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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한국 불교 최초]26. 경전(經典)

기자명 법보신문

384년 동진 승려 담시가 고구려에 律藏 전래

석가모니 부처님은 자신이 가르친 내용을 글로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저서는 물론 어떠한 친필 기록도 전해지는 것이 없다. 그렇다면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을 담아 세인들이 보고 익히도록 한 경전(經典)은 언제부터 만들어졌고, 어떤 경로를 거쳐 우리나라에 전해졌을까.

전해지는 기록에 따르면 경전 성립의 기운은 마하가섭이 부처님 열반 후 그 가르침이 소실될 수 있다는 우려를 하면서부터 싹텄다. 부처님은 자신의 열반이 임박했음을 알고 각지에 흩어져서 법을 전파하던 제자들을 불러모았다. 따라서 상수제자라고 할 수 있는 마하가섭도 마가다국에서 함께 수행 중이던 500명의 제자를 거느리고 부처님을 향해 떠났으나, 미처 도착하기도 전에 부처님의 열반 소식을 접하고 슬픔에 잠기게 됐다.

그런데 이때 어느 늙은 비구의 “잔소리꾼이 없어졌는데 왜 그리 슬퍼하느냐”는 말을 듣고 충격에 빠지게 됐다. 그리고 부처님 법이 사라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서 결집을 하게 되었다는 것.

물론 결집을 하게 된 배경이 이것 뿐만은 아니다. 보다 실질적 이유는 부처님 입멸 후 저마다 자신의 견해를 부처님이 말씀했던 것이라 주장하는 등 부처님의 말씀이 제자에 따라 다르게 전달되는 모순이 생겼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부처님의 가르침을 직접 들었던 제자들이 전체 회의에 해당하는 모임을 갖게됐고, 이 모임이 바로 결집(結集-산스크리트어 중에 ‘함께 암송하는 것’의 의미를 지닌 상기티(合誦, samgiti)라는 말에서 유래-)이다.

그리고 결집에서 결정된 내용들이 후대에 이르러 소위 경전으로 결실을 맺게 됐다. 때문에 모든 경전은 첫머리에 여섯 가지의 필수적인 요건을 갖추고 있으며 이것을 육성취(六成就)라고 한다. 이로 인해 모든 경전이 ‘여시아문 일시 불 재사위국 여대비구(如是我聞 一時 佛 在舍衛國 與大比丘)∼’로 시작하게 된 것이다.

이처럼 경전성립의 동기가 된 결집은 부처님 입멸 후 400년 동안 네 차례에 걸쳐 진행됐다. 첫 번째 결집은 마하가섭이 부처님 입멸 직후 왕사성의 칠엽굴에서 승단의 대표를 소집함으로써 열리게 됐고, 이때 아난다가 경 부분을, 우팔리가 계율 부분을 주재했다. 여기서 암송의 형식으로 편찬된 경과 율은 500명의 대표들에 의해 수정·보완된 후 수행 승단 전체의 이름으로 공포됐다. 당시 참석한 인원이 500명이었기 때문에 오백결집이라고도 하며, 주로 경장과 율장이 편찬됐다. 이것이 오늘날 원시근본경전과 율장의 기본 골격이다.

두 번째 결집은 부처님 입멸 후 100년이 지나 계율에 대한 견해 차이로 수행 승단이 두 파로 분리되자 상좌부(전통파) 장로 야사의 주도로 베샬리(비사리)에서 열리게 됐으며, 이때는 주로 율장이 편찬됐다. 이어 세 번째 결집은 또다시 100년이 지나 부처님이 열반에 이른지 200년경인 아쇼카왕 당시에 수도 파탈리뿌트라(지금의 파트나)에서 1000명이 모인 가운데 열렸고, 여기서 경(經)·율(律)·론(論) 삼장 전체를 편찬했다. 무려 9개월에 걸친 결집이 끝나고 참석자들은 부처님 법을 널리 펴기 위해 스리랑카 등 여러 지역으로 파견되기도 했다.

