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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한국불교 최초]16. 사경(寫經)

기자명 법보신문

700년대 초 인쇄된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 최초

 
700년대 초 인쇄된 무구정광대다라니경. 국보 제126호.

“무수한 세월동안 물질로 보시한 공덕보다 경전을 사경하고 수지 독송하여 다른 사람을 위해 해설한 공덕이 수승하다.”『금강경 지경공덕분』
“부처님께서는 살갗을 벗겨 종이로 삼고, 뼈를 쪼개 붓을 삼고, 피를 뽑아 먹물을 삼아서 경전 쓰기를 수미산만큼 하였다.”『화엄경』
“만약 어떤 사람이 경전을 사경하고 수지 해설하면 대원을 성취한다.”『법화경 법사공덕품』
지금까지 전해지는 많은 경전에서는 사경(寫經)을 구도와 신심의 극치로 가르치며 그 공덕을 이렇듯 높이 찬탄하고 있다.

사경은 4세기 말 무렵부터 인도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널리 알리기 위해 가르침을 옮겨 쓰면서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처음 사경이 시작됐을 당시에 경전을 옮겨 쓴 곳은 종이가 아니라 종려나무 껍질인 패엽(貝葉)이었다. 따라서 패엽에 범어로 불법을 기록한 것을 패엽불전(貝葉佛典)이라고 했고, 이것이 불교사에 있어서 사경의 시초라 할 수 있다.
불법을 널리 알리기 위해 시작된 사경은 불교 전래와 때를 같이하는 것으로 보는 게 보편적 견해다. 때문에 국가·사회적으로 불교를 공인하기 이전부터 사경이 있었던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에 따라 우리나라에서의 사경은 고구려에 불교가 전래한 시기와 때를 같이하는 것으로 볼 수 있고, 그 연대는 최소한 4세기 후반이 된다.

문헌상 첫 사경은 526년 백제서

 
754년 제작된 대방광불화엄경 변상도.

문헌에 따르면 『조선불교통사』에 “백제 성왕 4년(526) 겸익이 인도에서 범문을 공부하고 인도 승려와 함께 범본 경전을 갖고 귀국했으며, 이때 왕이 이를 맞아 흥륜사에 안치하고 국내 고승 28명을 불러들여 경과 율 72부를 번역하도록 했다”고 언급한 것이 사경에 대한 첫 기록이다. 백제의 사경에 대한 기록이며 백제를 비롯해 고구려와 신라 등 삼국시대에 이미 범문 경전의 한역 사경이 이루어졌음을 유추할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또한 기록상 최초의 사경이 이루어진 사찰을 나타낸 것이기도 하다.

현재 전해지고 있는 사경 작품으로는 국보 제126호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 가장 오래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다라니경의 출간연대는 700년대 초에서 751년 사이로 추정하고 있으며, 인쇄본인 점을 감안할 때 사경연대는 이보다 앞서는 것이 분명하다. 다라니경은 두루마리 1축으로 너비 약 8cm, 전체 길이 약 620cm로 경문은 한 폭에 55∼63행이며 한 행에 7∼9자씩 씌어 있다. 연대를 700년대 초로 추정하는 이유는 당나라 측천무후가 집권한 15년 동안 주로 통용되다가 자취를 감춘 신제자(新制字)가 이 경문 속에서 발견됐기 때문이다. 따라서 최소한 석가탑 건립연대인 751년 이전에 제작된 것이라는 설명이 가능하다.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 인쇄된 시기를 751년 이전으로 볼 경우 지금까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인경(印經)으로 알려진 일본의 백만탑다라니경(百萬塔陀羅尼經·770년 인쇄)보다 20년이나 앞서게 된다. 때문에 지금도 중국에서 인쇄된 것이라고 주장하는 중국학자들까지 포함해 한·중·일 삼국간에 인쇄술의 선후를 놓고 마치 보이지 않는 전쟁을 하듯 이견이 팽팽한 것이 사실이지만 우리나라 학자들은 대부분 751년 이전 제작에 무게를 두고 있다.

무구정광대다라니경 인쇄본은 제작 연대가 표기되지 않아 그 연원을 정확하게 알 수 없는 가운데 정황상의 근거를 들어 가장 오래된 사경 작품으로 꼽히고 있다. 그러나 실제 사성 연도가 확실하게 밝혀진 가장 오래된 사경은 통일신라시대 작품인 국보 제196호 신라 백지묵서 『대방광불화엄경』이다. 754년에서 755년에 걸쳐 제작된 것으로 확인된 신라 백지묵서 『대방광불화엄경』은 사경의 사성과 관련된 내용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고대사 연구에 있어서도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에 오랜 세월 세간의 주목을 받아왔다.

신라 백지묵서 『대방광불화엄경』은 사경을 하게 된 배경을 밝혀 놓은 사성기에 사경 제작과 의식과정이 기술되어 있다. 또 제1축의 표지 그림에 해당하는 신장도와 변상도에 해당하는 보살도는 자색지에 금니와 은니로 그렸고, 그 기법이 뛰어나 이미 이 시기 이전에 많은 금·은자 사경이 널리 이뤄졌음을 반증하는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렇다면 한국불교에서 사경의 역사는 어떤 과정을 거쳐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을까.

