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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한국불교 최초]23. 금강계단(金剛戒壇)

기자명 법보신문

자장율사가 646년 세운 통도사 계단이 최초

 
한국불교 최초의 계단인 통도사 금강계단.

사회를 유지하는 필수조건 중 하나는 구성원들이 지켜야 할 약속에 다름 아닌 법률이다. 법률을 만들어 구성원 모두가 그 테두리 안에서 생활하도록 하는 것은 공존을 위한 최소한의 안전장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국가는 물론 기업, 학교 등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곳마다 각자에 맞는 규율을 정해 놓은 것이고, 이는 종교 역시 다르지 않아 불교에도 계율(戒律)이 존재하고 있다.

석가모니부처님은 출가자와 재가자가 각각 지녀야 할 규율을 설명해 놓았고, 이 규율은 현재까지 비구 250계와 비구니 346계 등 계율(戒律)로 정해져 내려오고 있으며, 출가자들은 반드시 이 계를 받아 지키면서 수행자의 본분을 다해야 한다. 때문에 출가자에게 이 계를 주고 계를 설하는 특별한 의식이 전해지고 있고, 이 계를 주거나 설하기 위해 사용하는 단에 계단(戒壇)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계단(戒壇)은 석가모니부처님 재세시에 인도의 누지(樓至)보살이 기원정사 동남쪽에 계를 주는 단을 세운 것이 시초로 알려져 있다. 이후에 각 사찰에 계단을 설치하는 관습이 생겨났고, 중국에서는 위나라 때 처음 계단이 설치된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중국에서 일정한 제도를 갖추게 된 것은 667년 당나라 도선율사가 정업사에 계단을 설치한 때로 알려져 있다. 중국불교 역사상 최고의 계율학자이며 실천가로 알려진 도선율사는 『계단도경(戒壇圖經)』을 지어, 계단의 기원을 부처님이 계시던 기원정사에 두고 계단의 모습에 대해서 상세하게 기록했다.

 
고려시대에 세운 금산사 방등계단.

도선율사는 이어 『계단도경』에 근거해 자신이 주석하고 있던 종남산 정업사에 계단을 설치했다. 중국에서는 도선율사 이후 계단 설치가 전국으로 퍼져나갔고, 지금도 오대산 벽산사에는 북위 때 푸른 옥으로 만든 벽옥계단(碧玉戒壇)이 있으며 죽림사에는 백옥으로 계단을 세운 백옥계단(白玉戒壇)이 있다. 당시 중국에서는 계단을 설립해 계율의 정신을 널리 선양하는 것이 승가를 올곧게 할뿐만 아니라 모든 국민의 윤리 도덕을 일깨우는 일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널리 퍼질 수 있었고, 당 대종 영태 원년인 765년에는 장안 대흥선사에 방등계단을 설립하기도 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신라 선덕여왕 15년(646) 자장율사가 당나라에서 부처님의 진신사리와 가사, 불경 등을 들여와 양산 통도사에 계단을 만든 것이 처음이다.

1642년부터 ‘금강계단’표현

『삼국유사』에 따르면 자장은 왕이 칙령을 내려 조정에 출사해서 일 할 것을 명했을 때, “내 차라리 단 하루라도 계를 지키다 죽을지언정 파계하고 백년 동안 살기를 바라지 않는다”며 왕명을 따르지 않았다. 그리고 선덕여왕 5년인 636년에 당나라로 유학해 7년만에 귀국했다. 자장이 문수보살에게 법을 부촉 받아 귀국했을 무렵, 신라에서는 불교 전반에 대한 관리 방안을 놓고 고민하는 관리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었다. 『삼국유사』「의해편」에 따르면 당시 조정에서는 “불교가 들어와 오랜 세월이 지났으나 그것을 지키고 받드는 규범이 없으니 통괄하여 다스리지 않으면 바로잡을 수 없다”는 논의가 있었고, 그 결과 자장율사를 대국통으로 삼아 승니의 모든 규범을 승통에게 위임하여 주관하도록 했다. 『삼국유사』에서는 자장이 대국통이 되어 불교 규범을 바로 세우면서 나타난 효과를 “이때 나라 안에 계를 받고 불법을 받든 이가 열 집에 아홉이나 되었으며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기를 청하는 이가 해마다 달마다 불어났다. 이에 통도사를 세우고 계단을 쌓아 사방에서 오는 사람을 받아들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곧 한국불교에 첫 번째로 계단이 설립된 과정을 밝혀놓은 기록이기도 하다. 이때가 선덕여왕 15년(646) 이었으며, 비로소 한국불교가 체계를 갖추게 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이 때문에 통도사는 나라의 큰절이라고 해서 국지대찰(國之大刹)이라 불렸고, 또한 불교집안의 종갓집이라고 해서 지금까지도 불지종가(佛之宗家)로 불리고 있다.

