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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한국불교 최초]24.가사(袈裟)

기자명 법보신문

자장이 문수보살에게 받아온 ‘석가여래 가사’

 
자장율사가 당나라 종남산 운제사에서 문수보살로부터 받아온 부처님의 가사(사진 왼쪽)와 자장율사가 신라 선덕여왕으로부터 하사받은 가사(사진 오른쪽)

“『국사(國史)』에 이런 기사가 있다.(…) 선덕여왕 때인 정관 17년 계묘(643)에 자장법사가 당나라에서 부처의 머리뼈와 부처의 어금니와 부처의 사리 1백 알과 부처가 입던 금점이 있는 가사 한 벌을 가지고 왔다. 그 사리는 세 부분으로 나누어 한 부분은 황룡사 탑에 두고, 한 부분은 태화사 탑에 두고, 한 부분은 가사와 함께 통도사 계단(戒壇)에 두었다.(…)”

『삼국유사』「탑상편」‘전후로 가지고 온 사리’조에 나타난 이 설명이 한국불교 역사에서 ‘가사(袈裟)’에 대한 첫 기록이다. 그렇다면 『삼국유사』에서 ‘자장율사가 가져와서 통도사 계단에 두었다’고 설명한 그 가사는 어떤 가사일까. 그리고 지금도 존재하고 있을까.

이와 관련해서는 조선 숙종 31년(1705)에 승려 민오(敏悟)가 저술한 「통도사사리가사사적약록(通度寺舍利袈裟事蹟略錄)」과 1912년 통도사 승려 서해담(徐海曇)이 종합 정리한 내용을 통도사에서 간행한 「통도사사적(通度寺事蹟)」 등에서 보다 자세하게 언급하고 있다. 「통도사사리가사사적약록」에서는 “자장이 당나라 종남산 운제사 문수보살상 앞에서 기도 드리고 있을 때, 문수보살이 승려로 화하여 자장에게 가사 한 벌과 진신사리 100개, 두골, 지절, 염주, 경전을 주면서 ‘이것은 내 스승 석가께서 친히 입으셨던 가사이고 또 이 사리는 부처님의 진신사리이며 뼈는 부처님의 머리뼈와 손가락뼈이다’고 했다”고 적고 있다.

가사에 대한 첫 기록이 나타나는 대목은 고서(古書)에서 확인되는 것 이외의 여러 가지 이야기로 전해지기도 한다. 전해지는 이야기 가운데 자장율사가 통도사에 계단(戒壇)을 만들고 가사와 사리를 봉안하게 된 이유를 설명한 내용이 있다. 그 이유를 「통도사 연기(緣起)」에서는 문수보살이 자장율사에게 한 말을 빌어 “그대는 말세에 계율을 지키는 사문이 될 것이므로 내가 이것들을 그대에게 주노라. 그대의 나라 남쪽 취서산에 독룡이 거처하는 신지(神池)가 있는데, 거기에 사는 용들이 독해를 품고 비바람을 일으켜 곡식을 상하게 하고 백성을 괴롭히고 있다. 그러므로 그대는 용이 사는 연못에 계단을 쌓고 불사리와 가사를 봉안하면 삼재를 면하며 만대에 멸하지 않고 불법이 오랫동안 머물며 그곳을 지키게 되느니라”고 전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취서산이 바로 영취산이고, 신지가 지금의 구룡지라는 것이다.

643년 들여온 후 통도사 소장

『삼국유사』를 비롯해 여러 곳에서 전하는 이 이야기는 한 토막의 설화와도 같으나, 어쨌든 현재 통도사에 바로 그 가사가 전해지고 있다. 기록에 처음 등장하는 가사가 실물 그대로 현재까지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석가여래 가사’로 불리는 현존 최고(最古)의 이 가사는 붉은 비단에 금점이 있어 비라금점가사(緋羅金點袈裟)로 불리기도 한다. 통도사가 소장하고 있는 이 가사는 실제 붉은 빛이 도는 황색비단에 꽃 문양이 새겨져 있으며, 가사의 네 귀퉁이에도 꽃 문양이 새겨져 있고 홍색의 사각형 천이 부착되어 있다. 그러나 옛 가사에서 볼 수 있는 천(天)자나 왕(王)자의 수는 보이지 않는다.

