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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가 쓰는 화엄개벽모심의 길] 4. 흰 그늘의 아시안 네오·르네상스를!

기자명 법보신문

흰 그늘은 일념에 의한 성불의 씨앗이자 보리심

 
삽화=김지하

화엄경 ‘초발심보살공덕품’에는 다음 구절이 보인다.
‘무량겁이 일념임을 알며 일념이 곧 무량겁임을 알라.’
지엄(智嚴)은 여기에서 한 발 성큼 더 나가 ‘보리심에 의한 일념성불(一念成佛)’을 주장하며 ‘초념이 후념이고 후념이 초념인 인과가 서로 직하고 동시에 서로 응하는 삼세원융(初念卽後念 後念卽初念 因果相卽 同時相応 三世圓融)의 논리’에 의해 그것이 가능하다고 설한다.

‘흰 그늘’이 무엇인가?
그야말로 한 생각(一念)이요 한 생각에 의한 성불(成佛)의 씨앗일 수 있으니 그 자체로서 참으로 보리심이라 할 수 있지 않은가! 더욱이 시커먼 고통중의 하아얀 깨달음의 싹이라고 본다면 더욱 그렇지 아니한가!
문화나 예술이 인간의 여러 능력중 한 국면에 불과한 감각, 감수성, 감성의 한 모서리 현상이라고 보는 동서양의 어느 한 옛 시절 이야기는 이제 인류의 삶, 더욱이 여성이나 신세대, 그리고 절대다수 대중(multitude)의 일상적 인식과 생활에서는 이미 낡아빠진 한 주장에 불과하다.
감각 안에 우주적 영성이, 영성 안에 과학적 인식지표가, 그리고 마음 안에서 이미 구체적인 몸이 살아 움직이는 때다.

러시아 출신의 과학자 ‘싸르코스볼’이 주도한 ‘아르곤·다르볼리움 효과(Argon Darbolium effect)’는 카를·융이 그토록 조심스럽게 애매하고 중립적인 심리학 개념으로 ‘자기(自己·selfst)’라고 규정할 수밖에 없었던 불교 유식학의 십식(十識) 십일식(十一識) 등 심층무의식 차원을 대뇌는 물론이고 피부피하지방질촉성 박테리아 수준에서까지도 이제는 맹렬히 활동하기 시작한 핵산(核酸) 미립자형태 등의 뇌신경세포로까지 그 활동 비밀을 활짝 열어버리고 있다.

‘무량겁이 일념이요 일념이 무량겁이다’라는 화엄경이 아직도 그저 어렵기만 한가?
‘중생이 곧 부처’란 말이 아직도 그저 ‘말 보시’로만 느껴지는가?
법장(法藏)은 그의 ‘탐현기(探玄記)’의 ‘교기소유(敎起所由)’의 제7개발고(開發故)에서 이렇게 말한다.
‘개발고란 중생의 마음 가운데에 있는 여래의 장(藏·씨앗), 성기(性起)의 공덕을 개발하여 모든 보살들로 하여금 이것으로 수학(修學)하여 무명의 껍질을 파하고 성덕(性德)을 현현케 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즉, 화엄경의 ‘성기관(性起觀)’을 그대로 여래장에다 직결시키고 있다.

‘여래장’이 무엇인가?
모든 중생 속에 다 살아 있다는 부처의 씨앗이다.
‘개발고’가 무엇인가?
그 씨앗을 이른바 화엄개벽모심을 통해 현실적으로 개발하는 행위다.
그렇다면 ‘흰 그늘’이 무엇인가?
‘여래장’의 한 메타포 아닌가!
그렇다면 ‘아시안 네오·르네상스’란 도대체 무엇하자는 일인가?
바로 그 ‘개발고’ 아닌가!
아닌가?
지엄과 법장이 분명 화엄학의 법계연기 즉 성기론의 대가라고 한다면 전회에 내가 제안한 이 가을의 오대산 화엄개벽모심의 대결집에서 ‘흰 그늘의 미학과 아시안 네오·르네상스’를 중요 주제로 다루어 마땅할 것이다.
더욱이 현대가 어떤 시절인가?

법장이 설한 탐현기 개발고는
여래장 개발해 무명타파하는 것
이것이 아시아 네오·르네상스

유럽전래의 돌팔이 시간관, 시간은 과거에서 미래로 마치 선(線)이나 화살처럼 일방적으로 흐르는 진보의 연속이므로 과거는 야만이고 미래는 문명이다 따위, 그래서 ‘소급불가능성’이 마치 운명처럼 지배하는 무지하기 짝이 없는 서푼짜리 시간관이 아직도 세계를 압도하고 있는 그런 때 아닌가!
그들을 내가 ‘무지’하다고 매도하는 것은 전혀 편견이 아니다. 그들의 근현대적 세계지배의 힘의 출처가 명백히 15세기 이탈리아 르네상스에 있었기 때문이다.
르네상스(renaissance)가 무엇인가?
‘입고출신(入古出新)’이다.
옛것 속으로 들어가 그것을 새것으로 재창조해서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것. 바로 지금 우리가 하려고 하는 그것이다.

