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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한국불교 최초] 20. 선원

기자명 법보신문

홍척선사가 828년 개창한 실상산문이 첫 선원

 
지금의 한국불교 선원문화는 성철 스님이 주도한 봉암사 결사로 꽃을 피우게 됐다. 문경 봉암사 전경. 사진=선원총람

중국의 『대동선교고』「사조명」에 “먼 나라의 고사와 이역의 고인들이 험난한 길을 무릅쓰고 법랑 스님이 있는 곳에 모여들었다”고 기록하고 있을 정도로 법(法)의 깊이가 남달랐던 법랑(法郞·632∼?)은 중국 선종 제4조 도신의 법을 이어받아 신라로 돌아왔다. 그러나 아직 시절인연이 닿지 않은 탓에 전법활동을 펼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법랑이 세간에서의 전법의지를 잠시 접고 호거산에 들어가 지혜의 등불을 전하는데 전념하던 어느 날, 신행(信行·704∼779)이라는 비구가 찾아와 제자 되기를 청했다. 제자의 됨됨이를 알아본 법랑은 신행이 문하에든지 7일도 채 되지 않아 시험삼아 이치의 옳고 그름을 묻기에 이르렀다. 이때 신행이 “미묘한 말씀은 그윽히 통하는 것이니 마음에 즉해 있으면서도 마음은 본래 없는 것입니다”라는 답을 내놓자, 법랑은 “참으로 훌륭하다. 마음의 등불인 법이 모두 그대에게 달려 있구나”라며 주저 없이 인가했다.

법랑에 대한 기록이 변변치 않은 상황에서 신행의 업적을 찬한 「신행비」와 「도헌국사 지선의 비문」에 나타난 신행 스님 관련 기록을 근거로 알 수 있는 법랑과 신행의 법거량과 인가 과정은 한국불교에서 첫 번째로 등장하는 선법의 전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법랑의 회상에 얼마나 많은 수행자들이 모여들었고, 어떠한 법을 펼쳤는지에 대한 구체적 자료는 찾을 수 없다.

인도에서 중국을 거쳐 이 땅에 전해진 선법은 숱한 어려움을 겪은 끝에 신라말에서 고려초기에 걸쳐 형성된 구산선문(九山禪門)의 출현으로 비로소 널리 전해지기 시작했다. 그 가운데 가장 먼저 문을 연 곳이 바로 홍척(洪陟) 스님이 828년 지리산 지실사(지금의 실상사)에 개설한 실상산문이다. 따라서 실상산문이 한국불교 최초의 선원이 되는 셈이다.

홍척은 810년에 당나라에 유학했다가 현재의 조계종조인 도의(道義)보다 몇 해 늦은 826년에 귀국했다. 홍척과 도의는 거의 같은 시기에 활약했으나 도의가 아직은 때가 아니라는 생각에 설악산 진전사로 들어간 것과 달리, 홍척은 흥덕왕을 제자로 삼을 만큼 적극적으로 교화에 나섰다. 그 인연으로 왕실의 도움을 받으며 선문을 개설할 수 있었다는 것이 선학 관련 학자들의 주장이다.

도의 선법은 가지산 보림사서 만개

반면에 조계종이 종조로 추앙하고 있는 도의 선사는 784년에 당나라에 유학해 광주 개원사에서 마조의 제자이며 백장과 사형사제지간인 서당지장으로부터 법을 이어받아 헌덕왕 13년(821)에 귀국했다. 당시 서당지장은 도의에게 법을 전하면서 “진실로 법을 전할 만하다면 이런 사람이 아니고 누구에게 전하랴”라면서 칭송을 아끼지 않았고, 백장선사는 “강서의 선맥이 몽땅 동국으로 가는구나”라며 도의의 수행력을 높이 평가했다.

