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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한국불교 최초]18. 적멸보궁(寂滅寶宮)

기자명 법보신문

자장 율사가 643년 지은 통도사·상원사가 최고

 
우리나라에서 상원사와 더불어 가장 먼저 지어진 통도사 적멸보궁과 금강계단.
 
불상을 봉안하는 대신 창 밖으로 사리탑을 볼 수 있도록 한 사자산 법흥사 적멸보궁.

이 땅의 불국토를 염원하며 처음으로 적멸보궁을 지은 자장율사는 통도사에  “만대의 전륜왕, 삼계의 주인, 쌍림에 열반하신 뒤 몇 천추던가 진신사리 오히려 지금도 있으니 널리 중생의 예불 쉬지 않게 하리”라는 불탑게(佛塔偈)를 남겨 훗날에도 진신사리를 예경하는 불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을 것임을 예언했다.

신라시대 왕손인 무림공 김씨의 아들 김선종은 사람들을 두루 아우르는 덕을 지니고 있어 많은 이들의 신망이 두터웠다. 때문에 선덕여왕이 조정에 등용시켜 국사를 논할 인물로 꼽았으나, 이를 마다하고 불법을 구하기 위해 당나라 유학길에 올랐다. 이 인물이 바로 643년 사리를 들여와 이 땅에서는 처음으로 적멸보궁(寂滅寶宮)을 짓고 곳곳에 사리탑을 세워 한국불교에 사리신앙을 크게 불러일으킨 자장율사다.
자장 스님은 당나라 유학 후 오대산 동대(東坮)에서 수 십 여일 동안 용맹정진하며 깨달음을 얻었다. 그러던 어느 날 꿈에 한 스님이 나타나 “묘법을 배우고자 하면 반드시 북대(北坮)에 올라 문수보살을 찾아보시오”하고는 사라졌다. 자장은 꿈이 바로 눈앞에서 벌어진 일만 같이 생생한 것이 예사롭지 않아 곧바로 북대의 운제사(雲際寺)로 가서 제석천이 세웠다고 하는 문수보살상 앞에서 정진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정진을 시작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실제 문수보살(일설에서는 범상치 않은 스님으로 표현)을 친견하게 된다. 이때 정진 중인 자장 앞에 나타난 문수보살은 “분명히 알아라. 모든 법이 그 바탕은 본디 없다. 이와 같이 법의 성품을 이해한다면 바로 노사나불을 보리라”는 게송을 들려주었다. 이어 “부처님의 가르침을 구하고자 한다면 이 게송보다 나은 것이 없다”며 비단 바탕에 금실로 수를 놓은 가사 한 벌과 패엽경 다섯 점, 진신사리 100과를 비롯한 부처님의 정골사리와 지골사리, 치아사리 등을 전해주었다. 그리고 “이 사리들은 모두 세존의 신물이니 삼가 보호하였다가 본국에 돌아가거든 명승처에 나누어 모셔 나라를 복되게 하고 세상을 편안케 하라”며 “그대를 태백산에서 다시 보겠다”는 말을 남기고는 홀연히 자취를 감추었다.

이같은 소식은 곧 당나라 스님들에게 전해졌고, 당의 스님들은 귀중한 보배가 해동으로 옮겨가는 것을 막기 위해 이 신물을 빼앗으려는 음모를 꾸몄다. 하지만 자장은 이를 알고 이들 모르게 서해에 배를 띄웠다. 그러자 이번에는 용왕이 자장에게 예배·공양하고 수많은 마노석을 배에 실어 울진포까지 운반한 후 신통력을 발휘해 마노석을 모두 태백산에 옮겨놓았다. 이 마노석은 훗날 자장이 이곳에 암자를 세우고 탑을 세우는데 사용했으며, 현재 태백산 정암사 수마노탑이 바로 그때 세워진 탑이다.