문예만이 아니다.
화엄경 역시 마찬가지다. 화엄경은 이미 1700년전에 결집완료된 옛 세계관이니 2000년대에 그것을 다시 거론하는 것 자체가 이미 르네상스요 네오·르네상스다.
야만인가?
15세기 이탈리아의 피렌체나 베네치아의 희랍열풍이 야만인가?
그렇다면 묻자.
옛 발칸의 원시공유제 사회의 기억으로부터 현대공산주의의 첫 샘물을 찾아낸 카알·마르크스는 야만인가?
고대 희랍의 광장민주주의에서 현대 시민민주주의의 새로운 사회적 공공성의 씨앗을 찾아낸 한나·이렌트는? 미셸·푸코는? 카알·폴라니는? 페르낭·브로델은? 엘리아데와 레비스트로쓰는? 그리고 쟝·보드리야르는?
모두다 예외없이 야만인가?
반동이고 복고고 국수주의고 후퇴적 민족주의자인가?
정신차리기 바란다.

이미 유럽과 아메리카 최고의 첨단과학 중 하나는 ‘비선형동력학(非線型動力學)’이다. 그것이 무엇하는 거냐고?
공부해보면 안다.
이쯤에서 한발 옛 신라로 그야말로 야만의 행보를 성큼 옮겨가보자.
누구 얘기냐?
원효다.
왜?
중국의 당대(唐代)나 일본의 요즈음 화엄학보다, 더욱이 중국 화엄종의 저 고색창연한 법기관(法起觀)보다 현대가 갈구하는 현대 초현대적 화엄학, 더욱이 화엄개벽학, 더 더욱이 ‘흰 그늘의 입고출신문예부흥’과 훨씬 더 연기적(緣起的)인 화엄해석학의 새로운 방법론으로서 원효의 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疎)의 ‘환멸연기론(還滅緣起論)’을 한번 검토해보자는 것이다.
원효는 말한다.
연기에는 두 개의 문이 있다. 생멸문(生滅門)과 진여문(眞如門)이다.

중생이 부처에로 가는 길은 생멸문에서 진여문으로 가는 길이다. 그러나 마음에 어디 두 개의 문이 따로이 있겠는가? 멸(滅)하는 마음을 심상(心相)이라 하니 이것이 곧 생멸문이요 어리석음(痴)이고 불멸(不滅)하는 마음을 심체(心體)라고 하니 이것이 곧 진여문이요 지혜(智)인 것이다.
바로 이 심체가 곧 진여다. 여래장이요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이요 불생불멸(不生不滅)이요 본각(本覺)이다.
생멸문과 진여문은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닌(非一非二) 서로 떨어질 수 없는(不相離) 화합(和合) 관계다.’ 생멸과 진여의 관계를 화합으로 본 것이다.
이 점에서도 원효의 연기론은 대승보다 일승에 가깝다.
그렇다.

그래서 원효는 일체지혜의 길, 해탈의 길을 먼저 생멸문, 이른바 ‘어리석음’에서 구한다. 중생의 구체적인 삶의 실상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이것이 중요하다. 이것을 잊어버리면 그 뒤 아무 것도 남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을 잊어버린 지식인, 수도자들이 너무나 많은 현실이므로 이것을 ‘잊지 않음(不意)’이 어쩌면 곧 ‘화엄개벽의 최고의 모심’이 되는 세상이다.

