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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한국불교 최초]19. 순교자(殉敎者)

기자명 법보신문

이차돈, 527년 순교로 신라에 불법홍포 길 열다

 

문화체육관광부가 정한 이차돈 표준 영정(위)과 고려 말 나옹혜근의 진영.

“참수할 때 목 가운데서
흰 젖이 한길이나 솟구치니
하늘에서는 꽃비가 내리고
땅이 뒤흔들렸다.
사람과 만물이 슬피 울고
동물과 식물이 동요하였다.
길에서 곡소리가 이어졌고
우물과 방앗간에서
인적이 끊겼다.”
- 헌덕왕 9년(817) 세운  이차돈 순교비에서 -

신라의 스물 세 번째 임금 법흥왕이 왕위에 오른지 14년(527)째인 어느날 양나라 무제가 향을 보내왔다. 불교가 전파되지 않았기에 향의 쓰임새를 모르던 법흥왕은 군신들을 모아놓고 “이것이 무엇에 쓰는 물건이냐”고 물었으나, 그 누구도 이것이 무엇이며 어디에 사용하는 물건인지 알지 못했다. 모두가 고개만 갸웃거리던 차에 미관말직의 사인(舍人) 신분이던 이차돈이 나서 모례의 집에 이를 알만한 인물이 있을 것이라고 고했다.

이에 법흥왕은 신하를 모례의 집에 보냈고, 이때 모례의 집에 기거하던 묵호자(혹은 아도)가 신하와 함께 입궁했다. 당시 법흥왕의 딸이 병중에 있었음을 알고 있던 묵호자가 향을 사르고 경전을 독송하자 거짓말같이 공주의 병이 나았다. 이후로 법흥왕은 자연스럽게 불교를 마음속에 담아두게 되었고, 때마침 귀족들을 통솔할 새로운 이데올로기의 필요성을 강하게 느꼈던 왕은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국민들의 뜻을 하나로 모아 나라의 안녕을 추구할 것을 다짐하기에 이르렀다.

법흥왕, 고심 끝에 순교 허락

그러나 국사에 깊이 관여해온 군신들의 반대가 완강하기 그지없었다. “우리나라에도 명신(明神)이 있는데 왜 낯선 객신을 불러들여 나라 일을 그르치고 민심을 어지럽게 하려 하느냐”는 것이 군신들의 주장이었다. 군신들이 이처럼 강하게 반발하고 나선 이면에는 기득권 상실에 대한 우려가 있었음은 물론이다.
그때 다시 이차돈이 나섰다. 이차돈은 지증왕의 생부인 습보갈문왕의 후예이기는 했으나, 기득권 세력이 아니었기에 정치적으로 잃을 것이 없는 위치에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미 마음속으로 불교를 받아들여 불심이 깊었고 모례의 집에 묵호자가 있었음을 알고 있었던 그는 지금이 신라 땅에 불교를 전파할 수 있는 좋은 기회임을 확신했다.

 
이차돈 순교장면을 묘사한 순교비.

왕 앞에 나간 이차돈은 “옛 사람들은 꼴을 베고 땔나무를 하는 비천한 사람에게도 계교를 물었다고 하니 신 또한 죄를 무릅쓰고 아뢰옵니다. 임금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은 곧 백성의 곧은 의리이기도 합니다. 왕께서 제게 거짓을 꾸몄다는 죄를 물어 목을 베시면 만민이 굴복하여 왕의 말씀을 어기지 못할 것입니다”라며 불교를 전파하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바치겠다는 뜻을 밝혔다.
그러나 이미 부처님 가르침을 접한 왕으로서는 산 사람의 목숨을 해하면서까지 불법을 전파할 수 없다는 신념이 있었기 때문에 쉽게 허락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차돈 역시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모든 것 중에서 가장 버리기 어려운 것이 목숨이지만 소신이 저녁에 죽어서 아침에 불법이 일어난다면, 불교가 융성하고 임금께서는 길이 편안하실 것”이라며 불법의 흥행은 물론 국가의 체제 확립과 안녕을 위해서도 필요한 일임을 충심으로 간청했다.