한국불교 최초의 계단인 통도사 계단이 현재와 같은 금강계단(金剛戒壇)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642년 만들어진 「통도사사적약록(通度寺事蹟略錄)」이후 부터다. 금강계단은 사찰에서 금강보계(金剛寶戒)로 불리는 불사리를 봉안해 놓고 수계의식 등을 행하는 곳을 이르는 말이다. 여기서 금강보계는 다이아몬드처럼 보배로운 계(戒)를 이르는 말. 때문에 불사리를 모신 금강계단은 부처님이 항상 그곳에 머물고 있다는 상징성을 지니고 있는 곳이다. 이는 또 일체의 것을 깨뜨릴 수 있는 가장 단단한 것을 금강이라고 한데서 연유해, 금강과 같은 반야의 지혜로써 모든 번뇌를 물리칠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자장은 당시 통도사에 금강계단을 만든 후 “만대륜왕삼계주(萬代輪王三界主) 만대의 전륜왕 삼계의 주인/ 쌍림시적기천추(雙林示寂幾千秋) 쌍림에 열반하신 뒤 몇 천추던가/ 진신사리금유재(眞身舍利今猶在) 진신사리 오히려 지금도 있으니/ 보사군생례불휴(普使群生禮不休) 널리 중생의 예불 쉬지 않게 하리”라는 불탑게(佛塔偈)를 남겼고, 이 게송은 현재 대웅전 주련에 새겨져 있다. 그리고 자장의 게송대로 지금까지도 수많은 불자들이 금강계단을 찾아 불자로서의 삶을 새롭게 다짐하고 있다.

현재의 통도사 금강계단(국보 290호)은 신라 선덕여왕 시절 처음 지어진 후 임진왜란 때 불에 탄 것을 조선 인조 23년(1645)에 다시 지은 것이다. 통도사 금강계단의 외형은 중국 의정 스님이 『대당서역구법고승전(大唐西域求法高僧傳)』에서 “중앙에 소탑이 있고 소탑 안에는 불사리를 봉안했다”고 설명한 인도 나란타사 계단 모습과도 닮아 있다.

통도사 금강계단은 고려시대와 조선시대를 거치며 여러 차례 중수를 했으나 불사리를 봉안한 중앙의 석종형 부도와 함께 사방 평면에 2단의 석단을 형성하고 있어서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고, 이 모습은 곧 의정이 설명한 인도의 계단과도 닮은꼴이라 할 수 있다. 즉, 전통적인 형태를 원형에 가깝게 간직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통도사 금강계단은 고려시대부터 금강계단의 석종을 들어내 사리를 친견하려는 일이 종종 있어, 유명세를 톡톡히 치르기도 했다. 첫 번째는 고려 초의 일로 『삼국유사』‘전후소장사리’조에 따르면 “옛날 본조(本朝)의 두 안렴사(고려시대 지방관)가 와서 계단에 예를 표한 뒤 돌 뚜껑을 들어 들여다보니 처음에는 긴 구렁이가 석함 속에 있는 것을 보았고, 두 번째는 큰 두꺼비가 돌 위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그 뒤로 이 돌 뚜껑을 감히 들어보지 못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인도 나란타사 계단과 닮아

하지만 이들은 실제로 사리에 손을 대지는 못했고 금강계단 사리에 직접 손을 댄 최초의 사례는 이후 고려 광종 22년(1235)에 상징군 김이생과 시랑 유석이 군사를 시켜 돌 뚜껑을 들어내고 속을 들여다본데서 찾을 수 있다. 기록에서는 이들이 속을 들여다보았을 때 “작은 돌 함 속에 유리통이 들어있고 유리통 속에 사리만 네 알이 있었다”고 적고 있다. 그리고 유리통에 금이 가서 마침 갖고 있던 수정통을 시주해 거기에 사리를 보관하도록 하고 그 사실을 기록해 두었다고 전하고 있다. 이 기록이 통도사 금강계단 사리에 직접 손을 댄 문헌상 첫 기록이다.

