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박노해를 봤다. 신부 쪽의 손님으로, 근자에 우리 절에서 치렀던 결혼식 하나의 축시의 낭송도 겸해서다. 식이 파하고 차를 대접하며 한담을 나눴다. 물론 시인과 나는 초면이었다. 내가 “~씨”를 붙이지 않는 것은 그의 시집 『노동의 새벽』을 읽고 “얼굴 없는 시인”이라는 말이 떠돌던 한 때의 이미지 때문이기도 하다. 이렇듯 나에게 별다른 호칭 없이 그냥 이름만 부르고 싶은 분으로는 김지하 시인과 곽재구 시인이 더 있다. 출가를 앞둔 나에게 굳이 선물이라며 동아리의 후배 아이가 손에 들려주던 시집이『애린』이었다. 지금까지 출간된 시인의 책을 거의 모두 사서 읽었으니 열혈 독자라 하겠다.
언어와 생각으로부터 자유롭기가 그리 쉽던가! “화엄개벽”이라는 통째로 한 세상을 열어 보이는 이 분은 신묘(神妙)할 뿐이다. 시인이 해남 읍내의 한 고택에 머문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는, 방학 때면 다녀오던 막내 고모 댁 초입의 큰 집들 사이 어디일까, 아니면 독서 경시대회에 나가 노모님이 싸준 찰밥 도시락을 꺼내먹던 느티나무 숲 어디쯤일까 그려보기도 했었다. 또 출가하던 해 이른 봄에 시를 쓰던 친구가 엽서에 빼곡히 적어 보내준 이후로 이날까지 외우고 다니며 지금도 혹 법회 중에 눈발이라도 날리면 눈을 감고 대중들에게 암송해 보이는 ‘사평역에서’의 곽재구 시인인데, 그 시를 처음 읽던 감동은 지금도 줄지 않고 있다.
아무튼, 시인은 사형언도를 받았다가 98년 석방된 이후 이 땅에서의 시야를 벗어나 세계의 빈곤·분쟁지역을 다니며 평화운동을 펼치고 있었다. 본인은 이것을 “묵언정진”이라 했다. 오랜 수감 생활의 흔적일까? 그의 발음은 가끔 잘 굴러가지 않았다. 난 어려서 선방 두 철 동안 묵언을 해본 적이 있다. 말을 안하다보면 말을 잊어버릴 때가 있는데, 선천적인 게 아니라면 분명 이와 비슷할 것이다. 이런 아픔은 반드시 생물학적인 옹이를 남긴다. 그의 축시에서 난 여실하게 느꼈다. 오늘은 사랑 하나로 눈부신 날/ 오늘처럼만 사랑하자/ 검푸른 창공 어느 먼 곳에서/ 그대 별과 내 별의 입맞춤이 있어/ 그 별빛 이제 여기 도착해….
세간의 복잡함을 알길 없는 나의 첫 주례. 하긴 숲 속에 든 사람은 숲을 모르지만 밖에 있으면 볼 수 있듯이, 그렇다면 못할 것도 없겠다는 생각으로 나섰던 것이다. 짧게 했다.
“부처님 문중에는 한 법도 버릴 것이 없답니다. 부처님은 일체를 부처로 보기 때문에 부처님이지요. 그러나 중생은 부처 따로 중생 따로, 좋음 따로 싫음 따로 봅니다. 그리고 좋은 것은 취하려 하고 싫은 것은 버리려합니다. 잘하려고 하는 것이 중생의 큰 병통입니다. 해처럼 달처럼 물·바람처럼 무심하면 이 인연이 오래 갈 것입니다. 부디 서로 너무 잘하려고 하지 마세요.”
삶에 완성이 있겠는가! 오랜 세월 인간 세상을 아파해온 시인이 세상을 아름답게 보려 했다면 난 그냥 무심을 얘기한 셈이다. 그가 『사람만이 희망이다』에서, “…길 찾는 사람은 그 자신이 새 길이다/ 참 좋은 사람은 그 자신이 이미 좋은 세상이다…,”했던 시적 통찰은 탁월한 삶의 응시이기도 하다. 그래서 소동파는 “금생에 와서 읽는 책으로는 이미 늦다”고 했을까? 시인이 놓고 간 레바논 분쟁 기록물을 단 숨에 읽고 난 늦은 저녁, 생각해 보니 공양 때를 놓치고 있었다.
법련사 주지 보경 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