물론, 이 이야기는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기보다는 여러 경로를 통해 전해지는 이야기 가운데 가장 드라마틱한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뿐만아니라 자장 스님이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얻고 귀국해 적멸보궁을 짓고 사리탑을 세운 일화는 보궁이 있는 사찰의 역사나 각종 자료에서 동일하게 나타나지 않고 다양하게 전해지고 있어 어느 것이 정설이라고 단정 짓기에는 무리가 따르는 것도 사실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자장율사에 의해 처음 지어진 적멸보궁. 이 적멸보궁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은 후 최초의 적멸도량회(寂滅道場會)를 열었던 중인도 마가다국 가야성의 남쪽 보리수 아래 금강좌에서 유래를 찾을 수 있다. 『화엄경좭에서는 깨달음을 얻은 부처는 처음 7일 동안 시방세계 불보살들에게 『화엄경좭을 설법하기 위한 해인삼매의 선정에 들었고, 이때 그 주위에 많은 불보살이 모여 부처의 덕을 칭송하였으며 부처는 법신인 비로자나불과 한 몸이 되었다. 따라서 적멸보궁은 본래 낮은 언덕모양의 계단(戒壇)을 쌓고 불사리를 봉안함으로써 부처님이 항상 그곳에서 적멸의 법을 설하고 있음을 상징하던 곳이라 할 수 있다.

석가모니의 적멸도량회서 유래

이에 따라 진신사리는 부처님과 동일한 신물로 여겨져 부처님 열반 이후 불상이 조성되기 전까지는 가장 경건한 숭배의 대상이 되었고, 그 마음은 불상이 조성되기 시작한 이후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따라서 적멸보궁(寂滅寶宮)은 글자 그대로 부처님이 열반에 들어 항상 머물러 있는 보배로운 궁전이다. 또한 부처님의 진신을 모신 것을 상징하는 곳이기 때문에 법당에 별도로 불상을 봉안하지 않고 불단만 있는 것이 적멸보궁의 외형적 특징이다. 그리고 부처님의 진신사리는 적멸보궁 바깥쪽에 사리탑을 세우거나 계단(戒壇)을 만들어 봉안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따라서 적멸보궁 안에서 방석이 놓여진 뒤쪽에 창이 있는 경우 그 창을 통해 사리탑이나 계단을 볼 수 있도록 했다.

현재 한국불교에서 적멸보궁이라는 편액을 붙여 놓은 전각은 본래 진신사리를 예배하던 장소로 마련된 곳이며, 초기에는 사리를 모신 계단을 향해 마당에서 예배했으나 예배하는 불자들의 편의를 위해 전각을 짓게 된 것이 오늘날의 모습이다.
한국불교에 사리가 처음으로 전해진 것은 549년 신라 구법승 각덕 스님에 의해서다. 각덕은 양나라에서 처음으로 사리를 들여왔고, 이로 인해 우리나라에서도 사리 신앙이 싹트기 시작했다. 그러나 적멸보궁을 짓기 시작한 것은 자장 스님이 당나라에서 사리를 이운해온 이후부터였다. 이때 자장 스님은 문수보살의 뜻에 따라 진신사리를 나누어 양산 통도사, 오대산 상원사, 설악산 봉정암, 태백산 정암사, 사자산 법흥사에 각각 사리를 안치하고 적멸보궁을 지어 백성들이 참배하고 예경할 수 있도록 했다. 현재 이들 적멸보궁은 5대 적멸보궁으로 불리며 불자들의 참배 행렬이 끊이지 않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적멸보궁 가운데 가장 먼저 지어진 곳은 어디일까.
사실 자장 스님이 귀국한 이후 문수보살의 말을 따라 곳곳에 사리를 안치하여 백성들이 참배토록 했고 그 과정에서 보궁을 지었던 것이기 때문에 적멸보궁의 선후에 그리 큰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기록에 따르면 5대 보궁을 동시에 지었던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약간씩의 차이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안계현, 이홍식, 김흥삼 등의 학자들은 사리신앙과 한국불교를 다룬 각각의 논문을 통해 자장이 먼저 왕에게 건의해 황룡사에 9층탑을 세우고 사리를 봉안했다고 쓰고 있다. 그리고 오대산 중대에 사리를 안치하였고, 태백산 정암사, 양산 통도사, 설악산 봉정암, 영월 사자산 법흥사에 사리탑을 건립했다고 전하고 있다.