1차 결집서 율장 기본 골격 갖춰

세 번째 결집 이후 200여 년이 지나면서 또 한번의 결집이 진행된다. 부처님 입멸 후 400년경인 굽타왕조 카니시카왕 당시에 카슈미르 환림사에서 세우 스님의 주재로 500명의 비구가 모여 경 10만 송, 율 10만 송, 논 10만 송을 결집했으며 현재는 이 가운데 논장이 남아 있다. 네 번째 결집과 관련해서는 스리랑카에서 16000여 명의 제자들이 모인 가운데 진행됐다는 설도 전해지고 있으나, 일반적으로는 카슈미르 환림사에서의 결집을 네 번째 결집으로 보고 있다.

부처님의 말씀을 전하는 불교경전은 이러한 결집 과정을 거쳐 만들어졌고, 당시 만들어진 첫 번째 경전이 ‘경의 모음’이라는 뜻을 가진 ‘경집(經集)’이다. 이 경집의 원어가 ‘숫타니파타, sutta-nipata’이며 이것이 곧 최초로 성립한 불교 경전 『숫타니파타』이다.

『숫타니파타』에는 불교가 발흥하던 당시의 사회생활, 부처님의 생애, 불교의 윤리적 측면이 생생하게 남아 있을 뿐만 아니라 순수하고 소박한 불교사상을 설하고 있어서 초기불교 교단의 성격과 부처님의 역사적 인간미까지 느낄 수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오늘날 한국사회에서는 1149수의 시로 구성된 『숫타니파타』가 가장 오래된 불교경전이라는 역사성과 관계없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구절이 담겨 있는 경전으로 더 유명하다.

경전은 크게 경(經)·율(律)·론(論) 세 가지로 분류하며 결집을 통해 편찬된 경전은 주로 인도의 옛 언어인 범어와 남방불교 경전에 주로 쓰인 팔리어로 되어 있었다. 이것을 중국에서 1000년에 걸쳐 번역했고, 우리나라에는 중국에서 번역한 한역 경전이 들어왔다.
흔히 이러한 경전을 통틀어서 대장경(大藏經)이라고 하며, 대장경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 기원전에 성립된 팔리어삼장이다. 또 7세기 무렵부터 번역을 시작해 9세기경에 성립된 티베트대장경이 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현재 한국불교에서 대장경이라고 알려진 것은 한역대장경이다. 한역대장경은 중국에서 번역된 경전이나 논서를 중심으로 중국 불교학자들의 저작들까지 포함돼 있으며, 여기에는 대·소승의 경·율·론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 현재 불교학계에서는 이 한역대장경을 불교연구의 첫 번째 자료로 삼고 있기도 하다.

결집을 거치면서 만들어진 경전이 초기경전인데 비해, 기원전 1세기에서 기원 3세기까지 대승운동이 진행되면서 수많은 대승경전이 만들어졌다. 『반야경』을 비롯해 『유마경』,『법화경』,『아미타경』, 『십지경』등이 대승불교 초기를 대표하는 경전들이다. 특히 『반야경』은 대승경전을 대표하는 것으로, 이 경전의 주 사상인 공(空) 사상은 대승불교의 기본적 교리로 불교사상의 근본을 이루고 있기도 하다.

우리나라에 경전을 전해준 중국에서는 경전을 들여오고 번역기술이 발달하는 한편 많은 인도승들이 들어오기도 했다. 그리고 구마라집(350∼409), 담무참(385∼433), 보리유지(5세기말∼6세기 초), 진체(499∼569) 등이 본격적으로 번역에 나서면서 학문과 신앙상의 기초를 다졌다. 한편으로는 중국에서 자체적으로 만들어낸 위경(僞經)도 적지 않다. 한국불교에 잘 알려진 『인왕반야경』,『관무량수경』,『수능엄경』등이 위경에 속한다.

중국에서 한역된 경전은 공식적으로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2)에 우리나라에 처음 전해졌다. 그러나 『삼국유사』 등 고서에는 “전진의 왕 부견이 승려 순도를 보내 고구려에 불상과 불경을 전해주었다”고만 기록되어 있을 뿐, 구체적으로 어떤 경전을 전했는지는 나타나지 않는다.