법흥왕이 고심에 고심을 거듭하다 마침내 이를 허락하자, 이차돈은 당시 귀족들이 자신들이 명신이라 믿는 토착신앙의 성지로 신봉하던 경주의 울창한 숲 천경림으로 달려가 나무를 베고 절을 짓기 시작했다. 이차돈이 왕명을 받아 천경림에 절을 짓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귀족들과 군신들은 당장 임금에게 달려가 이 일을 따져 물었다. 그러나 이미 이차돈과 입을 맞춘 법흥왕은 “그런 명을 내린 적이 없다”며 이차돈을 잡아들여 목을 베도록 했다.
형장에 끌려나온 이차돈은 합장한 채 “불법을 일으켜 만백성을 일으키기 위해 이 몸을 버리오니 시방삼세 모든 부처님께서는 이 일을 증명하시고 큰 영험을 내려 불법이 흥행토록 해주십시오”라는 기원을 마치고 죽음을 맞았다.

수많은 군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이차돈의 목이 베어지는 순간, 갑자기 맑은 하늘에 천둥이치고 해가 사라져 빛을 잃으면서 천지가 크게 진동했다. 이어 하늘에서는 꽃비가 내리고 머리를 잃은 목에서는 흰 젖이 한길이나 솟아올랐으며 잘려나간 머리는 멀리 날아가 경주 북쪽의 금강산 꼭대기에 떨어졌다. 이 모습을 지켜본 수많은 군중들은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신비로운 이적(異蹟)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고, 이차돈의 참형을 주청했던 귀족과 군신들은 두려움에 떨며 의관이 흠뻑 젖어들 정도로 진땀을 흘려야만 했다.

불교를 배척해온 신라 땅에 불법이 널리 퍼지기를 서원하며 스스로 죽음을 맞아들인 이차돈은 이렇게 죽었고, 이는 곧 공식적으로 알려진 한국불교사상 첫 순교(殉敎)이다. 따라서 이차돈은 『삼국사기』,『삼국유사』등 옛 기록에 그 죽음 과정이 자세하게 나타난 첫 번째 순교자인 셈이다.
이차돈이 순교할 때의 장면은 헌덕왕 9년(817)에 세운 이차돈 순교비에도 “참수할 때 목 가운데서/ 흰 젖이 한길이나 솟구치니/ 이때 하늘에서는 꽃비가 내리고/ 땅이 뒤흔들렸다./ 사람과 만물이 슬피 울고/ 동물과 식물이 동요하였다./ 길에서 곡소리가 이어졌고/ 우물과 방앗간에서 인적이 끊겼다.”고 새겨져 있어 그 역사적 사실성을 뒷받침하고 있다.

이차돈 앞서 고구려 정방스님 참형

이 순교비는 1927년부터 경주국립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으며, 높이 1.04m에 몸체는 육각기둥 모양이다. 한 면에는 이차돈의 순교 장면을 부조했고, 나머지 다섯 면에 걸쳐 해서체로 그의 사적을 기록하고 있으나 읽을 수 없을 정도로 마멸이 심하다. 또 순교비는 아래쪽에 진동하는 땅을 파도처럼 표현했고 이차돈의 머리가 그 위에 나뒹굴고 있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이차돈은 두 손을 소매 속에 넣어 서있으며 그의 목에서는 기록에서 말하는 흰 젖이 하늘높이 솟아오르고 좌우에 꽃송이가 흩날리는 모습이 새겨져 있다.
법흥왕은 이차돈 순교 다음해에 불교를 공인했고, 이후 백성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왕권을 확립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때부터 짓기 시작한 절은 후대인 진흥왕 5년(544)에 완공해 대왕흥륜사로 명해졌다. 진흥왕은 이어 그해 3월부터 백성들이 출가하는 것을 허락하기에 이르렀다.

이차돈 순교 이후 해마다 그의 기일이면 많은 백성들이 흥륜사에서 추모행사를 가졌으며, 이후 흥륜사는 나라의 안녕을 기원하는 도량으로 자리매김했다. 이곳에 이차돈의 상이 그려져 있었으나, 조선시대 화재로 인해 소실됐고 이후 폐사지로 남아 있었으나 1971년 한 비구니 스님의 원력으로 중창불사가 진행됐다. 그리고 1999년에는 순교 1472주기를 맞아 추모비를 제작하기도 했다. 이처럼 이차돈은 순교 이후 때론 국가적 차원에서, 때론 백성들에 의해 그 뜻을 추모하는 일이 끊이지 않고 있다.
스스로 목숨을 버리는 것은 불교 교리상 맞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불교 역사 속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널리 전하고 융성하게 하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희생하거나 희생당한 이들이 적지 않았던 것 또한 사실이다.