통도사 금강계단엔 부처 가사도 안치

오늘날 적멸보궁의 대명사처럼 알려진 곳은 통도사다. 통도사 적멸보궁은 금강계단(金剛戒壇)이라고도 하며, 이 금강계단은 자장이 황룡사 9층탑에 사리를 봉안할 때와 같은 시기에 이곳에 가사와 사리를 안치해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금강은 금강석을 의미하는 것으로, 모든 번뇌와 상상과 미혹의 뿌리를 깨뜨릴 수 있는 반야의 지혜를 금강석에 비유하기도 한다. 통도사 대웅전 주련에는 금강계단을 만든 자장율사의 불탑게가 남아 있다. 자장은 “만대의 전륜왕, 삼계의 주인, 쌍림에 열반하신 뒤 몇 천추던가. 진신사리 오히려 지금도 있으니, 널리 중생의 예불 쉬지 않게 하리”라는 불탑게를 남겨 이곳에 진신사리를 예경하려는 불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을 것임을 밝혀놓았던 것. 그러나 가사와 사리를 봉안한 금강계단의 설치 연대를 정확하게 밝힌 자료가 없는 점이 아쉽다.

오대산 상원사 적멸보궁(강원유형문화재 28)은 불사리를 안치한 정확한 장소를 알 수는 없으나, 전각 뒤쪽 작은 언덕에 부처님의 정골사리를 모셨다는 기록이 있는 ‘세존진신탑묘’가 상징적으로 서 있다. 그리고 상원사 적멸보궁은 선덕여왕 12년(643)에 자장이 당나라에서 가져온 석가모니의 정골사리를 묻기 위해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이곳의 적멸보궁은 오대산의 다섯 봉우리인 비로봉, 호령봉, 상왕봉, 두루봉, 동대산의 봉우리들이 모여 연꽃의 형상을 하고 있는 그 가운데에 자리잡고 있다.

봉정암 적멸보궁은 자장이 선덕여왕 13년(644)불사리를 봉안할 곳을 찾아다니던 중 어디선가 찬란한 오색 빛과 함께 날아온 봉황이 인도해서 찾은 곳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스님이 봉황을 따라 한참을 가던 중 바위가 병풍처럼 둘러쳐진 곳에 이르렀고, 봉황이 한 바위 꼭대기에서 사라지자 ‘바로 이곳’이라는 마음에 부처님 사리를 모실 인연처로 생각하여 탑을 세우는 한편 부처님의 사리를 봉안하고 조그만 암자를 건립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마노석으로 세운 정암사 수마노탑.

그리고 자장 스님이 중국 오대산에서 사리를 갖고 오는 일화 가운데 가장 드라마틱한 내용에 등장하는 마노석으로 세운 수마노탑(보물 410호)이 있는 곳이 정암사다. 정암사 사적에는 정관 10년(645)에 창건한 것으로 나타나 있으며, 『삼국유사』에서도 자장 스님에 의해 창건한 사찰로 기록되어 있다. 이곳은 다른 보궁이 적멸보궁 네 글자를 새긴 것과 달리 편액에 적멸궁이라는 세 글자만 적혀 있다. 적멸보궁의 기둥에 걸린 주련에는 『법화경』「여래수량품」의 게송 12구절이 적혀있다. 또한 1972년 수마노탑 중수 과정에서 탑의 각 부에서 다섯 매의 탑지와 사리 장치가 발견돼 불자는 물론 세간의 관심을 한 몸에 받기도 했다.

사자산 법흥사에는 진신사리가 안치된 보탑과 자장이 도를 닦았던 토굴이 있다. 자장이 마지막으로 창건해 진신사리를 봉안하고 보궁을 지은 곳으로 당시에는 흥녕사로 불렸다. 선문구산 중 사자산문의 중심도량이었던 이곳은 소실되고 중건하기를 반복했으며 1902년 비구니 대원각 스님이 중건하면서 절 이름도 지금의 법흥사로 부르기 시작했다.
현재 한국불교에는 이들 5대 적멸보궁 이외에도 비슬산 용연사, 사천시 다솔사 등 여러 곳에 보궁이 있으나 오랜 역사를 간직한 5대 적멸보궁은 그 격을 달리하며 불자들의 예경 대상이 되고 있다.

심정섭 기자 sjs88@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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