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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가가 맑아야 희망 줄 수 있다”

기자명 법보신문
  • 사설
  • 입력 2009.04.29 09:41
  • 댓글 0

[부처님오신날 특집 인터뷰] 조계종 원로의원 종하 스님

 
조계종 종회의장 등 종단의 중책을 두루 지냈던 종하 스님은 청정성 회복을 한국불교의 첫 과제로 꼽았다.

지난 20세기는 ‘극단의 시대’였다. 전례 없는 풍요로움과 빈곤, 무자비한 살육과 평화에의 갈망, 종교적 결속과 분쟁, 독재정치와 자유 등 20세기는 극단으로 내몰린 100년이었고 한반도는 그 극단의 정점에 서있었다.

혹독한 식민지 지배를 지나 무자비한 전쟁과 분단, 독재와 민주화운동, 폭력과 저항, 번영과 빈부격차 등 격심한 진폭을 겪어야 했고, 한국불교 또한 이러한 ‘극단’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었다. 친일과 항일, 독신과 대처, 정화와 법난, 선과 교, 이판과 사판, 사회법과 출세간법, 개혁과 난투극 등 세속 뺨치는 분열과 대립으로 점철된 근대 한국불교는 극단으로 치닫는 시대의 압력솥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서울 관악산 관음사 종하(조계종 원로의원) 스님은 이러한 시대의 격류에 올라타되 그 흐름에 휩쓸리지 않고 시대를 꿰뚫어보았던 선지식이다. 색(色)이 공(空)과 다르지 않고 공(空)이 색(色)과 다르지 않다는 출세간의 세계. 스님은 분별과 갈등 가운데에서도 ‘사사무애(事事無碍) 이사원융(理事圓融)’을 기치로 평생 종단의 화합과 재건에 앞장서 왔다. 지난 1971년 감찰원 조사국장을 시작으로 산림국장, 재정국장, 총무국장, 총무부장, 부원장, 종회의장, 94년 개혁회의 부의장, 불교방송 이사장 등 중책을 애써 마다하지 않았던 것도 시대의 문제와 마주하고 이를 해결해 나갈 때 불교가 대중에게 희망을 줄 수 있다는 확신 때문이었다.

“누군들 떠나고 싶을 때가 없겠습니까. 훌쩍 떠나 산중에서 수행만 하면 좋겠지요. 허나 다 떠나면 종단 일은 누가 하고, 지친 대중들에게 부처님 가르침은 누가 전하겠습니까. 힘들어도 견뎌야죠. 그래서 이 사바를 감인(堪忍)의 세계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58년 대학 재학 중 해인사로 출가

지난 50여 년간 납자의 길을 걷고 있는 종하 스님에게 은사 고봉 스님의 영향은 지대했다. 1958년 가을, 벌컥벌컥 찬물을 들이켜도 해소되지 않던 내면의 깊은 갈증은 대학 재학 중이던 스물 한 살의 청년을 해인사로 이끌었다. 그러나 당대 최고의 강백으로 손꼽히던 고봉 스님은 쉽게 마음을 열지 않았다. 좋은 집안에 훤칠한 용모를 오히려 장애로 보았던 것일까. 고향인 진주에서 해인사를 오가며 세 번을 간청하고서야 비로소 산문에 들어설 수 있었다.

그렇게 시작된 행자생활. 새벽 3시부터 시작된 일은 아무리 바지런을 떨어도 밤늦도록 끝나지 않았다. 9남매 중 막내였던 스님에게 하루 종일 물 긷고 밥 짓고 나무하는 산중생활은 고단함 그 자체였다. 그러나 가장 힘든 일과는 은사 스님과의 대면. 깊은 밤, 젖은 솜처럼 무거운 몸을 바닥에 누일라치면 어김없이 은사가 그를 불렀다. 그리고 세게 뺨을 후려치며 물었다. “밥하는 이놈, 꿇어앉은 이놈이 누구냐?”
“…”

아닌 밤에 홍두깨라고 했던가. 처음엔 황당했다. 울컥 분심도 솟았다. 배울 만큼 배우고 나이도 먹을 만큼 먹었는데 이 수모를 견뎌야 하나. 하지만 마음 한켠에선 저 노장이 왜 이런 행동을 할까 하는 궁금증과 함께 결코 물러서지 않겠다는 오기도 생겼다. 그렇게 하루 이틀 힘겨운 행자시절이 더디게 흘러갔다. 아궁이 앞에서 부지깽이를 두드리며 천수경을 독송할 때면 환희심이 온통 그를 감쌌고, 뺨을 맞고 나올 때면 억울함보다 어떻게 대답할까 하는 쪽으로 마음이 쏠릴 때가 많아졌다.

그렇게 1년 반. 손에 굳은살이 박이고 한 벌뿐인 행자 옷이 누더기가 될 무렵 마침내 그는 사미계를 받을 수 있었다. 이제 계를 받고 출가자의 길에 들어섰다는 뿌듯함이 솟구쳤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 며칠 뒤 스님은 한밤중에 또다시 은사 스님에게 불려가 꿇어앉았다. 이를 꽉 다물고 오늘은 어떻게 답변할까에 골몰해 있는데 돌연 스승의 따사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출가 후 처음이었다.

