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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법문 명강의] 수덕사 주지 옹산 스님

기자명 법보신문

지극한 도는 말 아닌 일념 속에 있다

귀로 듣고 눈으로 본다고 하지만 눈을 감아도 보이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니 보는 놈이 눈이 아니고 듣는 놈이 귀가 아닙니다. 그러면 보고 듣는 이놈은 누구입니까. 누구긴요, 마음이지요. 그 마음이 어떻게 생겼는가를 일념으로 찾아 들어가는 것을 참선이라고 합니다. 이곳에 이렇게 큰 도량이 문을 열고 법화산림의 법석이 마련되어 여러분이 모인 것을 보니 여러분 모두가 부처님으로 보입니다.

법화경에서 설하고 있는 말씀도 여러분이 곧 부처라는 점입니다. 너도 부처고 나도 부처입니다. 그것이 법화경의 내용입니다. 즉신성불(卽身成佛)이라. 즉 이 몸이 부처라는 말입니다. 법화경에서는 ‘너희도 성불할 수 있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믿고 이해하고 행하면 부처의 길을 간다고 했습니다.

법화경의 정확한 명칭은 묘법연화경입니다. 이곳에 오기위해 기차를 타고 오면서 보니 곳곳에 꽃이 만발했더군요. 이것이야 말로 있는 그대로 실상이요, 참으로 묘한 법입니다. 땅 속에서 다 같은 물을 먹고 다 같은 햇빛을 받아 자랐는데도 어떤 것은 빨간 꽃이 되고 어떤 것은 노란 꽃이 되는 이것이 참으로 묘한 것입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묘한 이치에 비유해 경 이름을 지은 것이 묘법연화경입니다.

믿고 이해하고 행하면 곧 부처

부처님께서는 일생동안 여러 경전을 설하셨는데 처음에는 분별심에 관해 설하신 아함경을, 다음으로는 연기법을 설하신 방등경, 그 다음엔 반야경을 설하셨습니다. 그리고 일체가 유심이라는 화엄경을 설하셨는데 그 내용이 너무 어려워 이해하는 이가 적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설한 것이 이 법화경입니다.

제법종본래 상자적멸상 불자행도이 내세득작불
諸法從本來 常自寂滅相 佛者行道已 來世得作佛

법화경의 가르침은 이 안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곧 부처라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중생이 그것을 믿지 않고 행하지 않으니 옷자락에 보물을 담아 두고도 찾지 못하는 이에 비유하거나 병을 잘 고치는 의사가 자식에게 약 먹이는 방법에 비유하는 등 다양한 비유를 통해 그 이치를 설명하고 계신 것입니다.

여러분께서 이 법화경을 다 읽으면 좋겠지만 이렇게 바쁜 시대에 법화경을 언제 다 읽겠습니까. 그렇다면 ‘나무실상묘법연화경’만 일념으로 독송을 해도 좋을 것입니다.
제법종본래. 모든 법이 본래 적멸하니 한 법이 난 바도 없고 멸한 적도 없다. 여러분은 모두가 부처입니다. 모두 불성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 불성을 갖고 있는데 왜 부처가 아닙니까. 부처의 행동을 하지 않고 부처의 말씀을 하지 않으면서 엉뚱한 행동을 하니 부처가 아니고 중생입니다. 부처와 중생은 같이 있습니다. 남을 미워하는 말이든 칭찬하는 말이든 다 같은 곳에서 나오는 법입니다. 이것이 둘입니까, 하나입니까.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닙니다.

상자적멸상이라. 나지도 않고 멸하지 않는 그 마음자리. 그 자리는 멸하지도 않고 나지도 않는 불생불멸자리입니다. 불자행도이 내세득작불이라. 지금 여러분이 행하는 그대로가 부처를 행하는 것입니다. 내세가 죽은 후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자성을 갖고 있을 때, 이 불성을 갖고 있을 때 이 세상에서 극락을 살 수 있는 것이고, 이 좋은 생각으로 가야 극락세계에 태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생각을 그대로 갖고 가는데 나쁜 생각 갖고 있다면 극락세계에 태어나겠습니까.

법화경의 근본 목적은 모든 중생들이 다 지혜를 얻어서 부처가 되라고 일깨우는데 있습니다. 그렇기에 일념으로 나무실상묘법연화경을 수지 독송 한다면 누구나 다 부처가 될 수 있습니다. 실상묘법연화경은 그대로 부처님의 말씀입니다. 이것이 비록 사람의 말로 돼 있지만 짐승 축생이라도 이 말씀을 들으면 머리가 맑아지니 어떤 이치일까요. 머리가 아플 때 약을 먹으면 비록 그 성분이 무엇인지 모르더라도 머리 아픈 것이 낫게 됩니다. 묘법연화경에는 부처님께서 설해놓으신 무궁무진한 도리가 들어있으니 비록 우리가 그 세세한 내용은 잘 모르더라도 약을 먹어 병이 낫듯이 이 경을 수지독송하면 병이 낫게 되는 이치입니다.

법화경을 설하시기에 앞서 부처님께서는 화엄경을 설하셨습니다. 화엄경은 또 무엇입니까.

