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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한국불교 최초]22. 발우(鉢盂)

기자명 법보신문

고려제작 구인사 발우가 현존 지정문화재 中 최고

 
1593년 조선 선조가 서산대사에게 하사한 청옥발우 3합.

“부처님은 부다가야 보리수 아래서 깨달음을 얻은 후 7일 동안 가부좌를 한 채 해탈의 즐거움을 누리고 나서야 선정에서 깨어났다. 그때 그 곁을 지나던 상인 두 사람이 미숫가루를 공양물로 올리자 석가모니 부처님은 과거의 여러 부처님들이 그릇에 음식을 받았던 것을 떠올렸고, 부처님의 생각을 안 사천왕들이 각기 하나씩의 돌 그릇을 바치자 부처님은 4개의 그릇을 하나로 합쳐 음식물을 받았다.”

『태자서응본기경(太子瑞應本起經)』 권 하에 나오는 부처님의 성도 후 첫 공양모습이다.

따라서 불교에서 사용한 최초의 발우(鉢盂) 형태는 석발(石鉢)이 되는 셈이다. 『사분율』에 따르면 부처님은 비구들이 어떤 발우를 가져야 하느냐고 물어오자 “발(鉢)에는 여섯 가지가 있다”면서 “철발(鐵鉢), 소마국발(蘇摩國鉢), 오가라국발(烏伽羅國鉢), 우가사국발(憂伽國鉢), 흑발(黑鉢), 적발(赤鉢)인데, 이를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으니 철발(鐵鉢)과 니발(泥鉢)이다”라고 답한다. 여기서 니발은 진흙으로 만든 그릇을 뜻하는 것으로 이는 곧 와발(瓦鉢)을 말하는 것이어서 철발과 와발이 초기불교에서 사용했던 발우의 모습이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발우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열반 이후 여러 나라로 전해지게 되었고, 종류 또한 지역과 문화적 전통을 달리하면서 재료와 색 등에 따라 여러 가지로 구분된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철발, 와발, 협저발(칠보), 목발 등을 사용하고 있다. 여기서 발우라는 표현은 후대에 붙여진 이름이다. 즉 발우에서 발(鉢)은 산스크리트어의 파트라(patra)에서 유래된 것으로 먹을 양을 책정해준다는 의미에서 응량기(應量器)로 번역하고, 우(盂)는 중국어로 그릇을 나타낸 한자이다. 이에 따라 범어와 중국어의 복합어인 바루라고 부르기도 하고, 우리말로는 흔히 바리때라고도 한다. 발우는 부처님 당시 인도에서는 1개뿐이었으나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에 들어오면서 4합이 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부처님 사용 돌그릇이 불교 첫 발우

석가모니 부처님이 사용하기 시작한 이래 불교에서의 발우는 출가 수행자인 스님들의 밥그릇으로 사용되면서 소욕지족의 삶의 표상이 되었고, 동시에 전법의 신표로 사용되기도 했다. 발우가 소욕지족의 삶을 지향하는 출가자의 생활을 상징하는 말은 삼의일발(三衣一鉢)이라는 표현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 소욕지족을 상징하는 삼의일발이라는 표현에서 보듯, 출가자의 식생활은 발우라고 하는 작은 그릇을 통해서만 해결했다.

즉, 재가자가 신심으로 보시한 음식을 질과 양에 관계없이 감사하게 받아 취하고, 이를 바탕으로 수행에 필요한 최소한의 육체적 환경을 만든다는 것이 바로 발우에 담긴 뜻이라고 할 수 있다.

고려시대에 제작한 것으로 현존 지정문화재 가운데 가장 오래된 단양구인사청자소문발우.

