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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한국불교 최초]15.강원(講院)

기자명 법보신문

고려 말 개성 ‘민천사’가 기록에 나타난 최초 강원

 
고려시대 강원의 존재를 나타낸 법주사 자정국존비.

한 사람의 인생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한가지 꼽으라면 대부분 주저 없이 교육을 첫 번째로 선택할 것이다. 교육을 어디에서 어떻게 받느냐가 곧바로 개인의 인격형성과 사고 그리고 삶에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맹자의 어머니가 자식의 교육을 위해 세 번이나 이사를 했다는데서 유래한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란 말이 지금까지도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물론 요즘 우리나라의 지나친 교육열에서 보듯, 때론 잘못된 교육으로 인해 오히려 개인의 인성을 해치는 사례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 역시 교육의 중요성에서 비롯된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세간에서의 교육에 대한 관심과 열정이 이렇듯 뜨거운 상황인데, 하물며 인천의 스승이 되어야 할 스님들을 교육하는 일이 범상할 수는 없는 일이다. 때문에 불교에서는 이미 오래 전부터 사찰에서 경(經)·논(論)을 가르치는 전통적인 교육기관을 두어 스님과 재가불자들을 가르쳐왔으며, 이를 ‘강원(講院)’이라고 불러왔다.
‘부처님의 교법을 강설하고 연구하는 수행도량’으로 정의할 수 있는 강원의 역사는 삼국시대 사찰 경내에 넓은 강당을 만들고 스님과 재가불자들을 상대로 경학을 강설한데서 시작된다.

삼국시대 사찰 강당에서 유래

교법에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따라서 교법은 자기 마음의 일치됨을 확인시켜 주는 뗏목의 역할을 하게 되고, 그러한 이유로 교법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는 참다운 불자라고 할 수 없다. 스님들 역시 교법을 배우고 익히는데서 고유의 역할을 시작할 수밖에 없으며 교육은 그만큼 중요한 부분이기도 하다. 결국 스님들을 교육하는 가장 큰 목표는 바로 불교의 진리를 체득해 자아를 완성하고 하화중생의 이타를 행하여 불국토를 구현하는데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에 불교가 전래된 이래 이같은 승가교육의 목표는 교육적 지도정신으로 받아들여졌고, 신라와 고려시대에는 이러한 승가교육의 이념을 국가의 교육이념으로 삼아 시행하기도 했다.

 
서산대사가 의발을 전한 이후 13대 종사와 13대 강사를 배출한 해남 대흥사 옛 강원 용화당 전경.

불교의 교육, 특히 승가교육은 과거 일곱 부처님이 공통적으로 말씀하신 칠불통계(七佛通戒)에서 ‘모든 악한 것을 짓지 말고, 모든 착한 것을 받들어 행하고, 스스로 제 마음을 맑게 하면, 이것이 곧 부처의 가르침이다’라고 훈계하고 있듯, 결코 특별한 가르침이 아니라 보편적이고 타당한 진리를 따르라는 것에 기초하고 있다.
부처님은 보편 타당한 진리를 각각의 근기에 맞게 설했고, 그 팔만사천의 말씀을 부처님 사후에 결집해 전하는 것이 바로 경전이다. 그리고 이 경전은 손오공이 등장하는 서유기를 통해 널리 알려진 중국의 삼장법사가 공부하며 법을 구하기도 했던 세계 최초의 불교교육기관 인도 나란다대학을 비롯해 불교가 전래된 곳곳에서 선지식들의 강설을 통해 전파됐다.

우리나라에서 그 경전을 가르쳤던 곳이 바로 강원이다. 물론 강원의 역사 역시 정확하게 정리되거나 확인된 것이 없어 그 연원을 밝히는 일이 녹녹치 않은 상황인 게 사실이다.
그러나 학자들의 연구에서 『삼국유사』,『삼국사기』,『해동고승전』등의 기록에 삼국시대 사원과 경전, 의식, 승가조직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고, 이에 따라 불교교육도 시행됐을 것으로 유추하고 있다. 역사적으로는 고구려에 불교가 전래된 후 첫 번째로 세워진 사찰 초문사와 이불란사에 경전을 가르치고 법을 설할 수 있는 강당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나 그 어디에도 남겨진 기록은 없다.
하지만 고구려 문자왕 7년에 세워졌던 금강사의 발굴조사에서 강당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건물 터를 포함한 가람배치가 확인되면서 삼국시대부터 교육이 전문적으로 시행됐을 것이란 주장에 무게가 실리고 있다.

