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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한국불교 최초]17. 사리(舍利)

기자명 법보신문

549년 신라 구법승 각덕이 양나라서 첫 이운

 
황룡사터에서 출토된 자장율사 이운 진신사리

석가모니 부처님이 열반에 들자 제자들은 스승의 유훈에 따라 다비를 했고, 이때 다량의 유골을 수습했다. 이 유골이 바로 불교 역사에 등장하는 첫 번째 사리이며, 당시 8개 부족의 부족민들은 진리를 설파했던 부처님의 사리를 차지하기 위해 전쟁도 불사하겠다는 각오로 사리 쟁탈전(?)에 나섰다.

자비사상과 생명의 소중함을 강조했던 부처님의 사리를 놓고 전쟁이라도 일어날 듯한 일촉즉발의 상황이 연출된 자체가 아이러니이긴 하지만, 저마다 부족의 정신적 지주이자 삶의 지혜를 가르쳐준 스승의 흔적이라도 간직해야겠다는 마음이 앞섰기 때문에 그만큼 간절하기도 했다. 이때 드로나(Drona)라고 하는 스님이 이들 8개 부족간 다툼을 말릴 중재자를 자임하고 나섰다. 그는 불사리(佛舍利)를 모두 단지 안에 넣고 하나씩 꺼내 정확하게 8등분한 다음 이를 8부족이 골고루 나누어 갖도록 했다. 각각의 부족들은 이 사리를 이운해서 자기 부족의 영토에 탑을 세워 사리를 안치했고, 현대 학자들은 이 일을 사리팔분(舍利八分) 또는 분(分)사리로 설명하고 있다.

 
백제 왕흥사터에서 발굴된 사리함

따라서 사리신앙은 이때부터 싹트기 시작했고, 불탑의 기원 역시 여기서 찾는 것이 타당하다는 게 일반적 견해다. 그런데 여기서 당시 나눈 사리가 8등분이 아니라 9등분이라는 설도 제기되고 있다.

진흥왕이 흥륜사에서 직접 맞아

물론 역사적으로 명확하게 증명되지는 않았다. 불사리의 9등분 설은 드로나 스님이 단지 안에 몰래 꿀을 발라놓았고, 사리를 나눌 때 작은 조각들이 꿀에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는 것. 따라서 드로나가 고향에 돌아가 불사리를 넣었던 단지를 봉안해 병탑(甁塔)을 세웠고, 이 단지 안에 사리가 있었기 때문에 9등분이라는 주장이다. 이 주장대로라면 역사상 최초의 사리기는 다름 아닌 꿀단지가 되는 셈이다.

이후 최초로 인도를 통일한 마우리아 왕조의 아쇼카왕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유골을 모두 발굴해서, 통일 왕조의 번영을 발원하며 영토 곳곳에 무려 8만 4000기의 탑을 세웠다. 때문에 사리는 탑을 세우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필요조건이 되었고, 사리 봉안은 탑의 존재 이유가 되었다. 이런 이유로 중국에 불교가 전래된 이후 많은 중국 스님들이 탑을 세울 목적으로 사리를 찾아 인도로 향하기도 했다.
부족간 전쟁 위기까지 불러왔던 부처님의 사리는 1898년 부처님 탄생지인 카피라바스투에서 13km 정도 떨어진 피푸라와에서 처음 발견됐다. 이때 발견된 사리를 담은 사리병 뚜껑에 새겨져 있는 각문 해석을 통해 부처님의 사리로 판명된 것. 이것이 최초의 부처님 사리 발견이다.

 
왕흥사 사리함 몸통에 새겨진 명문

사리신앙 역시 불교전래 경로를 따라 인도에서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로 전해졌다. 한국불교에 사리가 전해진 첫 기록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 찾을 수 있다. 고서(古書)에서는 “진흥왕 10년(549) 봄 양 나라가 신라 구법승 각덕이 귀국하는 길에 사신 심호를 파견해 불사리를 보내오므로 왕이 백관과 함께 흥륜사 앞길에 나가 맞아들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후 576년에 안홍이 중국 진나라에서 불사리를 갖고 돌아와 봉안했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나타난다.

조선말기 허훈이 지은 좥금당탑기좦에 따르면 이렇게 중국에서 들여온 사리는 신라 진평왕 4년(582) 대구 동화사에 1200과가 안치됐고, 나머지 사리 또한 여러 사찰에 나누어 봉안했다. 동화사에 안치된 사리는 863년 경문왕이 석탑을 세워 다시 봉안했다. 이어 이 탑은 876년 지금의 동화사 금당선원 앞으로 옮겨졌으며 당시 경문왕이 봉안한 불사리를 담았던 사리구가 1958년 발견돼 ‘민애대왕 사리호’로 불리고 있다.
신라에서는 이후에도 중국에서 불사리를 이운해 왔고, 선덕여왕 12년(643) 자장 율사가 당나라에서 들여온 사리는 오늘날 한국불교에서도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자장은 당나라에서 참선 수행하던 중 문수보살을 만나 불정골(佛頂骨)과 치아사리 등 불사리 100과와 부처님의 옷(가사·비라금점(緋羅金點)) 한 벌을 가지고 돌아왔다. 그리고 이 불사리를 셋으로 나눠 황룡사탑과 태화사탑, 통도사 금강계단에 안치했으며, 가사는 통도사 금강계단에 사리와 함께 봉안했다.

