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법보시론]우울증 혹은 폭력

기자명 법보신문

요즘 우리나라 여성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안타까운 사연들을 거듭 접하게 된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소중한 목숨을 스스로 끊기에 이르렀을까?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한번쯤은 자살을 충동적으로 생각한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어려운 상황을 잠시 모면하고자 떠올린 실천력 희박한 단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에 비해 결국 자살을 시도한 경우는 타인이 이해하기 어려운 치명적 고통을 전제하는 것이다.

자살의 동기는 타인에게 쉽게 이해되지 않는 면이 많아 ‘의문사’로 남기도 했다. 관련 정보가 독점되는 군대에서의 자살은 더욱 그랬다. 그동안 군 당국이 자살로 몰아가려 했던 의문사가 타살이거나 미필적 고의에 의한 자살이었다는 사실이 군의문사 진상조사위원회에 의해 하나둘 밝혀졌다.

그런 군 당국의 태도를 여성들의 죽음을 수사하는 경찰이나 검찰들에게서 다시 발견하게 되는 것은 참 유감스러운 일이다. 수사 당국은 자살자가 평소 ‘우울증’을 앓고 있었다는 점을 지나치게 강조하면서 수사를 성급하게 종결하려는 의도를 노골적으로 보였다.
언제부턴가 우리 사회에서 우울증은 사람들의 일상을 파괴하는 심각한 병으로 주목받게 되었다. 경찰이나 검찰은 이런 풍조에 편승한 듯, 여성의 자살을 우울증에서 비롯된 것으로 쉽게 단정해버리는 조급증을 드러내었다.

자살한 여성은 평소 우울증을 앓고 있었는데 결국 그 병을 잘 다스리지 못하고 스스로 불행한 결단을 하고 말았다는 식이다. 우울증이 경찰이나 검찰에게는 성가신 자살 사건을 종결지을 수 있는 ‘편리한’ 이유가 되고 있는 것이다. 여성들이 우울증을 앓았다는 사실을 제시하여 자살을 개인 심리의 차원으로 돌리려는 것은 우울증의 본질에 대한 몰상식에서 비롯된 것이면서, 경찰이나 검찰이 내면화하고 있는 성적 차별의식과 관련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우울증은 개인 차원의 단절적 심리질환이 아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우울증은 주체가 타자로부터 받은 충격이나 상처에서 비롯한다. 주체가 타자로부터 받은 충격이 일정 한도를 넘어서는 강력한 것이면, 주체는 더 이상 타자와 맞겨루기를 포기한다. 그래서 주체는 공격의 방향을 자기에게로 돌려 자기를 파괴하기에 이른다. 자기 파괴는 타자에 대한 반격이 불가능해졌을 때 나타나는 마지막 심리적 전환이고 그 결과가 우울증이라는 것이다. 우리나라 우울증 환자 중 여성이 남성보다 더 많다는 것은 우리나라 여성이 이런 상황에 더 자주 노출된다는 것을 증명한다.

가령 아직도 최진실 씨나 장자연 씨의 자살을 우울증으로만 설명할 수 있는가? 설사 자살 실행의 최종 동력이 우울증에 있었다 하더라도 그 근원을 진지하게 찾아가보면 남성 중심적인 사회가 여성 연기자들에게 집단적으로 혹은 개인적으로 가한 폭력이 은폐되어 있는 것이다.

장자연 씨의 경우 더욱 그러하다. 그녀를 성적으로 학대하고 착취했던 연예인 인력 관리 시스템이 명백하게 존재했고 그 시스템을 악랄하게 이용한 뻔뻔한 남성들이 여전히 사회적 명사 노릇을 하고 있는데도, 그들에 대한 철저하고 공평한 수사가 이뤄지지 않은 채 마무리되었다.

철저한 수사를 하겠다는 공언은 그냥 시늉이었을 뿐이었다. 결국 장자연 씨를 향해서도, 여느 자살 여성과 다름없이, ‘우울증 때문에 스스로 죽음의 길을 갔다’는 서사적 포장이 이루어졌을 따름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우울증’에 의해 죽어간 적지 않은 여성들은 후안무치의 남성 폭력의 희생자였다는 진실을 말이다. 우리 사회가 양성평등을 추구하여 어느 성도 성취를 이뤄냈다 떠들어 대고 있지만, 이런 안타까운 일들이 거듭 일어나는 걸 보면 양성평등과 여성해방은 아직 요원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