또 『삼국유사』에서는 백제의 승가교육 연원을 추정할 수 있는 대목도 있다. “침류왕 원년인 384년에 호승 마라난타가 동진에서 들어와 다음해에 수도인 한산에 절을 세우고 10명의 승려를 배출했다”는 기록이 바로 그 대목이다. 삼국 중에서 가장 늦게 불교를 수용한 신라의 경우 원광법사의 세속오계와 같은 교육덕목이 수립되었을 정도로 불교교육이 보편화되었기 때문에 당연히 승가교육기관이 있었을 것이란 주장에 설득력이 더해지고 있다.
통일신라시대를 거쳐 고려시대에 들어서는 승가교육제도가 국가의 보호를 받으면서 발달했을 뿐만 아니라, 태조는 훈요10조로써 불교를 보호하게 하고 국사·왕사 제도를 신설해 사원과 총림, 선원 등 많은 교육기관을 건립하도록 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후 조선시대에 접어들면서 숭유억불로 인한 불교 쇠락과 함께 승가교육도 쇠퇴기를 맞았었다. 이후 승가교육은 청허 휴정이 선(禪)과 교(敎)를 함께 배우는 ‘선교겸학(禪敎兼學)’시대를 열면서 체계를 새롭게 세웠고, 그 시기의 교육제도와 체계가 근간이 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17세기 이후 강원의 학제 완성

불교에서는 강원교육의 이러한 역사적 흐름을 교학시대(불교전래 이후 선종 전래까지), 선교병립시대(라말에서 고려 문종까지), 선교융섭전개시대(천태종과 조계종 개종 이후 여말까지), 선교양종시대(조선 태조에서 선조까지), 선교겸학시대(조선 휴정과 부휴학파 이후) 등 다섯 단계로 구분하고 있다.

그렇다면 현재 한국불교에서 사용하고 있는 강원이라는 말은 언제부터 사용됐을까. 그리고 그 첫 번째 강원은 어디일까.
이 역시 정확한 기록을 찾을 수 없다. 다만, 강원이라는 표현은 속리산 법주사에 있는 ‘자정국존비(慈淨國尊碑)’에 처음으로 등장한다. 충청북도유형문화재 제79호로 지정돼 있는 법주사 자정국존비에 따르면 1318년 왕이 “법가(法駕)를 갖추어 대민천사(大旻天寺) 강원(講院)에 오도록 하여 삼가장소(三家章疏)를 강론(講論)토록 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 기록이 강원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최초의 자료이고, 이 자료에 등장하는 대민천사는 지금의 개성에 있는 사찰이다. 즉, 개성에 있는 대민천사 또는 민천사가 역사적 기록물에 등장하는 첫 번째 강원인 셈이다.

자정국존(1240∼1327)은 고려 충숙왕 대에 국존이 되었던 고려후기의 스님이다. 1252년 13세에 원흥사 종연 스님에게서 득도하고 구족계를 받았으며, 이때 법명은 자안이었다. 1258년에 승과고시인 선불장에 응시해 상품과에 올랐으며 1268년에는 삼중대사를 받아 유식론의 주강을 맡기도 했다. 법주사에 머물면서 『경론지해(經論之解)』92권을 찬술함으로써 충선왕이 즉위하자, 원명대사라는 호를 받고 석교도승통에 임명됐다. 스님은 이어 1313년에 대자은종사 삼중대광 양가도승통에 올랐고, 충숙왕 때는 내전참회사가 되어 궁궐에서 왕실의 계율을 다스리기도 했다. 왕의 청으로 민천사에 머물며 삼가장소를 강의하기도 했고, 1327년 나이 88세 법랍 75년으로 입적했다. 스님이 입적한 후 시호를 자정국존, 탑호를 보명이라 하여 1342년 법주사에 비를 세웠다.
자정국존비를 통해 강원이 존재했던 사실이 확인된 것이다. 그렇다면 현재의 강원제도는 어떤 과정을 거쳐 성립됐을까.

근대 사찰의 강원제도에 대해서는 이능화, 권상로 등의 연구 결과물에서 밝혀지고 있다. 강원 체계 확립에 대한 학자들의 견해가 약간씩 다르기는 하나, 공통적인 부분은 근대 강원의 설치 동기를 선교겸수를 한 데서 찾고 있으며 그 제도가 완성된 시기를 조선 인조에서 숙종 때로 본다는 것이다.

강원교육 꽃 핀 곳은 대흥사

학자들에 따르면 근대 강원설치의 원류를 고려 중기 보조국사 지눌이 정혜결사를 조직해 돈오점수를 시작한데서 찾을 수 있다. 그후 태고보우를 거쳐 조선초 벽송지엄이 배출되어 사집과가 정해졌고, 명종 때를 전후해 부용영관과 경성일선 등이 나와 사교과와 대교과의 기틀을 마련했다. 이어 선조 때 청허·부휴에 의해 제도적으로 정비되고 17세기 인조∼숙종 때에 이르러 청허의 법손인 월담설제·월저도안·설봉정원 등과 부휴의 법손인 백암성총 등이 경전을 강론하는데만 전력함으로써 마침내 ‘사미·사집·사교·대교’로 이어지는 이 제도가 완비되었으며 이것이 당시 전국적으로 전파돼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교육체계를 갖춘 근대 강원의 학제를 오늘날 일반사회의 학제와 비교하면 사미과는 초등학교, 사집과는 중학교, 사교과는 고등학교, 대교과는 대학교로 볼 수 있다. 그리고 대교과 이후의 수의과는 지금의 대학원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교육체계 확립 후 강원 교육의 꽃을 피운 곳은 바로 해남 대흥사다. 대흥사는 서산휴정이 의발을 전한 이후 13대 종사와 13대 강사를 배출하면서 조선 후기 선과 교의 중심지가 되기도 했다.

심정섭 기자 sjs88@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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