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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한국불교 최초]28. 비구니(比丘尼) [상]

기자명 법보신문

539년 신라 법흥왕 따라 출가한 왕비 묘법<妙法>

 
명종5년(1550) 이자실이 그린 ‘관음삼십이응신도’의 부분도. 비구니 스님이 합장하고 앉은 모습이 나타난다.

일본 땅에 부처님 법을 전하겠다는 일념으로 바닷길을 헤치고 일본에 도착한 혜편(惠便)은 낯선 일본 땅에서 고구려에서 온 비구니 법명(法明)을 만나 서로 전법에 대한 뜻이 같음을 확인했다.

곧 의기투합한 둘은 함께 법을 전하며 이곳 저곳을 유행했고, 한 곳에서 자신들의 설법을 듣고 발심한 세 여성으로부터 출가 요청을 받게 됐다.
그러나 출가 비구니가 되기 위해서는 정식으로 계를 받아야 했기 때문에 승단이 성립되지 않은 일본 땅에서는 삭발염의를 하는 득도만 가능할 뿐 수계는 불가능했다. 이에 따라 당장은 이들의 출가를 받아들여 득도를 시키는데 만족할 수밖에 없었고, 이들이 여성이라는 점을 감안해 비구니 법명이 부처님 가르침을 전하는 교육을 하도록 했다.

처음으로 불교를 공식 수용한 고구려에 비구는 물론 비구니가 있어 그 활동이 적지 않았음을 유추할 수 있는 내용이다. 그러나 이를 알 수 있는 문헌은 국내에 존재하지 않으며, 다만 일본에 남아 있는 「일본서기(日本書紀)」와 「원흥사연기(元興寺緣起)」를 통해 그 존재를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이들 기록에 따르면 일본의 첫 출가자인 동시에 최초의 일본 비구니가 된 선신(善信), 선장(禪藏), 혜선(惠善)을 득도시킨 사람이 고구려 고승 혜편이었고, 이들에게 불법을 가르친 이가 다름 아닌 고구려 노비구니 법명이었다. 따라서 고구려에 분명하게 비구니가 존재하고 있었음이 확인된다.

고구려 비구니에 대한 기록은 법명을 언급한 대목이 전부라고 할만큼 미약하지만 백제 비구니에 대한 기록은 보다 구체적이다. 「일본서기」에는 숭준천황(崇峻天皇) 즉위전(卽位前, 587) 6월 갑자(甲子, 21일)에 선신니(善信尼) 등이 관리에게 “출가의 길은 계를 근본으로 삼아야 하므로 백제에 가서 수계법을 배울 수 있게 하소서”라고 청원하는 대목이 있다. 이같은 기록은 「원흥사연기」에도 비슷한 내용이 언급되고 있다.

결국 고구려 승려 혜편에게 득도하고, 고구려 비구니 법명으로부터 불법을 익힌 세 여성은 일본의 현실을 감안해 백제에 가서 계를 받고 정식으로 출가한 비구니가 되겠다는 원을 세우고는 지방 관리에게 청원을 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지방 관리는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에 온 백제 사신에게 백제의 출가제도에 대해 물었고, 백제에서 온 사신은 백제의 수계상황을 구체적으로 알려주었다.
이때 백제에서 건너간 사신은 비구니의 수계의식을 묻는 일본 관리에게 “니사(尼寺) 안에서 10명의 니사(尼師)를 청해 비구니 본계를 받고, 곧 법사사(法師寺)로 가서 10명의 법사(法師)를 청해 앞서의 니사 10명과 합친 20명의 스승으로부터 본계를 받는다”고 수계 과정을 설명했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법사사(法師寺)와 니사(尼寺)의 거리는 종소리가 서로 잘 들려야 하는 사이며, 보름마다 한 낮 안에 다녀올 수 있는 곳에 절을 짓는다”고 비구사찰과 비구니사찰의 위치까지 구체적으로 일러주었다.

