왔어요.

봄날 오후였지만 꽃샘추위 때문에 싸늘한 바람이 불었어요. 할머니가 분홍색 한복에 작은 털이 총총 달린 회색코트를 입고 현관으로 나왔어요.

“에미야, 나 절에 다녀오련다.” “봄바람이 차가운데 옷은 두껍게 입으셨어요?”

석이 엄마는 방에서 나와 할머니 분홍색 목도리를 예쁘게 매어드렸어요. 그리고 신발장에서 할머니 구두를 찾았어요. 석이 엄마 얼굴이 창백해지면서 할머니 얼굴을 쳐다보았어요.

“어머니, 어쩌죠? 구두가 없어요.” “땅으로 꺼졌냐. 하늘로 솟았냐. 그것참... 이상한 일도 있구나. 그러면 고무신 신고 다녀오마.”

할머니는 허탈한 웃음을 날리면서 대문을 나섰어요.

저녁에 할머니가 집으로 돌아 왔을 때 거실바닥에 석이가 무릎을 끓고 두 손을 높이 들고 흐느껴 울며 벌을 받고 있었어요.

“왜, 또 그러니. 착한 석이가 학교에 가면서 웬일이냐?”

석이는 할머니를 보자 고개를 푹 숙였어요. 할머니가 석이 팔을 잡아끌며 얼굴에 흐르는 눈물을 손등으로 닦아주자 석이는 엉엉 소리를 내며 큰소리로 울었어요.

그 날밤 석이는 잠꼬대를 하면서 몸을 뒤척거렸어요. 할머니는 몸이 불덩이처럼 뜨거운 석이를 깨워서 약을 먹이고 찬물수건으로 찜질을 시켜주며 밤새워 간호를 했어요. 피곤에 지친 할머니가 깊은 잠에 빠져있을 때였어요.

“할머니 잘못했어요.”

울먹이는 소리로 석이가 할머니 품속으로 파고들었어요. 밤새 아팠던 석이 몸은 씻은 듯이 낳았고 창 틈으로 은빛 햇살이 서성이기 시작했어요.

“무엇을 잘못했는고?”

할머니 목소리는 달콤하고 부드러운 솜사탕 같았어요.

“할머니 염주도 망가뜨리고 구두도 감췄어요.” “왜 그랬을까?” “할머니가 미워서. 거짓말쟁이라서…….”

석이 목소리가 모기처럼 작았어요.

“할머니, 선생님이 내 짝꿍 예솔이를 딴 애하고 앉게 하고 못생긴 뚱보를 짝꿍 만들어 주었어요.”

석이는 작은 한숨을 내쉬었어요.

“선생님도 밉고, 예솔이도 미워요.” “오! 그래서 석이가 심통이 났었구나.”

할머니는 석이를 힘주어 안았어요. 석이 가슴에서 콩당 거리는 소리가 들렸어요. 그러나 할머니 품 속에서는 따스한 봄 냄새가 풀풀 풍겨 나왔어요.

“할머니는 내가 미워해도 웃고, 나쁜 짓을 해도 사랑해주고. 할머니 마음을 모르겠어요.”

석이는 실눈을 뜨면서 할머니 얼굴을 조심스럽게 살폈어요.

“할머니 마음이 부처님 마음이에요?”

할머니는 흐뭇한 얼굴을 하며 주름진 입가에 미소를 띠었어요.

“부처님의 마음은 대자대비이시다. 늘 우리 곁에서 보살펴주시고 지켜주시고 한없는 자비를 주신단다.”

석이는 할머니를 따라 고사리 같은 손을 모아 합장을 했어요.

“동심불심이라는 말이 있단다. 어린이 마음이 곧 부처님 마음이다. 순수하고 티없이 맑은 마음으로 살아야 한단다. 누구를 미워해서도 안되고...”

석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빙그레 웃었어요.

“할머니, 선생님도 예솔이도 사랑할래요.” “우리 석이가 학교에 다니더니 많이 컸구나. 이제는 할머니 말을 잘 알아듣고...”

할머니는 사랑스런 눈빛으로 합장하고 있는 석이 작은 손등을 할머니 손으로 포근히 감쌌어요.

“할머니, 나 착하지요?”

밝게 웃고있는 석이 얼굴로 싱그러운 아침햇살이 살랑살랑 비추었어요.



작가소개

김월순 님은 1950년 충남 연기 생. 현재 구연동화 선생님으로 활동 중이다. <똘이와 아기 다람쥐>로 등단했으며, 1999년 아동문예 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대표작으로는 <겨울여행> <반디마을 이야기><찻잔> 등의 작품이 있다.



이진경 님은 1970년 서울 생. 현재 프리랜서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동하고 있다. 대표작으로는 <구두수선공과 요정><좬집을 어디에 지을까> <인어공주> 등에 삽화를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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