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을 가다] 4. 학살당한 불교
[몽골을 가다] 4. 학살당한 불교
  • 법보신문
  • 승인 2009.10.06 1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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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 핏빛으로 초록 대지 물들이다
 
테를지 국립공원에는 천상의 사원이라 불리는 작고 아담한 떼뜨 어렁 사원이 학살당했던 불교의 아픔을 간직하고 있었다. 계단이 앞으로 길게 늘어져 있어 마치 흰 코끼리 모양이다.

눈이 가려진 독수리는 날지 못한다. 아니 날지 못했다. 관광객들에게 멋진 사진을 제공하는 박제일 뿐, 몽골의 옛 수도 하르허린, 첫 사원 에르덴조 입구에서 만난 독수리의 날개는 허우적대고 있었다. 독수리는 초원의 파란 하늘을 잊었을까. 그리워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동정을 이내 놓았다. 사람이건 동물이건 애당초 가져본 적이 없거나 너무 일찍 빼앗긴 것에 대해 미련을 품지 않는다.

쓸데없는 생각을 접었다. 그리고 옛 수도 하르허린을 등졌다. 다시 버스에 올라 6시간 동안 엉덩이를 들썩거리며 달려야 했다. 몽골 수도 울란바타르에서 몽골 불교에 대한 오해를 풀어야만 했다. 가이드 어기 씨는 순례 내내 어두웠던 표정을 읽었는지 수난을 겪은 몽골 불교 현장으로 안내하겠다는 말을 전했다. 다시 충혈되는 두 눈을 부릅떴다.

어제 울란바타르에서 하루를 묵고 아침 일찍 길을 나섰다. 울란바타르에서 동쪽으로 75km 이동하고 나서야 휴양지인 테를지 국립공원과 마주했다. 어기 씨가 코스에도 없는 곳을 안내하겠노라며 앞장섰다. 1시간 조금 덜 걸으니 작고 예쁜 사원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바로 떼뜨 어렁(Deed oron) 사원이었다. 최고의 사원이라는 뜻이라니 한 마디로 천상의 사원이다. 그러나 사원이 생긴 지는 얼마 안 된 모양이다. 1988년 착공해 2004년에 완공했단다. 워낙 작고 아담하다보니 한참 멀어보였다. 언뜻 보니 흰 코끼리 모양이다. 사원에 이르는 계단이 앞으로 길게 늘어져 있어 마치 코끼리 콧속으로 사람들이 하나 둘 사라지는 것 같았다.

사원에 다다르기 위해서는 계곡 위로 있는 흔들다리를 지나야 했다. 다리에 얽힌 사연이 재미있다. 삶과 죽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다리를 건너면서 ‘죄를 짓지 말아야 겠다’는 생각이 들도록 만들었다고 한다. 실제 몽골에는 이런 다리가 흔치 않아 몽골인들은 이곳에서 많은 공포심을 느낀다. 주말을 맞아 이곳을 찾은 많은 몽골인들, 그 중 몽골 여성들은 유난히 즐거운 비명(?)을 지르며 사진 셔터를 눌러댔다. 코끼리 코에 해당하는 계단 앞에 다다르자 위로 쭉 늘어선 계단이 원망스러웠다. 여기까지 온 것도 꽤나 힘이 들었다. 계단 숫자를 물었더니 모두 108개란다.

총칼 피해 동굴로 숨어든 스님들

 
1936년 9월, 에그주린 사원 스님들은 재판을 받고 모두 사형에 처해졌다.

“계단으로 올라갈 때 ‘옴 아라 바자 나띠’라는 주문을 600번 외어야 돼요. 주문을 외우면 가정이 화목해지고 나라가 발전하거든요.”힘에 부치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이것저것을 설명하기 바쁜 어기 씨가 야속했다. 사원 왼쪽으로 큰 바위에는 이상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어디서 많이 본 문자였다. 어기 씨 말에 의하면 ‘옴 마니 반메 훔’이란다. 깎아지르는 바위에 어떻게 글자를 새겼는지 놀라울 따름이다. 사원을 품에 안은 모든 자연이 거대한 사원인 듯한 착각이 들었다.

