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동학당 김지하가 쓰는 화엄개벽의 길]⑦ 화엄개벽의 실천인 모심의 선(禪)

기자명 법보신문

이 시대 촛불은 옛 화백 민주주의의 부활이다

 
김지하 시인은 철거민이나 비정규직 등 쓸쓸한 대중의 소외와 불행의 문제는 『화엄경』 「입법계품」의 ‘보덕정광주야심’에서 해법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고 설명한다. 사진은 용산 철거민 참사 희생자들의 넋을 위로하는 천도재를 마친 불교계 시국법회추진위원회가 “생명보다 소중한 가치는 없다”며 거리를 행진하는 모습.

다시 말한다.
왜 이런 말을 할까?
바로 서양의 그 위험한 히스테리 소동을 한국의 거대언론과 대학과 지식인들이 마치 큰 구세주나 만난 듯이 환호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파는 우파대로, 좌파는 좌파대로, 자칭 엉터리 중도파는 중도파대로.
앞으로 필연코 다가오고야 말 생명위기 기후혼돈에 부딛쳐 그들은 서양의 이 소동을 핑계 삼아 저 몸서리나는 에코·파씨슴을 상륙시키겠다는 음모라도 꾸미고 있는 것인가.

이 나라에는 지금 세 갈래 길이 앞에 놓여 있다.
하나는 파씨슴, 에코·파씨슴이요 둘은 그저 새로운 원만중도요 그리고 셋은 순수한, 참으로 경건한 ‘모심(侍)’의 실천으로서의 ‘화엄개벽의 길’을 찾아가는 ‘촛불’의 가능성이다.
어느 길로 갈 것인가?
예수를 따르는 집단에게 말한다.
촛불 이후 최근의 한국과 아시아 후천개벽사의 기위친정(己位親政) 파도는 그야말로 거리의 현실로 바뀌어 산상수훈의 ‘네페쉬하야’들의 예루살렘 행진이라는 예수복음의 키포인트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용산 ‘철거민들의 죽음’이 단순한 대기업 노동조합의 머리에 붉은 띠 두른 그 파업행위던가?

촛불 시위의 전개양상은
불꽃 튀는 쌍방향 통행이고
자율적 집단지성의 결과다

일본 사회주의, 공산주의 운동은 아연 조직노동자 아닌 이른바 피차별 소수 민중, 비정규직 중심의 해체주의적 자율운동으로 변모하고 있다. 중국의 농촌과 도시에서 공산당 당국에 얻어맞고 개처럼 끌려가는 민중이 성경의 ‘네페쉬하야’, 언필칭 ‘기위(己位)’즉 ‘꼬래비’, 지옥의 삶을 사는 ‘대황락위(大荒落位)’ 아니면 무엇인가?
그들의 예루살렘 입성행진과 무덤으로부터의 부활이 본디의 임금자리, 친정복귀(親政復歸) 아니고 무엇인가?

촛불시위의 전개양상은 철저한 디지털네트워킹에 의한 것이고 불꽃튀는 쌍방향통행의 결과인 자율적 집단지성의 결과다. 똑같은 것은 아니지만 이는 프랑스 68혁명 연관의 들뢰즈나 푸코, 자유의 진화론 등의 이른바 해체주의나 개체·융합의 자기조직화 원리로 유추될 수 있다. 그리고 그 생명평화의 길의 주체인 여성과 어린이는 이리가라이 등 서양 페미니슴의 새로운 신성(神性)적 상황창조의 주동력에 연결될 수 있다.

이 촛불이 서양의 지식인, 종교인, 여성과 젊은이들에겐 보이지 않는 것인가?
그러나 그런 가능성이 분명 있다 하더라도 촛불은 역시 아연 옛 화백(和白) 민주주의의 부활이라는 점에서 아시아 네오·르네상스의 시작이며 광활한 세계그물의 그 수많은 그물코마다 무수한 보살들이 저마다 다른 소리로 한 진리를 법문하는 ‘월인천강(月印千江)’과 ‘일미진중함시방(一微塵中含十方)’의 ‘정세개벽(靖世開闢)’적인 ‘신개념의 군중행동(엠네스티보고서)’이란 점에서 어김없는 ‘화엄개벽의 길’인 것이다.

화엄개벽의 길!
이것이 동서양과 온 세계, 전 지구와 우주의 진정한 새 삶을 위한 유일한 활로다. 그리고 이것은 지금 막 우리 앞에 벌어지고 있는 지구문명현실 자체의 급박한 요구이기도 하다.
미국발 금융위기를 계기로 미국국가정보위원회가 내린 현실판단은 다음과 같다.
‘세계권력과 자본의 중심이 서쪽에서 동쪽으로 이동한다는 것과 동시에 전세계가 각기 자기위상을 유지하는 다극체제(多極體制)가 형성되어 간다.’
이것은 혼돈학에서 ‘중심성이 있는 해체적 네트워크(the integrated network)’라는 바로 그 명제다.