가사 역시 다른 불교문물의 유통경로처럼 부처님 재세시 인도에서 발생해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로 전해졌다. 그러나 그 양식은 기후와 환경에 따라 조금씩 달라졌고 현재 한국불교에서 사용하는 가사 역시 인도의 가사와는 차이가 있다. 부처님 당시 인도에서는 가사(袈裟)가 그 자체로 의복이었으며, 이 의복은 개인이 소유할 수 있는 수를 엄격하게 제한하기도 했다.

『사분율』권 41에서 따르면 부처님은 “비구들이 길을 가는데 옷을 많이 가지고 가기 때문에 머리에 이기도 하고 어깨에 메기도 하고 허리에 차기도 하였다. 이를 보고 생각하되, 나는 비구들에게 옷의 분량을 제한해서 더 가지지 못하게 하리라”고 그 수를 제한하고 있다. 부처님은 그러면서 “내가 초저녁에 한데에 앉을 때는 옷 하나를 입었고, 밤중이 되어 추위를 느끼게 되어 두 번째 옷을 입었고, 새벽이 되어 더욱 추위를 느끼게 되면서 세 번째 옷을 입었다. 그러므로 세 벌의 옷만을 갖게 되면 족하리라.”하고는 세 가지 옷 이외에 더 이상 가지지 못한다는 규정을 세웠다.

여기서 말하는 비구들의 옷이 현재의 가사라고 할 수 있다. 가사는 범어로 가사야(袈裟野) 또는 가라사예(迦邏沙曳)라고 하며, 팔리어로는 kasava라고 한다. 그리고 이 표현은 색을 설명하는 것으로 ‘선명하지 않다’, ‘곱지 않다’는 뜻이 있으며 우리말로 번역할 때 괴색, 부정색 등으로 번역한다.

 
중요민족자료 29호인 사명대사 가사.

이와 관련 현재 우리나라에서 가사를 비롯해 승가의 복식과 관련한 최고 전문가로 널리 알려진 김경숙 박사와 안명숙 박사는 공동으로 엮은 『한국의 가사(袈裟)』에서 “범어의 카사야(kasaya)를 중국에서 가사(袈裟)로 음역했고 우리나라에서도 가사라 부르고 있으며, 부처님 재세시 인도에서 입은 것은 장방형의 천으로 지금의 남방불교 스님들이 입고 있는 가사”라고 설명했다. 그리고 “색깔이라는 의미에서의 가사는 다른 종교 그룹과 구별되는 수단이었을 뿐만 아니라, 괴색(壞色)으로 염색한 이유도 고(苦)라는 것 즉 괴로움의 원인은 열 두가지 상호의존적인 단계인 12연기로 인해 일어나는데 식별하고 집착하는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한 수단이라고 볼 수 있다”고 덧붙였다.

부처님은 의복의 소유 수를 제한했을 뿐 아니라, 스스로 사람들이 입다가 버린 헌옷으로 만든 가사인 분소의(糞掃衣)를 입음으로써 제자들이 세간에서와 같은 욕심을 갖지 못하도록 하기도 했다. 발우가 갖는 소욕지족의 가르침이 가사에도 녹아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가사는 인도에서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에 전해졌으나, 이 역시 언제 어떻게 처음 전해졌는지 정확한 자료를 찾을 수 없다. 다만 옛 불상이나 불화, 고승진영 그리고 실존유물 등을 통해 추정하고 있을 뿐이다.

이에 따라 가사는 불교를 처음으로 받아들인 고구려 때부터 전해졌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고구려 고분인 쌍영총과 무용총의 벽화에 나오는 승려의 복식을 통해서 당시의 가사 양식을 유추하고 있다. 5∼6세기 경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쌍영총 벽화 가운데 주실 동쪽 벽의 인물행렬도에는 편단우견, 즉 왼쪽 어깨에 옷을 걸치고 오른쪽 어깨를 드러낸 대가사를 수하고 있는 스님의 모습이 보인다. 이 가사는 홍색과 청색으로 채색이 돼 있어서 당시 스님들이 수하는 가사의 모습이 이러했을 것이라는 추정을 가능케 하고 있다.