고서 첫 등장 경전은 ‘열반경’

하지만 『삼국유사』에서는 “동진 효무제 태원 9년(384) 말에 담시가 경장(經藏)과 율장(律藏) 수십 부를 가지고 요동(고구려 땅)에 들어와 불교의 가르침을 전했다”는 기록이 있어 율장의 경전이 전해졌다는 증거를 남겼다. 따라서 한국불교에 처음으로 전해진 경전은 율장이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일부에서는 고구려에 불교를 전한 전진의 왕 부견이 불교를 숭앙했고, 당시 미타신앙과 미륵신앙을 수용했기 때문에 고구려에 전한 경문이 『미륵경』과 『아미타경』일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하지만, 이는 역사적 사실관계가 전무하며 어떠한 기록에서도 언급되지 않아 말 그대로 추측에 불과할 뿐이라고 할 수 있다.

고구려에 이어 불교를 공식적으로 받아들인 백제에서는 522년 겸익이 인도에 유학해 526년 돌아오면서 율장의 경전과 다른 경전 등을 배에 싣고 돌아왔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그리고 겸익은 인도 승려 배달다 삼장과 함께 돌아와서, 흥륜사에서 국내의 이름난 승려 28명을 불러들어 아비달마에 관한 논소와 5부의 율장을 번역하는 일에 매진해 결국 이를 신률(新律) 72권으로 완성했다.

우리나라에 전해진 경전의 이름은 『삼국사기』와 『백제본기』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이들 고서에는 “성왕 19년(541)에 사신을 양나라에 보내 『열반경』등 경서의 해설서와 공장, 화사 등을 청하자 보내주었다”는 기록이 있다. 처음으로 경전의 구체적 이름이 언급된 대목이다.

백제에서는 이에 앞서 마라난타가 동진을 떠날 때 역경불사를 함께 해왔던 동진의 혜원 스님으로부터 경전을 받아왔고, 백제에 극락정토 신앙과 염불을 중심으로 불법이 퍼지도록 하겠다는 원을 세우는 한편 백제 침류왕에게도 아미타불 염불을 하도록 권했던 기록에 따라 정토신앙과 관련된 경전이 전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경전과 관련된 구체적 기록을 남겨놓은 고서는 없다.

불교가 가장 크게 융성한 신라는 불교 전래 시기가 늦은 만큼 경전 전래 역시 늦었으나, 가장 많은 경전을 들여오고 번역불사가 왕성하게 진행됐다. 『삼국유사』 등의 기록에 근거하면 신라에 처음으로 경전이 전해진 때는 진흥왕 26년(565)이다. 진나라에 유학했던 명관 스님이 불경 2700권(1700권이라고도 함)을 가져왔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어 575년 귀국한 안홍이 『능가경』과『승만경』 등을 가지고 왔다는 기록에서 구체적으로 경전 이름이 나타난다. 그리고 600년에 귀국한 원광은 진나라에서 『열반경』과 『섭대승론』등을 배웠다는 기록이 있고, 돌아와서는 「여래장경사기좦,「대방등여래장경소좦 등을 지어 새로운 지식을 신라에 전했다.

643년 자장이 최초로 대장경 반입

또 『해동고승전』에서는 진평왕 42년(620) 안홍법사가 서역 및 중국 승려들과 함께 당으로부터 귀국해 황룡사에 머물며 『전단향성광묘여경』을 번역했는데 이때 승려 담화가 그것을 받아썼다고 전함으로써 경전 이름을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자장은 643년 귀국해 『섭대승론』과 『보살계본』을 강의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특히 자장은 당나라 태종으로부터 선물 받은 『대장경』을 갖고 돌아왔다고 전해짐에 따라, 이때 자장이 가져온 대장경이 우리나라에 최초로 전해진 『대장경』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고려 고종 19년(1232)에 대장도감을 설치해 고종 35년(1248)까지 16년에 걸쳐 경·율·론 삼장을 집대성해 완성한 팔만대장경은 세계불교연구의 귀중한 문헌으로 평가받고 있다. 현재 해인사 장경판전(국보 52호)에는 대장경판 81258판(국보 32호)과 고려각판 2725판(국보 206호), 고려각판 110판(보물 734호)이 보관돼 있다.


고려 고종 35년(1248) 경·율·론 삼장을 집대성해 완성한 팔만대장경판(왼쪽, 국보32호)과 이 경판을 직접 찍어내어 만든 팔만대장경 인쇄본(사진 아래). 조선 고종 2년 인쇄한 팔만대장경은 월정사에 보관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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