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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 사흘전 남긴 마지막 작품”

기자명 김형섭

김형규기자의 문화재바로보기-추사 김정희와 봉은사 판전

거사 김정희의 수행력 담아 고졸함 일품






조선시대 서예가 가운데 추사 김정희만큼 잘 알려진 사람도 드물다. 시(詩), 서(書), 화(畵)에 걸쳐 그가 다른 누구보다 많은 작품을 남기고 있는 것도 그렇거니와 전 시대 어느 글씨체도 따르지 않은 파격에 가까운 ‘추사체’라는 그만의 독특한 서법은 조선 말 우리 문화 역량을 한 단계 높여준 문화적 충격이었다. 누구는 이런 추사 김정희를 기려 우리 나라 최고의 서예가로, 또한 당 시대 중국-일본-우리 나라, 동양 삼국을 통털어 가장 뛰어난 서예가로 추앙하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추사는 단순히 뛰어난 서예가로서의 모습만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는 유교 지상주의 조선에서 보기 드물게 불교에 심취했으며, 삶의 철학으로 받아들였던 조선말을 대표하는 거사(居士)였다. 그는 거사로서의 향취가 가장 짙게 베어있는 많은 작품을 남겼는데, 그 가운데에서도 서울 강남 봉은사 경판전에 남아있는 그의 현판은 거사 김정희의 깊은 불심을 담은 대표적인 작품이다.

어른 몸통 만한 크기로 ‘판전(板殿)’이라고 한자로 쓰여진 이 글씨는 고졸함의 극치를 이룬 필체라고 평가받고 있다. 마치 어린아이가 써 놓은 글처럼 어떤 꾸밈이나 가식이 없고, 글씨가 천진난만하다.

추사 김정희는 그 옆에 칠십일과 병중작(七十一果 病中作)이라고 써 놓았다. 71세의 병든 몸으로 글씨를 썼다는 것이다. 추사 김정희는 이 현판을 쓴 후 사흘만에 임종을 맞이했다. 따라서 ‘판전(板殿)’이라는 글씨가 그의 마지막 작품이자 종필(終筆)인 셈이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이 글씨에 대해 폄하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 글씨가 노자의 반자도지동(返者道之動), 약자도지용(弱者道之用)의 경지에 도달했다는 주장은 추사를 과대 평가하는 이들의 견해로 정직하게 말하면 기력이 쇠하고 병색이 짙은 처지에서 억지로 쓴 못쓴 글씨라는 것.

그러나 이런 관점 또한 그가 임종까지 몇 개월간 봉은사에서 했던 철저한 수행의 결과를 애써 무시한 평가라 할 수 있다.

추사는 임종하기 몇 달 전부터 봉은사에서 기거했다. 상유현의 남긴 [추사방현기]에는 당시의 모습이 자세히 담겨 있는데, 추사는 당시 봉은사에서 기거하며, 스님들과 또 같이 발우공양을 하고 자화참회(刺火懺悔), 즉 수계를 받았다고 한다.

또한 염불을 하고, 사경에도 남다른 노력을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봉은사 현판이 다른 현판과 격을 달리하는 것은 바로 이런 내면적인 수행의 결과를 쏟아 부은 추사의 마지막 역작(力作)이라는 점이다.

봉은사 현판은 포대 화상의 넉넉하고 꾸임 없는 웃음을 보는 듯 한 글씨다. 아무런 가식도, 욕망도, 기교도 없는 ‘무심’만이 그득하다. 부처님께 귀의해 임종을 준비하며 스스로 삶을 반성하고, 참회했던 추사의 텅 빈 마음이 보이는 듯 하다. 봉은사 현판이 추사의 다른 작품들과 격을 달리하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김형섭 기자
hsk@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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