사원을 둘러싼 산 뒤편에는 1930년대 불교를 학살한 스탈린 사회주의를 피해 스님들이 숨어 지냈던 바위 동굴이 있다. 사원을 찾기 전 참배하고 온지라 더욱 숙연해진다. 불편한 진실은 때론 오해의 실타래를 푸는 열쇠이기도 하다. 민족종교로 자리 잡기 위해 샤머니즘을 밀어내거나 받아들여야만 했던 티베트 불교의 숙명. 허나 그 위대한(?) 유산은 유목 생활에서 비롯된 몽골인들의 샤머니즘 틈바구니에서 크게 자리했다. 하여 불법승 삼보에 대한 몽골인들의 신심은 차라리 솔직하고 간절하다. 흡사 달 밝은 밤 새벽에 정화수를 떠 넣고 정성스럽게 비는 우리네 어머니들처럼 말이다. 그러나 몽골인들의 불교는 스탈린에 의해 공개처형 당하고 만다.

“기도를 할 때면 보드카가 떠오릅니다. 스님이었던 아버지와 친구들이 기도를 위해 모인 사실을 숨기고자 술을 마시려고 모인 척 해야만 했지요. 기억납니다. 내 아버지는 스님이었지만 사람들이 그것 때문에 박해했지요.”

2006년 영국 로이터 통신과 뉴질랜드 국영TV TVNZ에 소개된 몽골의 한 스님이 사회주의 시절을 회상하며 어렵게 털어놓은 말이다. 미처 보지 못했던, 삶 속에 켜켜이 묵혀둔 감정의 먼지들이 일제히 피어오를 때가 있다. 과거에 닥친 갑작스런 횡액이 불현듯 가슴을 속을 후비는 순간이다. 그 스님에게 기도와 보드카, 아버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상처인 셈이다.

20세기 초, 사회주의 정권이 수립되면서 불교는 불법화 되고 이단으로 취급 받는다. 이 시기 불교에 대한 탄압은 매우 잔인하고 극단적으로 진행됐다.

2만여 스님 700여 사원 몰락

 
스님들의 유해 600구 이상이 묻혀 있던 집단 매장지.

1936년, 비극은 들이닥쳤다. 몽골의 독립영웅 수흐바타르 결사대와 소련 공산군이 러시아 왕정군을 몰아내고 1924년 ‘몽골인민공화국’을 선포한다. 이후 몽골을 손아래 두려했던 소련의 야심은 만행에 가까웠다. 갖가지 신문물의 지원을 수단으로 정치 지도부의 내적 분열을 획책하는 한편 가난하고 무지한 몽골인들에게 특혜를 주면서 하층민의 어린 청소년들을 공산주의자로 교육했다. 그러나 소련은 곧 신앙의 중심에 자리한 불교를 제거하지 않고서는 야심을 달성하기란 어려운 일임을 깨닫게 된다. 마침내 1936년, 스탈린 노선을 거스르는 몽골 정치인과 지성인들을 반동이라는 각종 죄명으로 숙청하고 암살했다.

절은 화염에 휩싸였고 스님들은 학살당했다. 그 해 여름 동시 다발적으로 전국 각지의 절을 기습, 지도급 스님들을 잡아다가 무참히 학살하기 시작한 것이다. 5~6명이나 20여 명씩 군용 트럭이나 지프에 싣고 구덩이를 파게 한 다음 뒷머리를 총으로 쏴 구덩이에 떨어지게 했다. 죄명은 반동, 반란, 모반, 간첩행위였다. 강제노동수용소로 끌려간 스님들은 토목공사나 광산에 동원돼 최소 10년 동안 고역을 치러야 했다. 그리고 경전을 찍어내는 목각 경판들은 군인들의 땔감으로 쓰였고 사원은 단청과 벽화를 가린 후 군용 막사나 창고로 사용됐다.

그러나 스님들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자 계율을 생명처럼 여기는 겔룩파 스님들을 파계하도록 강요했다. 노동수용소에서는 담배를 피워야만 휴식시간을 제공했고, 거부하는 스님들은 온갖 조롱과 모욕을 들어야 했다. 또 여성당원들에게 특별한 교육(?)을 시켜 스님들을 파계시켰다. 당시 여성당원들은 얼마나 많은 스님을 파계시켰는지 자랑스럽게 발표하기도 했다.

이 시기에 2만 300여 명의 스님이 체포, 구금 또는 처형되고 750여 개에 달하던 사원은 사라졌다. 비공식적인 집계에 따르면 10만명이 넘던 스님들 중 1만명은 즉결 처형되고 7만명은 강제로 결혼을 해야만 했다. 어기 씨의 목소리에 묻어나는 슬픔, 그래도 희망을 떠올렸다. 가장 어두울 때는 해가 뜨기 바로 직전이다. 아픔이 새벽이슬처럼 찰나이길. 몽골인들의 불심이 새벽이슬을 녹이고 있지 않은가.
 
최호승 기자 sshoutoo@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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