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계 대책위원회 결성…이승만 담화로 45% 농지 회수
농지 대신 사업체 불하…경험미숙과 분규로 대부분 상실
1965년 「대한불교」에 게재된 농지개혁 후 불교계 재산이 줄어들고 있음을 전하는 보도 기사 사진제공=민족사 |
1948년 「불교」에 토지개혁법안에 대한 불교계의 입장을 밝힌 기고문 |
불교계에서는 이 문제를 환속하여 정계에 입문한 불교계에 인사들을 통하여 정치권에 호소하여 해결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노력은 성과를 거두어 1952년 4월 1일 ‘사찰보호에 관한 건’이라는 이승만 대통령의 담화가 발표된다. 그 요지는 사찰을 보호하기 위하여 특히 부동산 처분 등으로 인한 재원 고갈에 대하여 사찰을 유지시킬 수 있는 대책을 강구하라는 것이었다.
이러한 대통령의 담화 발표를 계기로 하여 이튼날 피난지 부산에서 총무원 간부들은 총무원장과 각 도 교무위원들이 모여 대책회의를 개최하였다. 이 회의 결과는 사찰유지대책위원회를 구성한다는 것이었다. 당시 국회의원을 겸하고 있었던 총무원장 이종욱이 중심이 되어 사찰유지대책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위원으로는 총무원 총부부장 최원종, 경기 교구 장용서, 충북 교구 주태순, 전북 교구 정봉모, 전남 교구 신지정, 경북 교구 서재균, 경남 교구 김동철 등이다. 이들은 여러 차례 회합을 가지고 대통령에게 건의할 사항을 정리하였는다.
그 내용은 첫째, 사찰농지도 문교재단 농지와 동일하게 취급하여 15할을 가급해 줄 것. 둘째, 사찰 경내에 있는 그 사찰 소유의 농지는 그 사찰의 자경 농지로서 반환할 것. 셋째, 사찰 또는 사찰 유지를 목적으로 한 재단이 지가증권으로 귀속기업체를 매수코저 하거나 관리코저 할 때는 최우선권을 줄 것. 넷째, 전국에 있는 일본 불교 사원의 모든 재산은 현재 누가 관리를 하고 있든지 모두 대한불교계에 무상으로 증여해 줄 것 등 7개 항목이다. 사찰유지대책위원회는 지금까지 논의된 사실을 정리하여 건백서 형식으로 이종욱 총무원장과 김법린 당시 고시위원장에게 제출하였다.
이에 이종욱과 김법린은 대통령에게 불교계의 건의 사항을 전달하였고, 이 건의에 대해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긍정적인 회신을 전달 받았다. 이승만은 1953년 5월 ‘사찰농지를 반환하라’는 담화를 발표한다.
사찰의 농지는 농지개혁법에 의해 농민들에게 매각되었지만 사찰이 농지를 자경한다는 사실을 확인함으로써 반환되게 된다. 다시 말하자면 농민들에게 소유권이 넘어간 사찰 농지가 불교계의 요구에 의해서 다시 사찰로 환수되게 된 것이다. 말로만 들어도 복잡하고 어려움이 따를 것이 예상되는 이 작업은 결코 쉽지 않았다. 먼저 전국에 있는 사찰에서 농민들에게 매각된 토지 목록이 파악되어야 하였다. 이 목록은 각 도 교무원에서 파악하여 총무원으로 제출하도록 하였다. 총무원은 이 목록에 명시된 농지를 찾아오기 위해서 정부측과 교섭하였고, 그 결과 사찰의 경우는 자경의 여부를 묻지 않고 사찰의 문화재 보호와 승려들의 식생활 문제 해결을 위해 소유권을 인정한다고 결론이 내려졌다.
그런데 문제는 사찰의 농지 가운데 이미 소유권을 인정받아 현재 경작을 하고 있는 농민들로부터 농지를 환수하는 것이었다. 이는 현재 경작자인 농민들의 농지 포기가 전제 되어야 가능하였다. 농경 사회에서 농민들에게 생명줄이나 다름없는 농지를 포기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사찰의 토지를 취득한 농민들은 오랫동안 사찰의 토지를 경작하던 소작농이 많았다. 이들 소작농들은 사찰과의 오랜 관계를 생각해서 포기 각서에 도장을 찍어 주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공권력인 경찰이 힘을 빌릴 수 밖에 없었고, 경찰은 마을 이장들을 동원하여 포기 각서에 도장을 받아 내었다.