이것이 곧 ‘개벽 속의 화엄세계’다. 수수억천만 털구멍마다 서로 다른 무수한 부처님의 눈부신 광명이 다 열리되 그 모든 것이 화엄주불(華嚴主佛) 비로자나의 중심성에 빠짐없이 연결되는 바로 그것이니 왈 ‘화엄개벽’이고 이러한 세계로 나아가는 끊임없는 ‘몸의 모심 선(禪)’이 곧 ‘촛불, 화엄개벽의 길’이다.
촛불의 개벽적 의의와 연결하여 현대세계 전체에 가장 중요한 문제점들을 「입법계품」을 중심하여 그 밖의 『화엄경』 부분의 여러 선지식들의 진리로부터 밝혀내는 것은 바로 현대세계의 다극체제 그 자체의 ‘월인천강’을 보장하는 ‘일미진중함시방’의 중심성 바로 그것이기도 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지금 새 세계전개의 신문명적 중심에로 들어가고 있는 동북아시아와 우리사회의 가장 첨예한 사상문화적인 현안이기도 하다.

목전의 유물론 극복을 ‘현수보살품(賢首菩薩品)’과 「입법계품」의 ‘바산바연지주야신 (婆珊婆演底主夜神)’에서, 또한 그곳에서 신세대의 개체성과 대승적 화엄성을 발견하며 이러한 방면의 진리를 개벽적으로 실천하는 역학(易學)적 원리를 김일부 정역의 황중월(黃中月)과 간태십일용정(艮兌十一用政)에서, 화엄개벽과 진화론, 시간관의 관계는 불승수미정품(佛昇須彌頂品)에서, 철거민이나 비정규직 등 쓸쓸한 대중의 소외와 불행의 문제는 「입법계품」의 ‘보덕정광주야신(普德淨光主夜神)’에서, 그 개벽의 비밀은 정역의 기위친정과 십일일언(十一一言) 및 십오일언(十五一言)의 직접민주주의 정치실현에서, 어린이, 여성, 쓸쓸한 대중 등의 중생과 부처의 해탈문사이의 관계는 『화엄경』도처에 편재하되 그 개벽적 원리는 기위친정(己位親政)과 무위존공(戊位尊空) 사이의 삼팔동궁(三八同宮)에서, 성불(成佛)과 무여해탈(無餘解脫)의 문제는 정역의 삼공(三空) 즉 공(空), 귀공(歸空), 존공(尊空)사상에서, 대화엄의 비로자나불 완성과정의 삼보(三寶)의 개벽적 실천원리는 삼극(三極), 즉 십무극(十無極), 오황극(五皇極), 일태극(一太極) 사상에서.

지금 대망중인 ‘착한 경제’또는 ‘호혜시장(互惠市場)’의 원리는 삼주인과(三周因果)의 입법계 일품, 대과 이종상도(大科 二種常道) 중의 ‘먼지를 함께 뒤집어쓰되 물들지는 않는 중생의 삶을 위한 항상된 진리의 실천(同塵不染 利生常道)’에서, 그리고 그 개벽적 실천은 주역의 ‘산과 못이 생명을 연결함(山澤通氣)’에 근거한 ‘산과 못이 서로 연대함(艮兌合德)’을 원리로 한 한미간의 다양한 개혁과 한가지 문화의 통일(禮三千而義一)을 조건으로 하는 신시(神市)의 회복, 즉 ‘호혜시장’‘착한 경제’‘비단 깔린 장바닥’이라 하겠다.

현대세계 대혼돈인 환경
생명·생태 등 만물해방의
원리는 묘덕원만신에 있다

초미한 현대세계의 대혼돈인 이른바, 환경, 생태, 생명, 기후 및 만물해방의 새 원리는 「입법계품」 ‘묘덕원만신(妙德圓滿神)’에 있고 그 개벽원리는 여성의 생명력과 달의 변화에 입각한 해와 우주핵심의 이동 즉 ‘영동천심월(影動天心月)’의 우주개벽론이다. 그것은 북극태음의 물의 운동과 부인 몸 속의 경도(經度)변화의 일치에 의한 무윤력(無潤曆), 365일이 360일로 변화하는 춘분(春分) 추분(秋分) 중심의 서늘하고 온화한 사천년 유리세계(琉璃世界)의 도래에 그 초점이 있다.

한국과 현대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변화의 주역인 저 촛불의 주체들, 여성, 부인, 어린이, 쓸쓸한 소외 천민의 문제는 『화엄경』과 개벽사상의 어느 곳에서 그 새로운 우주사상적 근거를 발견할 것인가?
「입법계품」의 구파여인(瞿波女人)에서 사랑 자체를 해탈문으로 하는 여성의 재발견, 마야부인(摩耶夫人)에서 모든 부처와 비로자나불 자신의 친어머니를, 어린이인 변우(遍友)동자에게서 그리고 또 동녀들에게서 뭇 이웃을 가없이 사랑하는 우주적 친화력과 깊은 모심의 신비력을, 그리고 숱한 쓸쓸한 대중선지식과 창녀(娼女)에게서 밑바닥 부처의 눈부신 흰 그늘의 숭고와 심오를, 그리하여 정역과 동학에서 화엄개벽의 길, 즉 그 실천의 주동력인 고통의 어둠이라는 숨은 차원에서 해방과 환희의 빛이라는 드러난 차원으로의 ‘복승(復勝)’의 고리인 모심(侍)의 선(禪)적 실천의 원리가 ‘기위친정’과 ‘시천주(侍天主) 주문’에 집중되어 있다.