대방광불화엄경이 연대 확인된 최고

불교가 처음 전래된 고구려에서 그 시원을 찾을 수 있다. 불법을 널리 알리는 근간이 되는 것은 경전의 보급이고, 인쇄술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기에 경전의 보급을 위해서는 사경이 불가피했다. 따라서 소수림왕 2년(372)에 불교가 전래되면서 사경이 빈번하게 이루어졌을 것이라는 점은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다. 자료에 따르면 고구려 시대에 제작된 사경 가운데 ‘백지금니 묘법연화경’이 현재 북한에 전해지고 있다. 이것이 사실일 경우 고구려가 멸망한 668년 이전에 고구려에서 금·은자 사경이 이루어졌음을 확인할 수 있게 되는 것. 그러나 아직 실존 여부가 확인되지 않았다.

고구려보다 불과 몇 년 늦게 불교를 받아들인 백제에서는 『조선불교통사』 기록에 이어 또다른 기록에서도 사경이 활발하게 진행됐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는 대목이 눈에 띈다. 『삼국사기』와 『백제본기』 등에 따르면 “성왕 19년(541)에 사신을 양 나라에 보내 『열반경』등 경서의 해설서와 공장(工匠), 화사(畵師) 등을 청하자 보내주었다”는 기록이 있다. 당시 양 나라는 황제임에도 보살로 불리기까지 했던 무제로 인해 불법홍포와 역경사업을 활발히 전개하던 시기였고 사경, 특히 금자 사경이 활발했던 때였다. 이와 관련 한국사경연구회 김경호 회장은 『한국의 사경』에서 “양 나라의 불교문물을 받아들였던 백제에서도 그 영향으로 금·은자 사경 기법이 전래되고 활성화됐을 개연성이 크다”고 설명하고 있다.

고구려나 백제에 비해 불교 공인이 늦었던 신라에서는 진흥왕 26년(565)에 진 나라에 유학한 명관 스님이 사신과 함께 돌아오면서 불경 2700(혹은 1700)권을 가져왔다는 기록이 불경 전래를 언급한 첫 대목이다. 이후 신라에서는 불경의 전래가 빈번하게 이루어졌고 불사리(佛舍利)의 수량과 이운에 한계가 생기면서 사경신앙이 발달하기 시작했다.

신라에서의 사경에 대한 구체적 기록은 『해동고승전』에 나타난다. 『해동고승전』은 “진평왕 42년(620) 안홍법사가 서역 및 중국 승려들과 함께 당으로부터 귀국해 황룡사에 머물며 『전단향화성광묘여경』을 번역했는데, 이때 신라 승려 담화가 그것을 받아썼다”고 전하고 있다.
이 기록은 신라에서 처음으로 사경이 이루어진 사찰과 사경을 했던 인물이 등장하는 것이어서 눈길을 끌고 있다. 특히 이 기록에 등장하는 승려 담화(曇和)는 우리나라에서 사경을 했던 인물이 구체적으로 나타난 첫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김 회장은 이를 “이 무렵 사경에 대한 지식을 갖춘 경필사들이 존재했었을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한 대목”이라고 분석했다.

754년 제작된 대방광불화엄경 백지묵서.

통일신라시대를 거쳐 고려시대는 일반적인 불교문화가 그랬듯이 사경 역시 크게 발전한 시기였다. 고려 3대 왕 정종 원년인 946년에 국왕의 발원으로 은자대장경이 사성되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고, 명종 11년(1181)에는 국가적인 차원의 지원을 받는 사경원(寫經院)이 설치되기도 했다. 이는 명실상부한 국가의 독립기관이라는 점에서 그 발전정도를 가늠할 수 있는 사례이기도 하다.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사경에 사용하는 각각의 재료에 따라 전문적으로 사경을 하는 3대장소(三大藏所)라 해서 사경원(寫經院), 금자원(金字院), 은자원(銀字院) 등을 둘 정도로 사경은 국가적 사업으로 인정받기까지 했다. 뿐만 아니라 충렬왕 이후에는 금은자 사경 기법이 절정에 달하면서 수 차례에 걸쳐 사경승이 원나라에 파견돼 금은자대장경을 사경하고 돌아오기도 했다.

기록에 나타난 첫 사경승은 담화

사경은 숭유억불 시기였던 조선시대 초까지도 명맥을 이었으나, 조선 문종 때 세종대왕을 추념하기 위해 『묘법연화경』, 『지장경』 등 여러 경전을 금니로 사경하도록 했다는 기록 이후 이렇다할 흔적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쇠락했다. 다만, 조선 후기 피로 쓴 자혈(刺血)사경에 관한 기록과 유물이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는 점이 특이하다. 자혈사경은 수행과정에서의 고행으로 풀이되기도 한다.
사경은 깨끗한 종이에 경문을 한 자 한 자 쓰는 과정에서 한 글자를 쓰고 한번 절하는 것으로 수행을 삼았을 정도로 옛 부터 수행법의 하나로 여겨지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경을 옮겨 쓰면서 자연스럽게 경전 공부를 하게 되고, 서원을 세워 사경을 함으로써 기도가 되고 참회가 되기도 했다. 따라서 신앙과 수행을 겸비한 수행법이라고 할 수 있다.

심정섭 기자 sjs88@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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