日 문헌에 고구려·백제 尼 기록

이어 이들 일본문헌에 따르면 백제 위덕왕 24년(577)에 백제에서 경론과 율사 등 6인의 불교인을 일본에 보냈고, 이 가운데 비구니가 하나 포함돼 있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10년 후인 588년에 선신니 등이 백제에 와서 백제의 비구니로부터 육법계와 구족계를 받았다. 이렇게 백제에서 정식으로 계를 받은 선신, 선장, 혜선 등이 바로 일본 최초의 비구니이자, 일본 최초의 승려가 되었다.

고구려와 백제에 비구니가 존재했던 것은 물론 그 역할 또한 결코 적지 않았음을 알 수 있는 이 기록이 정작 우리나라에는 남아 있지 않다는 점이 안타깝기는 하나, 이렇게 라도 삼국시대 고구려와 백제에 비구니가 존재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은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고구려·백제와는 달리 신라의 비구니 역사는 현재 전해지는 기록에서 확인 할 수 있으며, 최초의 비구니가 누구였는지도 확인이 가능하다.
신라에서는 527년 이차돈이 순교하면서 법흥왕이 공식적으로 불교를 받아들였으나, 이미 그 이전에 타국의 전법 포교승들이 암암리에 들어와 포교의 싹을 틔웠다. 그 지역이 일선군이었고, 모례의 집은 비밀스러운 포교활동의 근거지가 되었다. 모례는 만약 들킬 경우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라는 점을 알면서도 아도를 숨기며 불교를 전할 수 있도록 했고, 아도는 우연한 계기에 신분을 속인 채 공주의 병을 치료하면서 미추왕의 신임을 받아 사찰을 건립할 수 있었다.

아도가 작은 사찰을 세우자 모례의 누이동생 사(史) 씨가 아도에게 귀의해 비구니가 되었고, 삼천기(三川岐)에 영흥사(永興寺)를 짓고 불법 전파에 나섰다. 이 사씨가 곧 신라 최초의 비구니이자 문헌에 등장하는 한국불교 최초의 비구니다.

그러나 학자들은 사씨가 불교 공인이 이루어지지 않은 신라에서 계를 줄 스승이 없어 구족계를 받을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에 사미니에 불과했을 것이라는 점을 들어 최초의 비구니가 될 수 없다고 보고 있다. 또 시대적으로도 실존 여부를 인정하기 어렵다는 게 보편적 시각이다. 즉 여기서의 아도가 374년 고구려에 온 아도와 동일 인물로 묘사되는 점이나 미추왕 때 왔다는 내용 자체가 상식선에서 크게 벗어난다는 것이다. 때문에 전래승들의 전설을 묶어서 신라적인 설화를 집대성해 아도라는 성자상을 확립했을 것으로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그렇다면 실제 기록상 하자가 없는 최초의 비구니는 누구일까.
그는 바로 신라 불교를 공인한 법흥왕의 비다. 법흥왕은 이차돈의 순교를 통해 불교를 공인하고 그 대가로 왕권을 강화하는데 성공했다. 따라서 불법을 통치 이념으로 삼아 불교를 널리 홍포하는데 주력하는 한편, 왕도에 흥륜사를 세웠으며 말년에는 직접 왕관을 벗고 가사를 입어 비구가 되었다. 그리고 법흥왕의 비는 흥륜사 맞은 편에 영흥사를 세우고 함께 출가해 비구니가 되었으며, 법명을 묘법(妙法)이라 했다. 이에 따라 흥륜사와 영흥사는 신라에서 최초의 법사사와 니사가 되었고, 묘법은 공식적으로 최초의 비구니가 되었다.
『해동고승전』에서는 이 부분을 “절 짓는 공사가 완성되자 법흥왕은 왕위에서 물러나 스님이 되어 법공(法空)이라 이름을 바꾸고 부처님 가르침에 따랐다. 절 이름을 대왕흥륜사라 했다. 왕비 또한 불법을 받들어 비구니가 되어 영흥사에 거주했다”고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삼국유사』에서는 이 대목을 “법흥왕이 이미 폐허가 된 절을 일으켰는데 절이 이루어지자 면류관을 버리고 가사를 입었으며(…) 처음 절 짓는 공사를 일으켰던 을묘년에 왕비 또한 영흥사를 세웠으며, 사 씨의 유풍을 사모하여 법흥왕과 같이 출가해 비구니가 되고 법명을 묘법이라 하였다.