 
조선시대 통도사 사리중 1과를 이운해 설치한 용운사 석조계단.

이후에도 조선시대 들어 임진왜란 때 왜적들이 금강계단을 파괴하고 사리와 영골을 탈취했으며, 이를 부산 동래에 사는 옥백거사가 가지고 돌아온 기록 등이 전해지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이 외에도 여러 차례 수난을 겪었고 마지막으로 1911년 또다시 일본인들이 축대를 쌓고 석책을 계단 주변에 두른 기록이 있다.

고려 전기에 융성했던 수계의 체계는 고려말에 이르러 도첩제로 대치되면서 그 체계가 무너졌으며, 그로 인해 수계의식이 약화됐다. 때문에 옛 시절 설치된 금강계단 중 현재까지 그 존재가 전해지고 있는 것은 통도사 금강계단 이외에 금산사 방등계단, 용연사 석조계단, 개성 불일사지 계단, 백련사 계단 정도다.

금산사 방등계단(方等戒壇)은 송대(松臺)라고 부르는 미륵전 북쪽 높은 대지에 위치해 있다. 계단의 중앙에는 보물 제26호인 부도가 1기 있고, 이 역시 통도사 금강계단과 같은 석종형 부도다. 이 방등계단은 신라 혜공왕 2년 진표율사가 처음으로 축조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지금 남아 있는 것은 고려 초기에 다시 조성한 것이다. 지금도 고려시대의 계단 양식을 잘 간직하고 있다. 방등이라는 이름은 이곳이 출가자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재가자들에게도 계를 주는 곳이라는 의미에서 붙여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하층 기단 사면에 돌기둥이 남아 있고, 이 돌기둥에 얼굴 모습이 특이한 천인상이 새겨져 있으며 사방 모서리에는 사천왕이 새겨져 있다. 일부에서는 이같은 공간 구성과 장식이 미륵상생 신앙에 따라 도솔천궁을 상징한 것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용연사 석조계단(보물 제 539호)은 방형의 이중 기단 위에 석종형 탑신을 중앙에 안치한 형식이다. 상층 기단의 각 면에는 팔부신의 상을 양각했고 하층 기단 모서리에는 사천왕상을 배치했다. 그리고 그 조각 기법이 섬세하고 균형미를 갖췄다는 점 때문에 조선후기 유행했던 석조예술 중 가장 우수한 작품이라는 평을 듣기도 한다. 이 계단은 임진왜란 때 묘향산으로 옮겼던 통도사 사리를 사명대사의 제자 청진이 다시 통도사로 옮기던 과정에서 용연사 스님들이 그 일부를 이곳으로 이운하여 봉안함으로써 성립됐다. 절 안에 있는 「석가여래부도비」에 “석가모니부처님의 사리를 모시고 이 계단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고, 이 기록을 통해 조선 광해군 5년(1613)에 계단이 완성됐음을 확인할 수 있다.

금산사·용연사 계단도 현존

그러나 통도사 금강계단, 금산사 방등계단, 용연사 석조계단 이외에 개성 불일사지 계단이나 백련사 계단에 대한 자료는 제대로 전해지지 않고 있다. 또한 고려시대에 여러 곳에 계단이 설치됐다고 하나, 자료를 통해 확인 할 수 있는 곳은 없으며 중원 정토사법경대사자등탑비(中原 淨土寺法鏡大師慈燈塔碑)나 장흥 보림사보조선사창성탑비(長興 寶林寺普照禪師彰聖塔碑) 등의 비문에 나타나는 “가야산 보원사에서 계를 받았다”는 내용에 따라 지금의 보원사지에 계단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는 정도다.

부처님은 열반에 앞서 “계로서 스승을 삼으라”고 당부했고, 자장율사는 “계율을 지키고 하루를 살지언정 파계한 몸으로 한평생 부귀영화를 누리지 않겠다”는 계율정신을 후대에 남김으로써 계율의 중요성을 강조했었다. 혹, 자장 스님이 지금의 한국불교를 본다면 과연 어떤 법을 설할까.

심정섭 기자 sjs88@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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