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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법문 명강의]육조사 선원장 현웅 스님

기자명 법보신문

탐진치 삼독 멸한 자리에 사랑이 있다

상식적으로 보면 서로 다른 종교들이 다른 종교의 경전, 가르침을 다룬다는 것은 매우 민감하고 버거운 일이기도 합니다. 불교를 믿는다고 해서 불교를 다 아는 것이 아니고 기독교를 믿는다고 해서 기독교를 다 아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저도 몇 해를 공부하면서 길이 보이지 않아 오랫동안 고생을 하기도 했습니다. 다행히 스승을 만난 후에 비로소 공부 길을 찾고 마음길이 바뀌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마음길이 한번 바뀌고 나니 새 풀에 싹이 나오듯 세상이 다시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알던 종교에 관한 상식, 즉 서로 다르다고 생각하고 차별하던 그 마음이 없어지고 아주 하찮게 보이던 것들조차도 진리로 보이기 시작했으며 하찮은 말에서도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이것을 기독교에서는 거듭난다, 새로 태어난다고 하지요. 그러고 보면 사람은 누가나 진리를 깨달을 수 있는 근기를 갖고 있으며 진리의 성체입니다. 진리에 바탕을 둔 몸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막대기’도 좋고 ‘주님’도 좋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믿으려하지 않고, 경험도 못하고, 깨달은 자들이 말해도 믿으려 하질 않습니다. 미혹에 가려서 그렇습니다. 경험자들의 말을 들을 때도 ‘그런가보다’ 하지만 스스로가 바뀌지는 않습니다. 공부를 경험해 보면 성인의 깨달음이라고 해서 그것이 우리가 갖고 있는 진리와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을 알면 성인을 따로 둘 필요가 없이 모든 사람 속에 성인이 있게 되고, 진리에 높고 낮음을 두지 않게 됩니다.

이것을 기독교에서는 신의 은총을 받았다고 합니다. 신은 한문으로 귀신 신자를 쓰는데, 어떤 억양으로 접근하느냐에 따라 그 느낌이 달라집니다. 기독교가 탄생하기 전 인도에는 수많은 신이 있었고 우리에게도 산신, 조왕신 등 무수한 신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흔히 모르는 어떤 대상을 신, 사람의 생각의 영역으로 접근할 수 없으면 신이라고 했습니다.

다만 지혜와 사랑이 있으면 신성한 신이고 지혜와 사랑이 없어서 나와 남에게 이익이 되지 않으면 미신이라고 하지요. 여기서 신과 미신, 기복과 종교의 개념 차이를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알지 못하면 껍데기만 갖고 신을 찾게 됩니다. 진리에 대한 접근, 깨침의 관점에서 보자면 하나님이든, 예수님이든, 부처님이든 이러한 차이는 그저 언어의, 표현 방식의 차이일 뿐입니다. 깨치면 신이라고 해도 좋고, 막대기라고해도 좋고, 돌이라고 해도 좋고, 주님이라고 해도 좋지요. 어떤 언어든 상관이 없습니다. 언어는 그저 약속일뿐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언어의 속성을 모른 채 그저 그 말에 대한 믿음으로만 접근한다면 혼란이 옵니다. 진정한 종교인이라면 그 종교의 교주가 전하는 뜻이 무엇인가를 알고 깨달아야 합니다. 이 깨달음을 기독교에서는 믿음, 불교에서는 수행으로 다가갑니다. 하지만 믿는다고 해서 다 깨닫는 것도 아니고 수행만 한다고 해서 다 깨닫는 것도 아니지요.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믿음을 갖거나 수행을 해서 깨달음으로 다가갑니다.

성경에서는 ‘주여, 주여 하는 자가 아니라 행하는 자가 천국에 든다’고 했는데 이는 믿기만 하는 자가 아니라 행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행함이란 기도라는 형태로 나타납니다. 그럼 왜 기도하면 진리, 즉 하나님과 통하게 될까요. 중생은 제멋대로 하려는 성격을 갖고 있습니다. 방일하고 게으른 것이 사람의 속성인데 동시에 윗사람, 성현 앞에 가면 자신을 단속하고 조심하게 되는 속성도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기도를 하면 방일하고 게으른 속성 즉, 중생 생각이 수그러들게 되는 것입니다. 열심히 기도하여 중생 생각이 그칠 때 그 안에 있는 신성이 싹을 틔우게 됩니다. 이것을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을 영접했다고 하지요. 중생의 생각이 그친 곳에서 싹튼 신성은 인간에 속하지 않고 인간의 마음에 속하지 않기 때문에 진정한 사랑이 나올 수 있습니다.