때문에 발우는 완전히 깨지거나 수리를 해도 국물이 줄줄 샐 정도가 아니면 바꾸지 못하도록 했다. 보통 오철철발(五綴鐵鉢)이라고 해서 발우를 꿰맨 자국이 다섯 군데가 될 때에야 비로소 새로운 것으로 바꾸는 것이 허용됐었다. 발우를 대하는 태도가 이러했기에 발우는 곧 출가자의 청렴한 소욕지족의 삶을 상징하는 그릇으로 불리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전법의 상징으로 인식된 것은 중국에 선종이 전래되면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달마대사가 양무제 보통 원년(520) 중국에 당도해 법을 전하기 시작한 이래 선종에서는 발우와 가사가 법을 전하는 증표로 사용됐다. 『경덕전등록』이나 『육조단경』 등에 따르면 중국 선종의 초조 달마로부터 혜가, 승찬, 도신, 홍인, 혜능에 이르기까지 법을 전하는 과정에서 스승이 제자에게 의발(衣鉢)을 전수한 기록이 나타난다. 그러나 오조 홍인이 의발을 전하면서 발생할 수 있는 제자들간의 분쟁소지를 없애기 위해 혜능에게 더 이상 의발을 전하지 말라고 당부하면서 중단됐다. 하지만 이후에도 전법의 상징이 된 발우와 가사에 대한 이야기는 심심지 않게 등장하고 있다.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은 후 7일만에 첫 공양을 하면서 유래된 불교에서의 발우는 부처님 열반 이후 각국에 전파되었고,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에도 전래됐다. 그러나 문헌상 어느 시기에 누구에 의해 처음으로 이 땅에 스님들이 사용하는 발우가 전해졌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다만 신라 승려들이 중국으로 불법을 구하러 갔다가 귀국한 시기에 함께 전해졌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을 뿐이다. 신라의 구법 유학승들은 진평왕 시대(579∼632)에 본격적으로 활동했고, 이 시기에 신라불교 융성의 기틀이 확립됐으므로 비슷한 시기에 중국을 통해 발우도 전해졌을 것으로 보고 있다.

옛 기록에 처음 나타나는 발우 관련 이야기는 『삼국유사』제4권「의해편」‘원광이 당나라로 유학하다’조에서 찾을 수 있다. 당에 유학한 원광법사는 진평왕 22년(600) 신라로 돌아온 이후 불법을 전파하고 신라에 불교가 융성하도록 노력을 아끼지 않았으며, 말년에 궁에서 법을 설해 왕을 치료하기도 했다. 당시 원광의 제자 원안이 쓴 원광법사 관련 기록을 담은 『삼국유사』에서 발우의 존재가 확인된다.

“원안이 일찍이 원광의 사실을 썼는데 기사는 이렇다. 신라의 왕이 병환이 나서 치료해도 낫지 않았으므로 원광을 청해 궁중에 들여 별성에 있게 했다.(…) 어느 날 초저녁에 왕이 원광의 머리를 보았더니, 금빛이 찬란하고 일륜같은 형상이 그의 몸을 따라 이르렀다.(…) 원광을 병실에 머무르게 했더니 오래지 않아 병이 드디어 나았다.(…)보시로 받은 재물은 모두 절 짓는데 충당하게 했으므로 남은 것은 다만 가사와 바리때뿐이었다.”

원광법사가 곳곳에서 보시로 받은 재물은 모두 절 짓는데 충당하고 가사와 바리때만 남았다는 대목에서 나타나는 ‘바리때’가 한국불교에서 발우를 사용했음을 알리는 문헌상 첫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이어 『송고승전』권4 「석의상전」에 소개된 의상에 대한 일화에서 발우에 대한 기록을 찾을 수 있다.

681년 부석산 골짜기에서 빈한하게 생활하는 의상에게 문무왕이 전장과 노비를 보냈으나, 의상은 문무왕의 호의를 거절하면서 “우리의 법은 지위의 높고 낮음을 평등히 보고, 신분의 귀하고 천함을 없이 하여 한가지로 합니다. 열반경에서는 여덟 가지 부정한 재물에 관해 말하고 있으니, 어찌 내가 전장과 노복을 소유하겠습니까. 빈도는 법계를 집으로 삼아 발우를 가지고 밭갈이를 하며 익기를 기다립니다”라는 글을 올렸다.

원광법사 발우가 문헌상 첫 기록

또한 『삼국유사』「감통편」‘진신석가가 공양을 받다’조에 신라 효소왕 8년(699) 망덕사 낙성연에 나타난 걸인이 경주 남산 비파골 비파암 뒤로 지팡이와 발우만 남긴 채 사라졌다는 대목이 있고, ‘진표전간’조에는 760년 진표 율사가 변산 부사의방 미륵상 앞에서 계법을 구할 때 지장보살이 나타나 가사와 발우를 주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외에도 여러 곳에서 발우 관련 기록을 볼 수 있으며, 금강산 장안사 중흥비에는 정치적 이유로 중국에 가서 황후가 된 기씨가 태자를 낳은 후 복을 빌기 위해 장안사에서 승려 500명을 모아 가사와 발우를 시주하고 법회를 열어 낙성식을 거행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기도 하다.