당시 이장들은 정부로부터 나오는 각종 구호물품과 여러 가지 행정 사무를 처리하기 위해서 마을 사람들의 도장을 보관하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마을 이장은 당사자의 의견을 듣지도 않고 날인을 해 주었고, 이장이 도장을 보관하고 있지 않을 때는 경찰이나 다른 유력한 힘있는 사람이 함께 가서 농민들을 설득하였다. 소작농들은 마음 속으로는 분개하였지만 원래 자기 소유의 땅이 아니었다는 사실로 불만을 삭여야 했다. 농민들이 포기각서에 서명을 거부하면 대통령 특명위반이나 용공분자로 위협하여 날인을 강요하였다.
이러한 방식의 사찰 농지 회수는 농민을 위한 농지개혁법의 취지에도 어긋나는 것이었다. 보다 큰 문제는 농민들이 이 법 시행 이후 납입한 상환곡을 현재 곡물 시세에 맞추어 보상해 주는 것이 아니고, 당시 매년 정해졌던 정부 법정 곡가에 따라 보상한다는 점이었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승복하지 않는 농민들은 법정 소송으로 농지를 찾고자 하였지만 국가에서 법으로 시행한 일이라 사안은 행정소송에 해당되었다. 행정소송의 경우 소송전치주의(訴訟前置主義)에 따라 처분청을 거치게 되어있었다. 농지개혁의 경우 농민들은 살고 있는 거주지의 농지위원회에 재심을 청구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1954년 6월 경에 농민들에게 분배되었던 사찰 농지 가운데 47%가 사찰로 반환되었다. 이 과정에서 사찰의 농지는 많이 축소될 수 밖에 없었다. 농지개혁과 사찰농지의 변동 상황에 관한 연구에 나타난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보면 통도사의 경우 일제시대에 약 4000석의 추수를 할 수 있는 농지를 보유하고 있었다고 한다. 1951년 「대한민국 통계연감」에 따르면 300평당 생산량이 1.23석이었다고 하니 당시 통도사는 97만5609평 정도의 농지를 가지고 있었다. 농지개혁으로 농민들에게 분배된 토지를 주지의 호소와 설득으로 10만6000평 정도는 반환을 받았고, 대통령의 담화 발표 이후에는 13만평에 대한 포기 각서를 받아 약 24만평 정도를 회수할 수 있었다고 한다.
해방 이후 1950년대 사찰의 농지 규모를 파악하는 것은 쉽지 않다. 왜냐하면 농지개혁과 6·25전쟁, 정화운동 시기를 거치면서 변동이 심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지목이 50% 이상 감소되어 사찰의 재산이 많이 유실되었다. 농지개혁의 목적 가운데 하나는 토지자본의 산업자본화이다. 정부는 지주들에게 지가증권을 발급해 주었고, 이 지가증권은 산업체를 매수하는 자금으로 활용되었다. 불교계를 관할하던 행정청이던 문교부에서 발행하는 지가증권은 귀속재산 불하에만 사용할 수 있었다. 귀속재산은 일제시대 일본인들이 운영하던 기업체나 토지 등의 소유권이 국가로 귀속된 재산을 말한다.
이 시기를 살았던 나이가 많은 승려들의 증언에 의하면 불교계가 불하 받은 산업체는 충북여객·충주비료공장·전남여객·목포 대광유지공장·인천베어링·강원여객·영도도자기·영도조선소·밀양 내화벽돌·부산백화점·경기여객·대구백화점·대구 대한사·충남여객·대전백화점·서울 한성극장·마산 소모사 공장·청구양조장·전주 도정공장·전남 유지·통영조선·동래방직·밀양모직 등 다수가 있었다. 당시 전쟁 직후 극심한 인플레이션으로 지가 증권은 액면가의 50% 전후에서 거래되었다. 불교계가 지가증권으로 사들인 귀속사업체의 경영은 경험 부족과 관리 미숙으로 혼선을 빚었다. 더구나 정화불사가 진행되면서 비구·대처측의 분쟁으로 법정소송이 진행되면서 대부분 상실되고 말았다.
김순석(한국국학진흥원 수석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