예수는 배타 가르치지 않았다

그렇다면 사랑이란 무엇일까요. 성경에 보면 사랑이란 성내지 않고, 이익을 구하지 않고, 어리석지 않아야 나온다하는데 이것은 곧 불교에서 말하는 탐진치가 멸하는 것과 일맥상통합니다. 경전에서는 탐진치가 멸한 곳에 열반이 있고 극락이 있다고 했는데 성내지 않고, 이익을 구하지 않고 어리석지 않은 곳에서 나오는 것이 사랑이라고 하니 이것이 열반, 깨달음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God is love’, 신은 곧 사랑이라 했으니 참으로 서로 다를 바가 없는 가르침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성경이든 경전이든 깨달은 이들이 설하는 내용은 같습니다. 시대와 사람에 따라 달라질 뿐 그것이 뜻하고 추구하는 바는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자신 안에 있는 진리의 싹을 찾아내고 그것을 통해 성경을 보고 경전을 보고, 기도를 하고 수행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살아있는 예수를 만나고 깨달음에 이를 수 있는 것이지 내 안에 있는 싹은 버려둔 채, 그 싹에는 관심도 없이 성경만 보고 예수만 보고 따라가며 믿는다면 그것은 죽은 예수를 믿는 것일 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성현의 가르침을 곧잘 왜곡합니다. 기독교가 배타적이고 공격적이라는 말을 많이 하지만 지금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예수가 남을 배타하라고 가르침을 설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불교도 그렇고 유교도 역시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왜곡하고 잘못 배우고 가르치는 경우가 많고 특히 종교인들이 이를 왜곡할 때 위선이 나오게 됩니다.

이러한 공통점을 알면 종교간 갈등과 충돌을 할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종교의 가르침을 잘못 이해할 때 갈등이 생깁니다. 다른 종교인을 내종교인으로 만들려고 하는 경우를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거 절대 안 됩니다. 자식도 내 맘대로 안 되는데 남의 종교를 내 종교로 바꿀 수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세상은 무엇이든 한 가지만 갖고는 살수 없습니다. 종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에는 여러 인종과 민족이 있지요. 겉모습이 다르고 언어가 다르고 그래서 겉으로 보기에 다르게 보입니다. 하지만 그들 안에는 모두 불성이 있고 신성이 있어 누구든 모두 진리를 알아듣고 깨달을 수 있습니다.

예수의 가르침은 결코 남을 배타하는 가르침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다만 가르침을 설한 기간이 3년간밖에 되지 않아 시간이 부족한 탓에 다 못 전하신 것이 아닌가 합니다. 이것을 후대인들이 잘못 이해하고 자의적으로 해석해 오늘날과 같은 모습이 되지 않았을까 합니다. 기독교인들 중에는 타종교인을 향해 ‘우상을 섬기는 자’라고 손가락질하거나 쫓아다니며 다른 종교의 성상을 부수곤 하는데 이것은 그 사람의 마음속에 이미 우상이 들어있다는 뜻이며 그 사람 역시 우상을 쫓아다니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의 진짜 가르침은 그것이 아닐 것입니다.

기도를 하던 참선을 하던 인간은 진리를 만나게 되면 변화하게 됩니다. 진리는 숨 쉬고 행하는 성질이기 때문에 진리가 중생을 만나더라도 진리는 중생의 마음속에 머물거나 갇히지 않고 중생의 마음을 변화시킵니다. 즉 진리를 내 것이라 해서 내 안에 가두어 놓고 이것이 내 것이고 내 것이 옳다며 남을 배타하는 것이야 말로 어리석은 자이고, 우상을 숭배하는 자이고, 종교가 미신이 되는 길입니다. 성인들은 내 것이 옳으니 내 것을 믿어라하지 않고 다른 이들에게 옳은 길을 가르쳐줍니다. 부처는 내 가르침을 믿어라하지 않았습니다. 바라문에게는 바라문의 옳은 길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내 것이라 주장하는 순간 진리와는 거리가 멀어지기 때문입니다.

사랑 실천하는 이가 구세주

기독교에서는 성부, 성자, 성신을 강조하며 유일신의 존재를 확신합니다. 그에 비해 불교는 신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혹은 철학 같기도 하지요. 이 둘은 매우 달라 보이지만 이 역시 오해입니다. 신의 성질을 잘 못 안 것이지요.

성부, 성자, 성신에서 성신은 진리 그 자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성신의 자리에는 탐진치, 성내고 어리석고 이익을 구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이것이 사랑의 마음입니다. 길이요 빛이요 진리라는 것 역시 탐진치가 사라졌기에 가려져 있던 그 본래의 빛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성부는 진리가 인간에게 다가가기 위해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내는 것, 의인화의 방법입니다. 진리는 그 자체의 모습이 없는 것이지만 그것을 그리워하고 다가가려는 인간들이 그 방법의 하나로 진리를 의인화 한것입니다. 성자는 그 진리를 행하는 자를 뜻합니다.

그런데 이런 표현의 방식을 오해해 신을 존재하는 어떤 대상, 심지어는 신을 재판하고 심판하는 자로 생각하곤 합니다. 그렇다면 ‘신은 사랑’이라는 가르침에 어긋나게 되는 것입니다. 신은 사랑이고, 사랑은 탐진치가 멸한 곳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종교의 갈등이 일어날 이유가 없으며 사랑을 실천하는 이가 곧 구세주입니다. 종교는 성경에 들어있고 불경 속에만 들어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 마음속에 있지만 가려져 있어 보이지 않는 진리, 그것을 드러내고 그것을 실천하는 속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정리=남수연 기자 namsy@beopbo.com


이 법문은 12월 4일 서울 돈암동 육조사에서 열린 ‘선심으로 본 성경 강의’에서 설한 내용을 요약 정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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