약인욕요지 삼세일체불 응관법계성 일체유심조
若人欲了知 三世一切佛 應觀法界性 一切唯心造

한 생각 깨달으면 바로 부처가 된다고 했습니다. 모든 것은 다 마음이 조장합니다. 그 마음을 찾기 위해 참선을 합니다. 법화경에서는 ‘즉신성불’이라, 이 몸에 곧 성불하는 도리가 있다고 했습니다. 내 몸이 곧 부처라는 말입니다. 내 몸이 부처인데 부처의 마음을 안 쓰고 부처의 행동을 안 하니 중생입니다. 그러니 즉심시불(卽心是佛), ‘마음이 부처더라’입니다. 옛날에 한 노인이 ‘즉심시불’이라는 말을 잘못 알아들어 ‘짚신이 부처다’라고 듣고는 ‘왜 짚신이 부처일까’를 매일 일념으로 생각하다가 깨달았다고 합니다. 그러니 그 지극한 도가 말에 있는 것이 아니요, 일념으로 왜 부처인가를 생각할 때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마조 도일 스님의 수행하는 모습을 보던 남악 회향선사가 마조 도일 스님을 찾아갔습니다.
남악 회양선사는 열심히 참선하는 제자에게로 가서 물었습니다. “그대는 왜 참선을 하는가?” 마조 도일 스님이 대답했습니다. “부처가 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자 남악 회양선사는 아무 말 없이 기왓장을 하나 가져다 돌에 대고 갈기 시작했습니다. 도일 스님이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여 물었습니다.

“무엇 하러 기와를 돌에 갈고 계십니까?” 회양선사가 천연덕스럽게 대답했습니다. “거울 하나 만들어 볼까 하네.” 그 말에 도일 스님이 “기와로 어찌 거울을 만든단 말씀입니까?”라고 되묻자 회양선사가 말했습니다. “기와를 갈아 거울을 만들 수 없다면 좌선을 해서 어떻게 부처가 될 수 있겠는가?” 이 말에 도일 스님은 머리를 한 방 얻어맞은 듯 했습니다. “그러면 어찌해야 되겠습니까?” 회양선사가 대답했습니다. “수레가 앞으로 나가지 않으면 수레를 쳐야 옳겠는가, 소를 때려야 옳겠는가?”

수레도 때리지 않고 소도 때리지 않습니다. 때린다고 하는 놈을 때려야 합니다. 때린다고 하는 놈을 때릴 줄 아는 것이 바로 부처입니다. 소도 가지 않고 수레도 가지 않을 때 때린다고 하는 놈을 때릴 줄 알아야 합니다.

수행을 할라치면 산속에 들어가는 것만으로도 부족해서 문까지 걸어 잠그는 수행자들도 있습니다. 물론 그것도 대단한 발심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고 그런 수행자도 필요합니다. 하지만 여러분처럼 도시에 살면서 남편도 있고 아내도 있고 아이도 기르면서 이렇게 법문 듣고 수행하는 것이야 말로 참으로 상근기이고 대보살입니다. 출가해서 수행하는 것 못지않게 여러분들도 장한 신심을 가진 분들입니다.

수행의 궁극 목표는 행복

더욱이 이렇게 함께 모여 공부하고 수행하면 힘이 생깁니다. 공부는 혼자 하는 것보다 옆에 서 함께 하는 도반이 시켜준다고 했습니다. 계절이 바뀌면 철새들은 살 곳을 찾아 바다를 건너가곤 합니다. 그 철새도 혼자서는 바다를 못 건너가지만 여럿이 함께 모여서 가기 때문에 몇날 며칠을 날아 바다를 건널 수 있는 것입니다. 참선을 하던 염불을 하던 독경을 하던 일념으로 하면 됩니다. 여러분은 수행의 목표가 무엇입니까. 수행의 궁극적인 목표가 성불이다, 열반이다 하지만 그것이 아닙니다. 궁극적인 목표는 행복입니다. 행복을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큰 그물을 던져 고기를 잡더라도 고기는 그물 한 코에 걸리는 법입니다. 오늘 아무리 오랫동안 앉아 법문을 듣더라도 내가 부처라는 말 한 마디만 건져 가면 됩니다. 어느 수행을 하던 나도 부처라는 것만 생각하고 찾으면 됩니다. 염불을 한번 지극히 해 본다든가, 참선을 지극히 해 본다든가, 법화경을 열심히 독경을 해 보든가 하여 스스로 체험하고 체득해 보시기 바랍니다.

스님들보다 재가불자들이 더 공부를 많이 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유마거사가 그러했고 방거사가 그러했으며 신라의 부설거사가 그랬습니다. 비록 여러분이 세속에 살지만 연꽃은 진흙 속에서 피듯이 여러분 마음속에는 누구에게나 다 아름다운 연꽃의 씨앗이 들어 있습니다. 이와 같이 좋은 자리가 마련됐으니 함께 모여서 열심히 수행하고 공부하시기 바랍니다.  
 
정리=남수연 기자 namsy@beopbo.com

 

이 법문은 대구 법왕사에서 봉행된 제19회 백고좌법회에서 수덕사 주지 옹산 스님이 설한 법문을 요약 게재한 것입니다.

 

옹산 스님은

1944년 경북 상주에서 출생했다. 1966년 수덕사에서 원담 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1970년 혜암 스님을 계사로 비구계와 보살계를 수지했다. 1985년부터 1995년까지 조계종 운수암 토굴에서 정진하고 법주사, 도성암, 정혜사, 망월사, 남국선원 등에서 25하안거를 성만했다.

1994년 수덕사 부주지, 1995년 조계종 재심호계위원, 2001년 향천사 주지, 2001년 천불선원 원장 등을 역임하고 2007년 조계종 제7교구 본사 수덕사 주지 소임을 맡아 현재에 이르고 있다. 저서로는 『선의 현대적 의의와 역할』『홀로 허허 웃는 달』『꽃피고 물흐르더라』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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