옛 기록에서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는 이차돈의 순교 이전에도 신라 땅에 들어온 고구려 스님들이 참형을 당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니 이차돈이 최초의 순교자라고 단정할 수만은 없다. 다만, 이차돈 이전에 참형을 당한 스님들에 대한 이야기가 자세하게 전해지지 않고, 아도에 관한 이야기를 서술하는 부분에서 언급만 하고 있을 뿐이어서 그 실체를 확인하기 어려울 뿐이다.
『해동고승전』권1 아도전에 아도(阿道)가 일선군에 들어와 신라 최초의 재가불자로 알려진 모례(毛禮)의 집에 들렀을 때, 모례가 아도에게 “지난날 고구려 승려 정방(正方)이 신라에 왔을 때 군신들이 괴상하게 여기고 좋지 못하다 해서 그를 죽였으며, 그 뒤에 들어온 멸구자(滅垢?) 역시 그 전과 같이 죽임을 당했다”고 알려주었다는 대목이 있다. 이차돈이 참형을 당하기에 앞서 이미 정방, 멸구자 등 고구려 스님들이 신라에서 살해당했다는 기록이다.

뿐만 아니라 당시 신라에 들어가려던 고구려 스님들 가운데 상당수가 국경 근처에서 죽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따라서 고구려 스님들의 신라행이 불법 전파를 위한 것이었는지, 고구려의 정치·종교적 상황에 따른 망명이었는지가 먼저 분명하게 밝혀져야 이들의 죽음에 대한 평가도 정확하게 내려질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들 고구려 스님, 특히 정방이나 멸구자가 불법전파를 목적으로 신라에 들어온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는 만큼, 한국불교 역사에서 첫 번째 순교자는 이차돈이 아니라 『행동고승전』에 나타난 정방으로 정정될 가능성 또한 적지 않다.
한국불교에서 스님들의 순교는 고구려 스님들과 이차돈 이후에도 이어졌다. 고려 말기 유생들이 득세하면서 정권유지 차원에서 스님들을 탄압하거나 암살하는 사례가 있었고, 조선시대에는 본격적인 억불정책이 시작되면서 수없이 많은 스님들이 목숨을 잃어야만 했다.

고려 나옹-조선 보우도 죽임 당해

이들 가운데 고려말 나옹혜근은 스승 지공 선사의 유훈을 받들어 회암사를 중창하여 그곳을 중심으로 흥법하려 했으나, 중신들의 시기로 인해 뜻을 펴지 못하고 입적했다. 나옹 스님의 입적과 관련한 일반적 설은 회암사 낙성식에 구름처럼 몰려든 대중을 보고, 불교의 결집과 세력확산을 우려한 중신들의 모략으로 인해 밀양 영원사로 가던 도중 여주 신륵사에서 입적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역사학자들 사이에서는 나옹 스님이 암살당했다는데 무게를 두는 입장이 적지 않다. 동국대 역사교육학과 황인규 교수는 『불교평론』에 기고한 글 ‘한국불교사의 순교승’에서 “정부가 그를 밀양 영원사로 가도록 명을 내렸다. 가는 도중 여주 신륵사에서 입적하였다고 하였으나 사실은 주살되었던 것이다”라고 나옹의 암살을 기정사실화하고 있다. 당시 시대적 상황을 고려할 때 역사학자들의 주장이 더욱 설득력을 얻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고려말 나옹 스님 이후 조선시대 세종, 성종, 연산군, 중종대에서는 폐불을 방불케 하는 억불정책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천태종 승려 행호를 비롯해 설산, 월심, 계엄, 성명, 상금, 설의, 설은 등이 참형을 당했고 해초, 학전, 각돈, 설준 등도 온갖 누명을 쓰고 탄압을 받은 끝에 죽임을 당한 순교자들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훗날 명종은 문정왕후가 죽은 이후 대신들의 주청을 받다들여 허응당 보우를 제주도에 유배했고, 보우 역시 결국 참살 당하고 말았다.
이렇듯 한국불교사에서 순교는 조선시대 억불정책이 이어지는 동안 끊이질 않았고, 온갖 탄압과 생명을 위협받는 위험 속에서도 불법을 전파하겠다는 이들의 위법망구의 정신이 있었기에 오늘날의 불교도 존재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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