자장 이운사리, 황룡·통도사 안치

이 가운데 황룡사탑에 안치한 사리는 황룡사지 발굴과정에서 출토됐으며, 통도사 사리와 함께 현재까지 역사적 근거가 명확한 가장 오래된 진신사리로 평가받고 있다. 자장 스님이 통도사에 봉안한 사리는 임진왜란 때 왜군이 약탈해 간 것을 이후 사명대사가 일본에 건너가 되찾아 오는 등 수난을 겪기도 했다. 사명대사는 일본에서 되찾아온 사리를 본래의 자리인 통도사 금강계단에 다시 봉안했고, 이 중 12과를 금강산 건봉사와 대구 용연사에 나눠서 안치했다.

신라에서는 자장 율사 이후 문성왕 13년(851) 원홍이 중국에서 치아사리를 가지고 왔다. 따라서 549년을 시작으로 576년, 643년, 851년 등 네 차례에 걸쳐 중국에서 신라로 불사리가 전해졌으며, 이들 사리는 신라의 삼국통일 이후 전국에 불탑이 세워지면서 곳곳에 나눠 안치됐다.
삼국시대 신라뿐만 아니라 고구려와 백제에도 사리가 전해졌다. 중국 당나라 도선이 편찬한 『광홍명집』권 17 경사리감응표에는 “신라, 고구려, 백제의 사신이 각각 본국에 가져가 탑을 세워 봉안할 사리 1매씩을 청하니 황제가 조서를 내려 이를 모두 허락했다”는 기록이 있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헌상 고구려와 백제의 사리신앙을 알려주는 직접적 기록이 특별하게 남아 있지 않았으나, 지난해 왕흥사터 발굴조사 과정에서 사리관련 명문이 발견돼 백제의 사리신앙을 재조명할 수 있게 됐다.

백제의 경우 그동안 588년 위덕왕 35년 일본에 불사리를 전했다는 기록이 전부였다. 그러나 2007년 10월 왕흥사터 발굴 과정에서 발굴한 사리장엄구에서 당시 사리가 전해졌음을 알 수 있는 명문이 발견된 것. 왕흥사터에서 발굴된 금동, 은, 동 등 삼중으로 된 완전한 형태의 금동사리함 몸통에는 ‘정유년 2월 15일 백제왕창 위망왕자 입찰 본사리이매 장시 신화위삼(丁酉年 二月 十五日 百濟王昌 爲亡王子 立刹 本舍利二枚 葬時 神化爲三:정유년 2월 15일 백제왕 창이 죽은 왕자를 위하여 절을 세우고 본래 사리 2매를 묻었을 때 신의 조화로 셋이 되었다)’이라고 새겨져 있다.
이 명문에 새겨진 백제 창왕은 위덕왕을 말하고 정유년은 위덕왕 재위 24년으로 577년에 해당한다. 또한 사리 2매가 신의 조화로 3매가 되었다는 내용은 이미 사리신앙의 기틀이 형성됐었던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 명문 기록은 백제의 사리신앙을 직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첫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삼국시대에 널리 퍼졌던 사리신앙은 고려와 조선시대까지도 그대로 이어졌다. 특히 조선시대에는 일반적으로 억불시대를 맞아 불교가 쇠퇴기에 접어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리신앙만큼은 오히려 더 강했다는 주장이 나올 정도로 많은 기록이 전해진다. 대표적인 것이 태조 이성계가 서울 흥천사에 사리각(舍利閣)을 지어 사리를 봉안한 내용이다. 또 세조실록에서는 세조가 양평 용문사, 남양주 수종사, 양양 낙산사 등 여러 곳에 사리탑을 건립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기도 하다.

백제 최초는 577년 왕흥사 기록

이후 근현대 들어 부처님의 진신사리와 관련한 이야기는 언론에 등장할 만큼 주목을 받기도 했다. 우리나라 언론에 불사리 관련 기사가 처음 등장한 시기는 1913년이다. 좥매일신보좦 1913년 10월 5일자에서는 ‘석가불 사리 봉안식’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인도 고승 달마파라가 귀국 전에 석가모니불의 사리를 조선승려대표에게 전했고, 당시 대표였던 이회광이 스님들과 협의를 거쳐 각황사(지금의 종로 조계사)에서 장엄하게 봉안식을 거행하기로 했다’는 내용을 전했다. 기사에 따르면 이때 3일 동안 일반에 사리를 공개했으며 하루 300∼400명이 참배했을 정도로 사리에 대한 관심이 높았다.

이어 동아일보 등은 1930년 9월 15일자에서 “시내 수송동 각황사에서 14일 정오에 세존사리칠층탑의 낙성식을 거행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현재의 조계사 진신사리 7층 석탑에 봉안돼 있는 부처님 진신사리는 기록상 남방으로부터 직접 전해진 최초의 사리라고 할 수 있다.

사리는 범어의 사리라(Sarira)를 소리나는 대로 한자로 옮겨 적은 것으로 일반적으로는 부처님의 유골을 뜻하는 진신사리(眞身舍利)와 부처님의 가르침과 정신이 깃든 불경을 이르는 법신사리(法身舍利)로 구분해 부른다. 우리나라에서는 고승이 입적한 후 다비를 통해 수습한 사리를 승사리(僧舍利)라 부르고 있다. 사리신앙은 이처럼 부처님의 유골을 수습한데서부터 유래해 오늘날까지 이어지면서 그 자체가 신앙의 대상으로 여겨지고 있으나, 현재 한국불교 일부에서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진신사리가 곳곳에 출현해 ‘가짜 논란’이 일기도 한다.

심정섭 기자 sjs88@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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