고구려 쌍영총 벽화에도 나타나

고구려에 이어 불교를 받아들인 백제에서는 가사의 형식을 살펴볼 수 있는 유적이나 유물이 전해지지 않고 있으나, 신라에서는 자장율사의 가사를 통해 그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신라에서는 불교를 공인한 법흥왕이 말년에 스스로 출가해 출가사문의 길을 감에 따라 가사 역시 그 신분을 고려해 자연스럽게 화려해졌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신라시대 가사는 우리나라 불교 역사에서 문헌상 최초로 거론된 가사이자 현재 통도사가 소장하고 있는 ‘석가여래 가사’와 함께, 역시 통도사에서 소장하고 있는 자장율사 가사가 전해지고 있다. 선덕여왕이 하사했다고 하는 자장율사 가사는 황색 비단 바탕에 구름 문양이 새겨져 있으며, 크기는 길이 243cm에 폭 84cm의 대가사다. 가사의 네 귀퉁이에는 옴자를 연꽃 위에 올려놓은 모습으로 정교하게 수를 놓았다. 가사의 착장구는 끈 대신에 빗장 장식을 사용했고, 빗장의 장식 정면에는 불로초와 연화문이 새겨져 있다.

이어 신라의 국통·승통제도를 발전시켜 공식적으로 국사(國師)와 왕사(王師)제도를 도입한 고려시대에는 승직제도를 통해 정해진 지위에 따라 가사를 구분했다. 고려시대 국사·왕사의 가사에 대해서는 중국 송나라 서긍(徐兢)이 인종 1년(1123) 고려 송도에 사신으로 왔다가 보고들은 것을 기록한 책인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에서 “왕사(王師)와 국사(國師)는 산수납가사(山水衲袈裟)와 긴 소매의 편삼(長袖偏衫)과 금발차(金跋遮)를 착용하고 아래에는 자상(紫裳)을 입고 검은 가죽에 방울이 달린 신발을 신었다. 방울 달린 신발은 승려들이 걸어다닐 때 신분을 알림으로써 여러 가지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는 역할을 했다”고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고려시대 가사 중에서는 대각국사 가사가 순천 선암사에 남아 있다. 이 가사는 뒷면 묵서명에 ‘고려선종대왕사우대각국사 북송원우2년정묘(高麗宣宗大王賜于大覺國師 北宋元祐二年丁卯)’라는 기록이 있다. 즉, 이 가사는 1087년에 고려 13대 선종이 대각국사에게 하사한 것이라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또 보조국사 지눌 스님의 가사가 전해졌으나 한국전쟁 때 불에 타 없어졌다. 『조선고적도보』에 따르면 이 가사에는 산수화가 수 놓여 있었고 푸른색이었다.

불교가 쇠퇴기를 맞은 조선시대 가사로는 서산대사, 사명대사, 벽암대사의 것이 있다. 그리고 이 시기 가사는 당대 고승들의 초상화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는 점이 이전 시대와 다르다. 전남 대흥사에 소장된 서산대사 가사는 황금색이며 구례 화엄사에 소장된 서산대사 가사는 홍색 비단 바탕에 포도문양이 있다. 그러나 대흥사와 통도사에 소장된 서산대사 진영도에는 모두 홍색가사로 그려져 있다.

사명대사 가사는 유일한 문화재

그리고 밀양 표충사에 보관된 사명대사 가사는 현재 전해지는 옛 스님들의 가사 중 유일하게 문화재(중요민속자료 29호)로 지정돼 있다. 가사가 너무 삭아서 형태를 잘 알아 볼 수 없을 정도이며 현재는 유리관을 통해서만 볼 수 있다. 이 가사는 황색 비단 바탕에 칠보문이 있는 금란가사다. 또 벽암대사 가사는 화엄사에 있으며 주황색 비단 바탕에 금사로 수놓은 듯 짜인 모란당초 문양이 있는 주황색 은점 가사다.

부처님 재세시 인도에서 생겨난 이후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에 전해진 가사는 삼국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를 거쳐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으며 현재는 조계종을 비롯해 각 종단이 제각기 다른 가사를 수하고 있다.

한편 가사는 단순한 옷의 의미를 떠나 수행과의 연관성이 강할 수밖에 없다. 이를 『관중창립계단도경(關中創立戒壇圖經)』에서는 “5조 하의(下衣)는 탐욕스러움을 다스리기 위해, 7조 중의(中衣)는 화가 나서 하는 말을 조심하기 위해, 대의(大衣) 상의는 어리석은 마음을 끊기 위해서 착용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는 곧 가사를 수하는 것이 탐(貪)·진(嗔)·치(癡) 삼독(三毒)에서 벗어나기 위함이라는 설명에 다름 아니다.

심정섭 기자 sjs88@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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