기록 첫 등장은 모례 동생 사 씨

역시 영흥사에 살다가 여러 해 만에 세상을 마쳤다”고 기록함으로써 보다 구체적인 설명을 덧붙이고 있다. 법흥왕이 왕위를 조카에게 양위하고 삭발염의한 때는 대략 539년이다.
법흥왕비 묘법 역시 모례의 누이동생 사 씨의 예에서와 같이 구족계를 받은 사실관계를 증명할만한 기록은 없다. 그러나 신라가 불교를 공인한 해가 527년이고, 흥륜사와 영흥사를 짓기 시작한 때가 535년이었기 때문에 그사이 8년 동안 충분히 여건을 갖췄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또 이 때의 계사는 고구려나 백제 등지에서 초빙했을 가능성도 충분하며, 꼭 10명의 계사가 아니라 그보다 적은 수의 계사로 형식을 갖춰 수계가 이뤄졌을 가능성도 충분하다는 게 학계의 설명이다. 따라서 법흥왕비 묘법을 문헌상 나타나는 한국불교 최초의 비구니로 보고 있는 것이다.

신라에서는 이후로도 왕비와 귀족 집안의 여인네들이 출가해 비구니가 된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삼국사기』‘진흥왕조’에서는 “왕은 어려서 즉위해 일심으로 불법을 받들었다. 말년에 머리를 깎고 승복을 입었으며 스스로 법운(法雲)이라 불렀다. 왕비 또한 따라서 비구니가 되어 영흥사에 살았다”고 기록하고 있고, ‘진평왕조’에서는 “영흥사의 소조불상(塑造佛像)이 저절로 부서졌는데 오래지 않아 진흥왕비였던 비구니가 죽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진흥왕비는 사도(思刀)부인이었고, ‘진흥왕비였던 비구니가 죽었다’고 한 때는 진평왕 36년(614) 2월이었다.

따라서 법흥왕과 진흥왕이 대를 이어 출가했고, 왕비들 역시 대를 이어 비구니가 되었으며 영흥사에서 살다가 생을 마쳤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후 신라시대 왕비들의 출가 관련 기록은 더 이상 없다.

그러나 신라 진평왕과 문무왕 시대에 권력의 실세 중 한 사람이었던 김유신의 부인(지소 부인)이 출가했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열전』에 나타난다. 여기서는 “지소(智炤)부인은 태종 대왕의 셋째 딸이다.(…) 나중에 지소 부인은 머리를 깎고 승복을 입어 비구니가 되었다”고 김유신 부인의 출가 소식을 전하고 있다.

김유신의 처 지소부인도 출가

이어 진평왕 때 비구니 지혜(智惠)가 선도산신모(仙桃山神母)의 도움으로 자신이 머물던 안흥사의 법당을 새로 개수하였으며, 해마다 봄·가을로 선남선녀들을 모아 10일간 점찰법회를 열었다는 기록이 있다. 또 신문왕 때는 국사였던 경흥 대덕이 삼랑사에 주석 할 때 갑자기 기운을 잃고 눕자 어느날 한 비구니가 와서 병문안을 하고는 위로의 말을 하며 열 한가지 얼굴 모양을 지어 웃게 함으로써 병을 낫게 했다는 기록도 있다.

통일신라시대 비구니로는 828년 향조사(香照師)와 함께 재산을 희사해 탑을 세운 원적(圓寂)에 대한 기록이 있고, 통일 이전 원광의 점찰보에 시주한 비구니에 대한 이야기도 있다. 이는 곧 비구니들에게 재산소유가 인정되었음을 유추할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한편 「일본서기」에 “지통원년(持統元年, 687) 4월에 신라의 승니(僧尼)와 남녀 백성 22명이 무장국에 안주하게 되었다”는 기록이 있어, 신라 비구니 스님들이 해외에까지 나가서 활동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있다.

심정섭 기자 sjs88@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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