 
발우를 형상화한 특이한 문화재인 보물 471호 통도사봉발탑.

한편 자장 스님이 중국 오대산에서 한 스님(문수보살)에게 부처님의 진신사리와 비라금점가사, 그리고 발우를 받았다는 설명이 설화처럼 전해지고 있으나, 기록에는 발우에 대한 표현이 나타나지 않고 있어 후인들이 덧붙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남아 있는 발우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을 꼽는 것 역시 간단한 일은 아니나, 정확하게 발우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 지정 문화재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단양구인사청자소문발우(丹陽救仁寺靑磁素文鉢盂)이다. 고려시대 유물인 구인사청자소문발우는 고려시대 유물이라는 점만 확인 됐을 뿐, 어느 사찰에서 누가 사용하던 것인지는 밝혀지지 않았고 지난 2001년 시도유형문화재 211호로 지정됐다. 고려시대 용기로 색상이 청아하고 유연하며 보존상태가 양호해 충분한 문화재적 가치를 갖고 있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리고 제작연대와 사용자가 분명한 발우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는 서산대사의 청옥발우를 꼽을 수 있다. 1593년 조선 선조대왕이 서산대사에게 금란가사, 칠보염주 단자와 함께 발우를 하사했으며 이때 받은 발우가 청옥 3합이다. 서산대사는 1604년 제자들을 불러모아 법을 설한 후 “재난이 미치지 않고 오래도록 더렵혀지지 않을 곳”으로 대둔사를 지목하고, 이곳에 자신의 가사와 발우를 두라고 당부했다. 이에 따라 1655년 묘향산에 있던 옥바릿대를 대둔사로 옮겼고, 현재까지 대둔사에 보관되고 있다.

이외에 광주시립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조선시대 청동제 발우가 있다. 이 발우는 높이 42cm, 구경 87.8cm로 그 크기로 볼 때 공양에 앞서 음식을 담아두었던 대중용 발우로 추정된다. 그릇에 새겨진 128자의 명문을 통해 숙종 3년(1677) 제작돼 순천 벌교의 영축산 흥왕사에 시납했으며, 무게가 110근이고 경상도 진주 사람 통정대부 김애필이 주조한 것으로 밝혀졌다. 현재까지 통일신라나 고려시대 사찰 유적에서 청동으로 만든 발(鉢)이 여럿 출토되고 있으나, 이것이 스님들의 밥그릇으로 사용됐던 발우인지 일상적으로 사용했던 사발인지 여부가 불분명한 상황이다.

1593년 서산대사 발우 현존

그리고 발우와 관련한 특별한 유물로는 통도사봉발탑(通度寺奉鉢塔)을 들 수 있다. 보물 제471호인 통도사봉발탑은 용화전 앞에 서 있는 것으로 정확하게 용도를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석가세존의 옷과 밥그릇을 미륵보살이 이어받을 것을 상징한 조형물로 보고 있으며, 받침부분 위에 뚜껑이 있는 큰 밥그릇을 얹은 듯한 모습이다. 건조연대를 고려시대로 추정하고 있는 희귀한 불교문화재라 할 수 있다.

한편 발우는 옛 스님들이 탁발(托鉢)할 때의 도구이기도 했는데, 불교에서 탁발은 그 자체가 수행이기도 했다. 탁발에 대해 『유마경』「제자품」에서는 “걸식은 식용을 위한 것이 아니며 음식을 얻기 위한 것도 아니다. 마을에 들어갈 때는 사람이 살지 않는 빈 마을이라는 생각으로 들어가야 하며 보고 듣고 느끼고 하는 온갖 분별은 깨달음의 경지에서 하여 모든 것이 꼭두각시와 같은 줄 알아야 한다. 이렇게 걸식한 밥은 모든 중생에게 베풀고 부처와 성현에게 공양한 다음 먹어야 남의 보시를 헛되이 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먹을 수 있는 사람은 번뇌를 버리지 않고서도 해탈에 들고 집착을 끊지 않고서도 깨달음에 다다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오늘날 한국불교의 모습은 과연 이 발우가 갖는 뜻과 탁발수행에 얼마나 부합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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