그러나 과연 요즘의 중생은 그렇게 어리석기만 한가?
여기에 문제가 있다.
그렇지 않기 때문에 도리어 원효의 환멸연기론이 고색창연한 법기관, 성기관보다 훨씬 더 현대적 중생에게 알맞는 화엄개벽에의 길이요 그 해석학일수 있다는 이야기다.
중간에 끼어드는 해석자, 지식인, 매개자, 직업적 종교인, 조직 등 지난 역사에서 가장 강력한 ‘멘토링’의 기능을(없애는 것이 아니라) 상대화, 최소화하자는 뜻이다.
유전연기(流轉緣起)에 대한 삶의 주체인 중생 자신의 현실적으로 가장 강력하고 지혜로운 깨달음의 길, ‘삶 속에서 스스로 부처를 보고 세계 속에서 스스로 세계를 이탈하는 참다운 중도(中道)’가 바로 환멸연기가 아닌가 하는 말이다.
원효에게서는 연기가 이미 연기가 아니다.
‘법계연기’란 말로서 연기의 속된 흐름, 즉 유전연기를 걱정하는 성기론자들의 우울을 훌쩍 벗어던진다는 말이다.
‘환멸(還滅)’은 이미 우리가 여러 곳에서 지금 여기 새로운 문명사 건설의 중요한 큰길로 검토하고 있는 화엄개벽모심의 핵심 뼈대인 우주생명학의 과학적 명제 세 가지 즉 ‘복승(複勝), 확충(擴充), 모심’을 애당초부터 제 안에 넉넉하게 함축하고 있는 삶의 길 즉 그야말로 살아있는 연기다.

원효는 중생의 구체적 삶에서
일체 지혜와 해탈의 길 구해
이것을 앎이 화엄개벽의 모심

따라서 진여문으로 직통하는 생멸문이고 ‘법기·성기’의 형이상학적·심층심리학적·추상적 개념과 범주와 어휘들로 뒤발해 놓은, 그렇다! 그 모든 것이 비록 자비로운 배려에서 처음 시작된 것이기는 하나 지금 여기에서는 분명 한낱 ‘중생의 어리석음이 만가지 고통의 근본원인’이라는 투의 직업적 종교인·지식인 나름의 기우(杞憂)의 산물이요 그 답습이요 그 브랜드 장사요 그 이권 챙기기 형태 따위를 훌쩍 뛰어넘어 이른바 밑바닥 중생들이 본디의 임금자리로 되돌아가는(己位親政) 후천화엄개벽의 길을 활짝 열고 있는 것이다.

아니 그렇게 말할 것이 아니라 법계연기의 그 깊은 선(禪)적 계기인 심오한 성기(性起)관을 이미 다 제 안에 풍성히 안은채로 성큼 중생 스스로에 의한 화엄개벽의 길을 다소곳이 열고 있다고나 말할까!
그렇다.
원효는 이미 오늘 우리가 17세기라는 오랜 세월을 소급해가며 무식한 자들이 떠드는 야만이라는 볼멘 불평까지도 들어가면서 현대·초현대의 시커먼 대혼돈과 종말적 괴질시대에 대한 참다운 후천개벽의 콘텐츠를 찾아가는 입고출신의 그 어려운 혈로를 뚜렷이 열어주고 있는 것이다.

마명(馬鳴)의 대승기신론이 깊이 빠져있는 ‘대승선고요론’ 즉 ‘조직종단의 지도노선에 의한 중생지도의 불가피성’ 따위 답답함과 허름함을 조기에 타파하고 있지 않은가!
어떤가?
이러한 원효의 연기론 안에 ‘흰 그늘의 미학’이나 ‘아시아 발 네오·르네상스의 일승적 대중문화로선’의 참 씨앗이 없을까보냐!
‘환멸연기’ 안에서 원효는 간곡히 말하고 있다.
‘나는 누구이며 너는 누구인가?
나를 낳아준 이 산천과 저 부모들은 누구인가?
우리는 여기 이 땅에서 왜 살고 있는가?
산다는 것.
그것은 과연 무엇인가?
(誰我誰汝 誰吾山河 誰知吾父母 誰知吾流生之墟 歸命 何以歸之命?)’
삶 자체에서 목숨은 곧바로 중생 안에서 부처를 보고 있다. 다시 한번 오늘의 주제를 돌아보자.
흰 그늘!
산다는 일의 캄캄함. 그럼에도 끝없는 자살의 유혹을 넘어 찾고자 하는 쌔하얀 참 부처의 빛. 캄캄한 그늘 안에서 흰 빛 그 자체를 본다는 것. 숱한 사람들. 특히 젊은 여성들, 미성년들, 소외대중들이 차라리 옛 삶에서, 옛 엄마의 품에서, 옛옛 베틀노래 한 구절에서까지도 찾고자 하는 그 흰 그늘!

그 비밀이 원효의 한마디 ‘목숨에 돌아감(歸命)’ 그 안에 있는 것은 아닐까? 생명!
‘목숨에 돌아감’은 곧 ‘모심’의 다른 말이다. 모심이 흰 그늘이요 입고출신의 핵심콘텐츠 아니던가!
아! 이제야 결론이 온다.
귀명이 모심이요 귀명이 곧 환멸연기이니 사람이 곧 모심이요 ‘모시는 사랑’, ‘사랑하는 모심’이 바로 화엄개벽의 첫 길이 아닌가!
참으로 그렇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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