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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성실이 인문학 위기 불렀다”

기자명 법보신문
  • 교학
  • 입력 2009.02.16 14:50
  • 댓글 0

불교사연구 이끄는 한중연 허흥식 명예교수
새 자료 발굴로 논문 200여 편 집필
남방불교전래설·나옹법통설 등 주창
새벽 3시부터 밤 11시까지 학문 매진

책이 귀한 시대는 지났는지 모른다. 매년 3~4만권의 신간이 쏟아지고 있으며, 유통되는 책도 국내에서만 수십 만 권에 이른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 책의 범람 속에도 책이 갖는 장점은 오히려 굳건해지고 있다. TV, 인터넷 등 매체가 많은 정보를 줄 수 있을지언정 책이 갖는 진지함과 깊이를 쫓아가기에는 역부족이기 때문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 허흥식(67·사진) 명예교수의 저술은 책이 가질 수 있는 전통적인 미덕을 골고루 갖췄다는 평을 받고 있다. 비록 대중의 구미의 맞춰 얄팍하기를 철저히 거부하고 있지만 잘 덖은 차처럼 읽으면 읽을수록 깊은 맛이 우러나기 때문이다.

『고려과거제도사연구』(1981), 『한국금석연구』(전3권, 1984), 『고려불교사연구』(1986), 『진정국사와 호산록』(1995), 『고려로 옮긴 인도의 등불』(1997), 『고려의 불복장과 염직』(1999), 『조선시대의 과거와 벼슬』(2003), 『고려의 문화전통과 사회사상』(2004), 『한국신령의 고향을 찾아서』(2006), 『삼족오』(2007) 등을 비롯해 지난해 말 펴낸 『고려에 남긴 휴휴암의 불빛 몽산 덕이』에 이르기까지 허 교수의 저술 대부분은 그 자체로서 연구의 1차 사료가 되는 동시에 수많은 연구 과제를 던져주는 묵직함이 있다. 또 허 교수 스스로 놀라운 주장을 잇따라 제기해 때로는 세간의 관심을 모으기도 하고 때로는 철저한 침묵의 세례를 받기도 한다.

남방불교설 주장도 그 중의 하나다. 허 교수는 신라시대 최치원이 쓴 봉암사지증대사적조탑비(鳳巖寺智證大師寂照塔碑) 중 ‘비파사가 먼저 이르고 마하연이 후에 전래됐다(毗婆娑先至…摩訶衍後來)’는 구절을 통해 남방불교전래설이 허구가 아니고 역사적 사실로 인정해야 한다고 말한다. 즉 ‘비파사(毗婆娑)’는 오늘날의 ‘위빠사나’로 남방불교를 지칭하는 단어이고 ‘마하연’은 대승불교를 일컫는 말로 ‘남방불교가 먼저 오고 그 뒤에 대승불교가 전래됐다’고 신라의 최치원이 이미 비문에서 밝히고 있음에도 지금껏 부정되고 있는 것은 ‘무지이자 넌센스’라는 것이다.

허 교수는 또 인도 나란다대학이 11세기 이슬람의 침입으로 사라졌다는 학설에 대한 재검토의 필요성을 강하게 주장하기도 했다. 14세기 때 인물로 중국불교와 한국불교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던 지공 스님이 직접 인도 나란다대학에서 공부하고 스리랑카에 건너갔음을 지공 스님 스스로 명확히 밝히고 있는 점에 주목했다. 요컨대 지공 스님의 초상화가 유명사찰마다 모셔져 있었듯 한국불교에 미친 그의 영향력이 엄청났고, 그러한 현상은 곧 인도불교와 스리랑카불교가 지공 스님을 통해 한국불교에 이식됐음을 의미한다는 것이 허 교수의 놀라운 주장이다.

이밖에도 일제가 오랫동안 숨겨두었던 묘향사 보현사 자료를 토대로 우리나라의 건국설화가 『삼국유사』의 단군설화 이외에도 백호가 등장하는 또 다른 환인설화가 있었음을 밝히고 이것이 오호십육국 중 강족(羌族) 계통 민족에서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음까지 규명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고려말 나옹 스님을 중심으로 한 법통설을 주장하는 등 학계에서 허 교수 만큼 ‘쇼킹’하고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한 학자도 드물다. 그러나 관련 학자들이 설령 그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그의 연구 성과까지 피해가기는 어렵다. 그의 논문 중 상당수가 새로운 자료의 발굴을 통해 자신의 논리를 전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허 교수는 최근 펴낸 『고려에 남긴 휴휴암의 불빛 몽산 덕이』에서도 지난 15년간 몽산덕이에 관심을 기울여 새로운 자료를 발굴하고 이를 통해 그에 대한 다각적이고 체계적인 주장을 전개하고 있다. 또 몽산덕이의 직주도덕경이나 사설(四說) 등 그를 통해 동아시아 학계에 처음 소개되는 몽산덕이의 새로운 저술도 많이 실려 있다. 특히 여러 자료를 비교해 교감하고 표점을 찍기까지 마치 ‘냇가의 모래를 건축으로 바꾸는 작업과 다름없는 번거롭고도 지루한 과정’을 마다하지 않고 방대한 몽산의 저술 전체를 이 책에 게재하고 있는 것이다.

이 책에서도 허 교수는 조계종의 개조인 보조지눌(1158 ~1210)이 육조단경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직접 서문을 썼음에도 조계수선사 11조 만항(1259~1319)이 몽산덕이의 육조단경을 유포했던 이유에 대해 새로운 주장을 하고 있다. 즉 허 교수는 보조지눌의 서문이 담긴 육조단경의 내용이 곧 육조단경 덕이본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허 교수에 따르면 중국 고승의 인준이 필요했던 만항이 보조의 서문이 담긴 육조단경을 휴휴암 몽산에게 전달했고, 이에 몽산은 이 판본이 그 어떤 다른 육조단경보다 탁월하다고 판단하고 이를 간행했던 것. 허 교수는 그 근거로 몽산이 ‘통상인이 가져온 단경’을 읽었다는 기록과 함께 덕이본 육조단경에만 신라말 육조 혜능의 머리(頂相)를 옮겼다는 전설과 내용을 암시하는 유일한 판본이라는 점을 제시하고 있다.

이렇듯 허 교수가 기존의 학술을 깨는 숱한 저술과 200여 편의 논문을 쓸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그의 학문적 성실함에서 비롯된다는 것이 주변의 평가다. 정년퇴임을 한 지금도 새벽 3시면 어김없이 일어나 책상 앞으로 향하고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밤 11시까지 그 자리를 묵묵히 지키는 놀라운 ‘근기’가 뒷받침되고 있는 것이다.

“때때로 내 의지로 불교사를 연구하는 게 아니라 누가 내 연구를 시키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도 학문의 길이 문득문득 지겨울 때가 있습니다. 그래도 이겨내야지요. 학문은 수행과 마찬가지로 내 자신을 완성해나가는 길이니까요.”

허 교수는 앞으로 지금까지 연구해온 과제들이 많은 만큼 이를 보완해 책으로 엮어내는 한편 외국에 소개해도 좋을 한국불교사를 집필한다는 계획이다.
“학문은 겸허함과 성실함에 의해 성숙한다”고 말하는 허 교수는 “인문학의 위기는 불성실한 인문학자들이 초래한 것이지 인문학 자체가 초래한 것이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이재형 기자 mitra@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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