‘기위친정’에 관해서는 이제껏 누누이 얘기해왔다.
그렇다면 그 실천적 몸의 참선인 ‘모심’또는 ‘시천주(侍天主)’는 무엇인가? 그것이 후천개벽 주문임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지만 불교의 화엄과는 도대체 무슨 관계인 것인가?
내가 지금 ‘화엄개벽선(華嚴開闢禪)’, ‘화엄개벽의 길’, ‘모심선(侍禪)’이라 부르는 수련은 수운, 해월, 의암 단계의 주문수련방식이 아니다. 주문은 똑같은 내용이지만 그 수련 형식은 매우 다르다.

몸 안에서 하는 것이다.
동학의 본주문의 시작인 모심 즉 ‘侍’를 아랫두리 회음부에서, 그 밖의 주문을 각각 내단전(內丹田)인 전중()의 중단전과 기해(氣海)의 하단전과 수해(髓海)의 상단전에서 각각 두 번 아랫쪽에서 윗쪽으로 옮겨가며 수련하는 것이다.
주문의 깊은 화엄개벽적 내용과 회음혈까지 포함한 전통 단전수련법의 신령한 생명력을 결합하는 것이다.

동학주문은 세 가지인데 첫째는 강령주문(降靈呪文) 8자, 둘째는 본주문(本呪文) 13자, 셋째는 실천주문(實踐呪文) 18자다. 본디는 둘째 본주문까지만 있지만 나는 본주문에 대한 수운선생의 해설 뒤에 붙은 ‘故’즉 ‘그러므로’이후를 ‘실천주문’이라 해서 함께 수련해왔다. 실천이 중요한 시대이기 때문이다.
첫째의 강령주문은 ‘지극한 기운(至氣)’, 즉 텅 비어 신령하고 가득가득차 간섭치 않는게 없고 명령하지 않는게 없는, 형상도 볼 수도 없는 태초의 혼돈한 근본기운이 극에 이른 오늘 개벽의 때에 우주에 가득차 있는 그 엄엄한 질서, 즉 비로자나불의 화엄체(華嚴體)가 내 몸에 가득 가득히 내리기를 비는 것이다.

본주문의 모심(侍)은 현대서양진화론의 내면의식과 외면 복잡성의 상승관계로서의 수억천년 우주진화와 현대세계 인류의 각자 각자가 모두 자기 나름나름으로 우주의 각개적이면서도 전체융합적인 화엄개벽을 실천 추진하는 선(禪)적 주동력이라는 것이다. 모심(侍)의 뜻 뒷부분인 ‘각지불이(各知不移)’의 ‘불이(不移)’는 ‘옮기되 옮기지 못함(移不移)’으로서 송나라 주자(朱子)가 ‘화엄’을 유교철학 개념으로 번한 한 것이다. 그리고 그 주체인 한울은 ‘님’임에도 아무 설명이 없는 텅 빈 ‘무(無)’ 그 자체로서 화엄 주불(主佛) 비로자나의 거대한 침묵을 뜻한다. 텅 빈 침묵이 모심의 추진자인 셈이다.
‘조화정(造化定)’은 노자의 ‘무위이화(無爲而化)’의 이상사회와 개벽을 말하고 이에 일치하는 유교적 참여와 불교적 초탈을 함께 제시한다.
그리고 이를 잊지 않고 끝끝내 수련하고 공부하면 마침내 ‘만사지(萬事知)’즉 그 ‘만사’의 뜻인 ‘수가 많음(數之多)’, 다시 말하면 수수억천만 경우의 수와 그 수의 복잡한 양태와 생성 즉 ‘화엄’을 ‘지(知)’, 즉 ‘그 이치를 공부해 스스로 알면서 동시에 그 앎을 계시의 형식으로 내림 받음(知其道而受其知)’이니 바로 다름 아닌 ‘화엄개벽’이겠다.

실천주문은 외적 실천과 내면 공부 사이 안팎의 확충법(擴充法)으로서 실천과 동시에 치유 과정이다. 그리고 이 결과로 ‘지화지기지어지성(至化至氣至於至聖)’즉 마지막 ‘오메가포인트’에 이르러 처음 강령주문의 그 비로자나불의 혼혼탁탁한 화엄체로 스스로 변화하면서 동시에 그 내면으로부터 태어나는 무한무궁의 새로운 우주적 성스러움에 도달하므로서 마침내 ‘화엄개벽’을 완성한다는 것이다.
바로 이같은 동학의 ‘화엄개벽’의 모심선(侍禪)은 이후 남조선사상사에 여하히 발전되는 것일까? <계속>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