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명법문 명강의] 금강선원 원장 혜거 스님

기자명 법보신문

지혜-공덕-신심 하나 되면 그 자리가 곧 佛道

불교의 모든 경전은 자기 수행위주로 돼 있습니다. 불교는 자기 수행의 종교이지 신앙의 종교가 아닙니다. 그런데 오직 『법화경』이 있어 신앙의 근거를 딱 자리매김해주고 있습니다. 만약 『법화경』이 없었다면 불교는 종교가 되기보다는 유교나 도교처럼 하나의 사상으로 남았을지도 모습니다. 또한 그 내용이 얼마나 현실적이고 사람들에게 적절하며 좋았는지 기독교 성경의 절반 이상이 『법화경』 내용 그대로입니다.

굳이 절반은 아니더라도 굵은 뼈대 대부분은 『법화경』의 가르침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세중생을 향해 ‘내가 너희를 반드시 구제하겠다’고 약속한 것도 『법화경』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이 법계가 모두 불타서 진멸한다하더라도 내가 그 자리에 있어 너희를 안온하게 해주겠다’고 약속하신 것 또한 『법화경』입니다. 기독교에서는 그 말을 가져다 ‘불로 심판하더라도 내가 너희를 구원 하겠다’고 그대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법화경’ 듣고 다시 태어난 사리불

『법화경』 첫 장에 「비유품」이 나오는데 부처님께서 사리불 존자에게 「비유품」을 설하십니다. 사리불 존자는 지혜제일 존자입니다. 그런 사리불이 『법화경』 설법을 듣고는 “저는 부모로부터 태어난 것이 아니라 부처님의 입으로부터 태어났습니다”고 했습니다.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다시 태었다는 말입니다. 사리불 존자는 부처님의 법문을 통해 그 몸이 육신에서 벗어나 법신으로 변한 것입니다. 즉 팔만법문을 통해 운명이 바뀐 것입니다. 사고의 방식이 바뀐 것이고 그로인해 불도를 얻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 모여 이렇게 좋은 법당을 만들어 모신 이유는 법당 잘되게 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스님이 이곳에 법당을 만든 이유는 이 법당에서 여러분들의 육신이 법신으로 바뀌는 화생이 이뤄지길 바래서입니다. 여러분의 운명이 전환되는 것, 여러분이 중생의 운명에서 부처의 운명으로 바뀌기를 서원해서입니다.

중생의 운명이 부처의 운명으로 바뀌지 않는다면 부처의 세계에 살더라도 부처와는 상관없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부처의 운명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부처의 종자가 돼야 합니다. 여러분은 본래 부처님 종자입니다. 그런데 자기가 부처종자인줄 모르기에 부처님 법을 들으면서도 그 법을 듣지 못합니다. 소나 돼지가 사람을 부모로 모실 수 없듯이 우리는 분명 부처 종자이지만 부처님 법에 의지하지 않는다면 소가 사람을 부모로 모시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법화경』은 불교의 철학적인 사고, 수행일변의 사고를 종교로 바꾸는 가르침입니다. 사리불 존자가 부처님께 들은 첫 번째 설법이 『아함경』 『방등경』이었는데 이 내용은 전부가 소승입니다. 종교적 내용보다는 수행을 바르게 하기 위한 내용이 대부분입니다. 또한 지혜만 가르치지 공덕이 결렬돼 있는 것이 소승이기도 합니다. 지혜에 치중하는 이유는 잘못 살고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잘못 사는 것을 일깨워주고 잘 살 수 있도록 가르쳐 주는 경전이 『아함경』입니다.

『아함경』의 핵심은 ‘자제’입니다. 그 자제를 시키는 수단이 계율입니다. 화 나려고하면 화를 참고 욕심이 나면 욕심을 참아라. 이렇게 자제시키는 것이 『아함경』입니다. 과속하던 운전자가 단속카메라보고 속도를 줄이듯 계율은 지나친 것을 멈추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사리불 존자 역시 이런 가르침에 익숙해져 있었고 그것을 그대로 실천해 지혜제일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아함경』에 익숙해져 있는데 부처님이 『법화경』을 설하시는 것을 보니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리불 존자가 부처님께 “저는 부처님을 따라 다니며 부처님의 말씀대로 틀림없이 실천했는데 왜 오늘 법회는 이렇게 다릅니까. 왜 지금까지 듣지 못한 법문을 이제서야 해 주십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런데 사리불 존자가 그렇게 물은 후 사리불 존자는 그 이유를 스스로 알아버렸습니다. 사리불 존자가  다시 말하기를 “그것은 저의 잘못이지 부처님의 허물이 아닙니다”라고 참회를 한 후 “나는 부처님의 입으로 다시 태어났고, 법으로 화생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부처님의 정법을 이루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법화경』의 내용을 살펴보면 사바의 중생살이와 똑같습니다. 특히 화택의 비유를 보면 그러합니다. 『법화경』 「비유품」에는 집에 불이난 장자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집이 불에 휩싸여 걷잡을 수 없이 불길이 치솟는데 아이들은 집안에 앉아 노느라 나올 줄을 모르는 것입니다. 장자가 자식들을 구하려고 소리치지만 아이들이 노느라고 정신이 팔려 듣지를 못하자 장자는 아이들이 제일 좋아하는 것이 수레임을 떠올리고는 양이 끄는 수레, 사슴이 끄는 수레, 소가 끄는 수레를 마련해 놓고 아이들을 부릅니다. 아이들은 수레가 있다는 말에 귀가 번쩍 뜨여 밖으로 나왔는데 나와서 보니 집이 불타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밖으로 나온 아이들은 장자에게 고맙다고 하기보다는 어서 수레를 태워달라고 졸랐습니다. 그러자 장자가 아이들에게 백우거, 즉 “흰 소가 끄는 수레를 주마”하고 말합니다. 이 백우거란 곧 부처님 자신의 수레입니다. 그러므로 『법화경』은 백우거를 전수해준 경전, 즉 부처님 자신을 전수해 준 경전입니다. 사리불 존자는 그때까지 양이 끄는 수레를 타고 다녔던 것입니다. 그것만으로도 좋았는데 『법화경』을 통해 흰 소가 끄는 수레를 내주니 비로소 완전히 깨닫고는 흰 수레를 타게 된 것입니다.