“중노릇 하려면 하심(下心)하고 인욕(忍辱)할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어떤 일에 부딪히면 집착하지 말고 개가 전봇대에 오줌 싸는 식으로 지나가거라. 또 중보고 중질 못하니 부처님 법보고 중질해야 하느니라.”

코끝이 찡했다. 황해도가 고향으로 어릴 때 사서삼경 다 떼고 큰 장사를 하다가 용성 스님 법문을 듣고 곧바로 출가했다는 은사 고봉 스님. 고된 행자생활 뒤에는 늦깎이 상좌를 염려했던 은사의 지극한 자비심이 담겨있었음을 비로소 알았다. 실제 종하 스님이 오랜 세월 흔들림 없이 출가자의 길을 걸을 수 있었던 것은 집착하지 말고 부처님을 향한 삶을 살라는 은사의 올곧은 가르침 덕이었다.

사미계를 받은 종하 스님은 범어사에서 강원교육을 마치고 통도사, 봉암사, 범어사 등 선방으로 향했다. “밥하는 이놈, 꿇어앉은 이놈이 누구냐?”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서였다. 더불어 세월은 시위 떠난 화살처럼 빠르게 흘렀고 1968년 고암 스님을 계사로 비구계도 수지했다. 그렇게 몇 해가 흐른 어느날 문중 어른 스님의 권유로 시작된 ‘사판’ 소임은 동화사 교무국장을 거쳐 조계종 총무원 소임에까지 이르게 됐다.

그러나 불법에 이(理)와 사(事)가 어디 있으랴. 옛 조사스님들이 행하거나 머무르거나 앉거나 눕거나 말하거나 침묵하거나 움직이거나 조용히 있거나(行住座臥 語默動靜) 다 수행이라고 했던 것처럼 비록 몸이 좌복을 떠나도 부처님을 향한 지극한 마음을 잃지 않는다면 그곳이 바로 선불장(選佛場)이라는 게 스님의 확고한 신념이었다. 사찰 행정이라고 일컬어지는 사판의 일이 스님에겐 곧 화두였고 수행이었던 것이다.

이판 사판 넘어선 ‘한판’실천

스님이 지금 상주하고 있는 관악산 관음사와 인연이 닿은 것도 그 무렵이다. 관음사는 신라 도선국사가 창건한 유서 깊은 도량이었다. 그러나 해방 후 이곳은 재산소유권 소송에 휘말려 극도로 피폐해졌고 낡은 법당과 작은 요사채 하나만 덜렁 남아있을 뿐이었다.
1973년 스님이 정식 절차를 밟아 주지로 부임했을 때도 갈등은 여전했다.

특히 전에 사찰을 관리했다는 덩치 큰 동네 건달이 밤마다 찾아와 갖은 협박을 일삼았고 심지어 한 밤중에 산 위에 올라가 절을 향해 바위를 굴리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그러나 스님은 이전 스님들과는 확연히 달랐다. 어떤 위협이나 욕설에도 수미산마냥 끄떡도 않았고 오직 기도하고 정진할 뿐이었다. 그렇게 석 달, 마침내 동네 건달이 고개를 숙였고 스님도 갈 곳 없는 그를 위해 아담한 집 한 채를 마련해 주었다.

하지만 난관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사찰 부지가 국유지와 시유지와 혼재돼 분쟁이 잇따랐고 개발제한구역, 도시자연공원법 등 사찰건축에 대한 제한과 규제 법률도 산더미처럼 많았다. 허나 스님은 절망하지 않았다. 관련 법률 서적을 사서 밤새워 공부하는 동시에 관공서를 일일이 찾아다니며 공무원들을 설득했다. 그렇게 해서 정면 다섯 칸, 측면 세 칸의 팔작지붕형 대웅전을 시작으로 범종각, 삼성각, 용왕각, 대강당, 명부전, 미타전, 관세음보살입상, 일주문까지 35년간의 중창불사를 모두 마무리했다. 이로써 마침내 관음사의 옛 위용을 되찾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는 곧 종하 스님의 지극한 원력과 불퇴전의 신심이 이뤄낸 결실이기도 했다.

35년 중창불사로 관음사 재건

“부처님 모시고 불사 못한다는 것은 다 거짓말입니다. 지극정성으로 기도하면 부처님 일은 절로 이뤄집니다. 누굴 탓하거나 다른 데서 원인을 찾기 시작하면 누구 하나 포교할 수 없죠. 스스로 부처님의 가피를 체험하고 환희심을 느끼려 해야합니다. 그럴 때 주변 사람들에게도 큰 감화를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 4월 21일 열린 조계종 원로회의에서 새롭게 원로의원으로 선출된 종하 스님. “승가의 생명은 청정과 도덕성으로  스스로 맑아야 중생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다”는 스님은 한국불교가 도덕적인 권위를 되찾고 승풍이 진작될 수 있도록 일조하겠다는 것이 스님의 마지막 원력이다. 

이재형 기자 mitra@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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