그러나 정작 신라에 돌아와 법을 전하려 했던 도의는 당시 신라 주류 층이 ‘돈오돈수의 선 사상은 경전에 없는 궤변에 불과하다’며 내치자, 선법을 제자인 염거에게 전하고 설악산 진전사로 들어가 입적할 때까지 산문을 나서지 않았다. 때문에 그의 법을 이은 염거의 문하에서 공부한 체징이 859년 가지산 보림사에 선문을 연 이후에야 그 법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한국불교에서 선원은 이처럼 신라 후대 들어 당나라에 유학해 법을 구한 구법승들이 귀국하여 선문을 개설하면서 시작됐다는 것이 정설이다. 도의의 귀국을 전후해서 점차 많은 선승들이 신라로 돌아왔고 산중에 선원을 개설해 당시 중국에서 성행하던 선 불교를 알리기 시작했다. 선원을 중심으로 널리 퍼지기 시작한 선법은 귀족 중심의 신라불교에도 상당한 변화를 주기에 충분했다.

선문이 열리기 시작하던 초기에는 당대의 조사선과 마찬가지로 지방의 산사에 선원을 개설하고, 먹거리를 스스로 해결하기 위해 수행자들이 직접 노동을 하는 등 기존의 형식과 권위주의에서 탈피한 모습을 보였다. 이같은 모습은 당시 세인들에게 충격적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했다. 하지만 선원의 자급자족 경제생활과 형식을 파괴한 자유로운 모습은 곧 선 수행을 실천하는 생활종교의 모습으로 비춰지며 선원을 찾는 발길이 이어지는 원동력이 되었다.

신라 말기에는 지금까지 널리 알려진 구산선문 이외에도 많은 선문이 개창되었다. 이 가운데는 현재까지 사찰의 면면이 이어져 오는 곳이 있고, 사지에 탑비만 남아 역사적 흔적만 남아 있는 곳도 있다. 그리고 아무 흔적 없이 폐사지로 확인되고 있는 곳도 있다.

중앙승가대 총장 종범 스님이 이들 선원들의 역사를 조사해 조계종 교육원 불학연구소가 발간한 『선원총람』에 기고한 글에 따르면 홍척대사의 남악 실상사 선문이 826년에서 835년 사이에 문을 연 첫 번째 선원이다. 이어 쌍계사 선문(830), 쌍봉사 선문(839), 고달사 선문(840), 태안사 선문(847), 성주사 선문(847), 사굴산사 선문(851), 보림사 선문(861), 봉암사 선문(881), 흥녕사 선문(882), 지장선원(889), 봉림사 선문(897) 등이 차례로 문을 열었다. 이 가운데 도의의 법손 체징이 문을 연 가지산 보림사 선문의 개창 시기가 다소 엇갈리기는 하지만 종범 스님 주장대로 861년이 아니라, 다른 자료에서처럼 859년에 선문이 열린 게 맞다고 해도 선문의 개창 순서에는 변함이 없다.

수선사는 사부대중 공력으로 탄생

신라 하대에 당나라에 유학했던 유학승들이 대거 귀국하면서 문을 열기 시작한 선원은 귀족 중심으로 발전해온 불교의 형식을 바꾸었을 뿐만 아니라, 곧 수행과 신행 풍토의 변화로 이어지면서 신라불교 전반에 영향을 미치게 됐다.

이후 고려시대에 들어서도 초기에 지속적으로 선찰이 생겨났다. 고려시대 초기 선찰로는 구산선문 가운데 마지막으로 문을 연 황해도 해주군 금산면의 수미산 광조사가 대표적이다. 이어 흥법사, 봉엄사 등의 선찰이 창건되었다. 고려 초기 수많은 선찰이 건립된 배경에 대해서는 이규보(1168∼1241)가 지은 『대안사담선방』에 일정 부분의 설명이 나타난다. 이규보는 『대안사담선방』에서 “우리 태조 대왕이 명철한 조사의 필요에 따라 종문을 높이 믿어서 이에 오백선우(五百禪宇)를 크게 열어 심법을 천양하였다”는 대목이다. 왕이 국사를 운영하는 과정에서 안목이 열린 선사들의 도움이 필요하기 때문에 500개에 달하는 선찰을 지었다는 설명인 셈이다.

 
한국불교에서 가장 먼저 문을 연 실상산문의 맥을 이은 지리산 실상사.