그럼 여기서 수레에 대한 개념을 알기 쉽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수레는 여러 측면에서 설명할 수 있지만 경전의 측면에서 설명 드리겠습니다. 최초에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종교는 인천교, 즉 인간과 천상의 존재들을 대상으로 천당과 지옥에 관한 가르침을 펴셨습니다. 누구나 쉽게 알아듣도록 천당과 지옥에 관해 설명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지옥 안 가려고만 하지 말고 천당을 가기 위해 노력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면서 가르치신 것이 소승불교, 즉 양이 끄는 수레였습니다. 양이 끄는 수레는 혼자만 타고 가는 작은 수레입니다. 여기에는 계율 위주입니다. 소승불교의 핵심은 계율을 지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처음 인천교를 설하신 이유 또한 중생의 수준이 계율을 가르쳐도 계율을 안 지켰기 때문입니다.

중생에서 부처로 운명을 바꾼다

인천교의 가르침을 통해 중생들이 지옥은 안가겠다고 원력을 세우게 되었는데 이때의 의지는 부처님의 원력에 의지해 지옥을 면하는 것이니 여기까지는 기독교와도 비슷합니다. 하지만 부처님께서는 구제해달라고 하는 사람들을 모아놓고 “차안에서 피안으로 건너려면 바다를 건너야하는데 배가 필요하다”며 처음에는 부처님의 배를 타고 가는 법을 설하시다가 나중에는 스스로 배를 만들어 타고 가는 법을 설하십니다. 이 홀로 서는 법을 가르치신 것이 『아함경』, 소승불교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사리불처럼 모두 홀로 서서 계율을 잘 지키니 “이제는 혼자만 가지 말고 중생을 함께 태우고 가라”고 가르친 것이 대승불교입니다.

대승불교의 핵심은 두 가지, 지혜와 공덕입니다. 항상 이 두 가지가 병행을 합니다. 『금강경』을 펼쳐보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설하시는데 이것이 곧 지혜입니다. 그런데 대승에서 지혜만 취하고 공덕을 성취하지 않으면 오직 반야일 뿐 바라밀이 아닙니다. ‘반야바라밀’이 되질 않는 것입니다. 지혜를 얻어야 반야이고 공덕이 따라가야 바라밀이 이뤄집니다. 그래서 대승불교의 핵심은 지혜와 공덕인 것입니다.

스스로 배 만들어 중생을 구해야

그런데 세월이 흐르며 소승과 대승 사이에 불화가 일어났습니다. 대승은 소승을 보고 계율에 붙잡혀 중생을 외면한다고 나무라고, 소승은 대승을 보고 자신의 해탈도 이루지 못했으면서 남의 일에 참견한다고 반박을 했습니다. 부처님께서 이를 보시고 소승과 대승의 융합을 위해 설하신 것이 ‘돈교사상’이고 그것이 설해져 있는 경전이 『원각경』입니다. 『원각경』은 소승불교와 대승불교를 융합한 사상입니다.

그런데 『법화경』은 소승불교와 대승불교만 융합한 것이 아니라 인천교까지 융합한 것입니다. 종교성을 갖고 있던 인천교가 포함돼 있기 때문에 계율도 지켜야 하고 지혜도 닦아야 하고 공덕도 쌓아야 하고 종교성도 철저하게 있어야 하는 것이 『법화경』입니다. 전부 융합을 해야 합니다.

이와 같은 소승불교-대승불교와 더불어 여러분이 반드시 잊지 말아야 할 또 하나는 부처님을 향한 간절한 신심이 이 모든 것의 바탕이 돼야 한다는 점입니다. 간절한 신심을 바탕으로 지혜를 열고 공덕을 쌓으면 불도를 얻는다고 했는데 이렇게 되었을 때 얻을 불도가 어디에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되는 그 자체가 불도인 것입니다.
오늘 법회에 자리를 함께하신 모든 분들께서는 이점을 명심하고 실천하시어 대구 지역 뿐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성불로 이끄는 모범 도량으로 가꾸어 나가시길 기원하겠습니다.  

정리=남수연 기자 namsy@beopbo.com


이 법문은 대구 법왕사에서 진행 중인 제19회 법왕사 백고좌 대법회 가운데 3월 14일 봉행된 11일차 법회에서 금강선원장 혜거 스님이 설하신 법문을 요약 게재한 것입니다. 


혜거 스님 은 1959년 영은사에서 탄허 스님을 은사로 득도 하고 1961년 월정사에서 범룡 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수지했다. 탄허 스님 회상에서 대교과를 수료하고 영은사에서 역경사 양성 3년 결사를 수료 했다. 이후 김제 흥복사 선원 등에서 안거했고 1986년 조계종 20교구본사 선암사 주지 소임 등을 역임했으며 1988년 4월 8일 서울 강남구 개포동에 금강선원을 개원했다. 불교방송, 인터넷불교대학, 대원불교대학, 서울불교전문강당, 불교텔레비전 등 다양한 매체와 강단에서 경전 등을 강의하는 한편 2005년 탄허불교문화재단 이사장에 취임, 현재 금강선원 선원장으로 신도교육과 불법 홍포에 매진하고 있다.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