고려 시대 선찰 중에서는 목우자 지눌(1158∼1210)이 설립한 조계산 수선사(修禪社)가 특별하게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수선사는 지금의 송광사. 나말여초의 구산선문을 비롯해 당시 선문을 개창한 스님들은 중국에서 선법의 인가를 받았거나 중국에 가지 않았더라도 중국 선사의 법맥을 전승했다는 점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목우자는 누구로부터 법통을 계승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종지에 의해 독자적으로 수선사 선풍을 수립했다. 뿐만 아니라 기존의 선찰이 왕실이나 부호의 개인 시주에 의해 창건됐던 것과 달리 수선사는 여러 사람의 공력으로 설립됐던 것.

「조계산수선사중창기」에서는 이 대목을 “여러 지역에서 부자는 재물을 보시하고 가난한 이는 노력을 기우려 범우를 이루니 훌륭한 모습이 마치 땅에서 솟아오른 것과 같았다”고 설명하고 있다. 따라서 조계산 수선사와 수선사를 창건한 목우자 지눌 모두 기존의 선찰 성립과는 달리 한국불교의 토양에서 자라난 특별한 선문인 것이다.

이어 조선시대에는 신라나 고려시대와 같이 선찰을 따로 건립하지 않았고, 큰 사찰에 별도의 선당을 두었다. 이때의 선당(禪堂)은 장소에 따라 심검당(尋劍堂), 선불장(選佛場), 금당(金堂) 등으로 불리기도 했으며, 지금도 조선시대에 창건한 선찰 중에서는 심검당이나 금당, 선불장 등의 편액이 걸려있는 곳이 있다.

선원은 수선의 공간, 즉 선 수행을 하는 공간을 말한다. 따라서 선종이 성립되면서 생겨난 것이라는 점에는 두말이 필요 없다. 따라서 선원의 역사는 선종의 유래와 궤를 같이하기 때문에 불교사에 있어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관련 가산불교문화원장 지관(현 조계종 총무원장) 스님은 『선원총람』에서 “중국선종의 흥기를 기점으로 선원의 기원을 생각하는 입장을 바꿔 그 기원을 선정을 수습하던 불교교단 성립과 동일한 시점으로 소급해 고찰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이에 따라 선원의 기원을 석가모니 부처님을 중심으로 대중이 운집하고 승가가 정비되면서 일정한 기간 수행공간을 만들어 안거를 시작한 시기로 볼 수 있다.

백장선사 이후 中 선원문화 발달

한국불교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중국불교에서의 선원문화는 선종이 형성된 이후부터 발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백장(720∼814) 스님이 중국선종 고유의 독특한 청규를 정비하면서 대중의 집단 참선을 위한 총림이 만들어지는 등 조사선의 전통을 갖춘 선원문화가 형성되기에 이르렀다. 백장 스님 이전의 중국 선원에 대해서는 『경덕전등록』권6 「백장회해전말」의 ‘선문규식’에 나타난 “선종은 숭산 소림굴에서 비롯해 6조 혜능 대사에 이르기까지 변변한 선찰이 별로 없어 많은 선객들은 율종의 사원 안에서 정진하였다”는 대목에서 그 모습을 유추할 수 있다.

근현대 한국불교 선원은 조선시대에 끊긴 맥을 잇기도 했으나 새롭게 만들어진 것이 대부분이다. 그 가운데 1946년 해인사에서 효봉 스님을 방장으로 가야총림이 개설됐으며, 이것이 근세 한국불교 총림의 효시다. 그리고 봉암사에서 성철 스님의 주도로 향곡, 자운, 월산, 우봉, 보문, 혜암, 법전, 성수, 도우 등이 모여 공주규약(共住規約)을 정하고 선종의 전통 가풍에 따라 ‘일일부작 일일불식(一日不作 一日不食)’하며 수행정진했다. 따라서 가야총림과 봉암사 선원은 현대 한국불교 선문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현재 선종의 종지종풍을 이어가고 있는 조계종에는 매년 하안거와 동안거 때마다 100여 개의 선원에서 2200여 명의 수좌들이 수행정진하고 있다.

심정섭 기자 sjsS88@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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