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상·마조 선사의 발자취를 찾아서] ⑦ 사천성 성도가는 길녘
[무상·마조 선사의 발자취를 찾아서] ⑦ 사천성 성도가는 길녘
  • 법보신문
  • 승인 2010.01.18 1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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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무상선사, 티베트 불교에 선〈禪〉을 전하다
 
돈황 문서에 의해 티베트 불교에 선(禪)을 최초로 전한 사람이 무상선사임이 밝혀졌다. 사진은 티베트에 불교를 받아들인 송첸감포왕이 부인 문성공주를 위해 지은 조캉사원.

이전 중국여행에서는 겪어보지 못했는데 이번에는 성가신 일이 하나 생겼다. 바로 숙소를 구하는 문제다. 사천성이 티베트 인접 지역이라 그런지 숙소에 들어서면 직원이 한번 훑어보고, 여권을 보자고 한다. 여권에 승려 사진을 보면 숙소 직원이 단번에 퇴짜를 놓는다. 아무튼 사천성을 여행에서는 한 번 만에 숙소를 구한 적이 없고, 2~3번을 옮겨 다닌 후에야 겨우 숙소를 구할 수 있었다. 2008년 올림픽을 전후해 티베트 사람들에 대한 감시가 삼엄함을 느낄 수 있었다.

어쨌든 이 사천성은 중국 내륙지방에 비해 이국적으로 보인다. 사찰 당우도 티베트양식과 중국양식이 혼재돼 있으며 개인적으로 기도하는 스님들의 모습에서도 티베트식으로 기도하는 분들을 간간히 보았다. 또한 다른 지역에서는 볼 수 없었는데, 티베트 가사나 미얀마 가사를 수한 각 민족의 승려들도 볼 수 있었다.

티베트에 처음으로 불교가 전래된 때는 33대왕 송첸감포(581~649)때다. 이 왕이 티베트를 통일하고 중앙아시아에서 패권을 장악한 뒤 당나라 문성공주를 부인으로 받아들였다. 641년 문성공주가 시집을 가면서 석가모니상과 경서, 경전 360권을 가지고 감으로서 불교가 티베트에 전래되었다. 문성공주가 모시고 온 석가모니상은 라싸 조캉사원에 모셔져 있다. 이후 송첸감포왕은 북인도로 사람을 파견하여 인도글자를 본뜬 티베트글자를 만든 뒤, 인도에서 직접 받아들인 산스크리트 경전을 번역케 해 티베트대장경을 완성시켜 불교국가로서의 위치를 다졌다.

이후 선(禪)이 전래되었는데, 티베트에 최초로 전해진 선사상은 무상대사의 선이었다. 불교사에서는 ‘치손데첸왕 때 북종선(北宗禪)의 마하연(摩訶衍) 선사가 781년 티베트 수도 라싸에 들어감으로서 티베트에 선을 전한 최초의 선사’라고 인식되어 있었다. 그런데 티베트 외교문서와 『바세』의 기록, 돈황 출토 자료가 발견됨으로써 티베트에 최초로 선을 전한 사람은 무상대사로 재평가되었다.

당시 티베트의 치덱첸왕(704~754)이 산시(Sangshi)라고 하는 티베트 사신을 중국에 보내 불법을 구하러 왔을 때, 무상대사가 산시를 지도했다는 기록이다. 치덱첸왕은 왕자 치손데첸(742~797)을 위해 불교를 들여오고자, 산시 등 4인을 중국에 사신으로 보냈다. 산시는 중국황제를 알현하고 1000권의 경전을 가지고 돌아가는 도중에 무상대사를 만났다. 무상은 티베트의 사신들에게 다음과 같이 예언했다.

“지금 네 나라의 부왕은 이미 죽었고, 불교를 배척하는 대신들에 의해 파불 사건이 일어나고 있다. 먼 훗날에 왕자가 왕이 되어 불교 교리에 대해 물을 때, 그 새로운 왕에게 부처님의 경전을 해설해주면 왕은 신심이 일어날 것이다.”

무상대사는 산시 일행에게 불법을 가르치고 3경(『십선경』, 『금강경』, 『도간경』)을 주었다. 산시 일행은 2달 동안 무상의 도량에 머물며 가르침을 받다가 티베트로 돌아갔다. 이들이 귀국해보니 나라의 실정이 무상의 예언대로였다. 산시는 경전을 보호하기 위해 땅에 파묻었다. 이후 세월이 흘러 왕자가 치손데첸왕이 되어 불법을 물을 때 산시가 말했다.
“이전의 조상들께서는 노자경에 따랐으나 나라에 좋은 일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산시는 왕에게 그렇게 언급한 뒤, 오래전에 땅에 파묻었던 경전을 꺼내어 차례로 읽어 주었다. 지금까지 언급한 내용은 티베트의 고사서(古史書)인 『바세(sBa bzhad)』에 전하는 기록이다.

올림픽 전후 티베트인 감시 삼엄

 
중국 사찰에서 무상선사를 만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왼쪽 위부터 베이징 홍라사, 베이징 벽운사, 항저우 영은사.

무상대사의 선사상이 빛을 보게 된 것은 돈황 문서 가운데 「무상오경전」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무상오경전」은 런던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돈황 문서의 스타인 콜렉션(S.6077호)에서 나왔다. 오경전(五更轉)이란 중국선사들의 게송과 법문이 어우러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사실 법문이라기보다는 당시 유행하던 민요에 가까운데 하룻밤 시간을 5등분한 것을 말한다.

어두웠던 날이 점차 밝아지듯이 번뇌와 무명에서 깨달음으로 향하는 정도와 순차를 표현해 놓은 것을 말한다. 즉 천(淺·얕은), 심(深·깊어가는), 반(半·얕지도 깊지도 않은), 천(遷·깊은 곳으로 옮겨가는), 최(催·가까이 오는)는 5경의 순서를 말해준다. 전(轉)은 어둠에서 밝음으로 전환, 무명에서 깨달음으로 전환하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는 지면상 일경(一更)과 삼경(三更)만 소개하기로 한다.

‘일경천(一更淺)’ 衆妄諸緣何所遣 但依正觀且忘念 念念眞如方可顯(중망제연하소견 단의정관차망념 념념진여방가현)
여러 가지 망념과 모든 인연을 어떻게 사라지게 할 것인가?
다만 정관(正觀)에만 의지하고 망념을 잊어버리면
생각 생각에 진여(眞如)가 나타난다.

‘삼경반(三更半)’ 宿昔塵勞從此斷 先除過去未來因 伐喩成規超彼岸(숙석진로종차단 선제과거미래인 벌유성규초피안)
살아오면서 지어온 속진과 번뇌를 이제부터 끊으며
먼저 과거와 미래의 인과를 제거하고
뗏목 비유를 거울삼아 피안으로 건너세.

무상대사가 활약하던 시기는 중국 선종이 기초를 다지는 무렵인데, 무상의 선사상이 중국 초기 선종사 및 티베트에까지 영향을 끼쳤다는 점을 상기할 때 매우 고무적인 일이다. 영국사 도량에서 나와 시골길을 타박타박 걸으며 무상대사와 티베트와의 인연을 생각하며 걷고 있었다. 버스 타는 정류장까지 걸어가는데 비구니 스님 두 분을 만났다. 사천성에 머무는 동안 사찰 도량이 아니면 스님들을 만나지 못했다. 그런데 오랜만에 스님들을 만났다. 그들의 승복 차림새를 보니, 꽤나 더운 날씨인데도 계절을 잊게 할 정도로 두툼한 옷감에다가 썩 깨끗한 차림이 아니었다. 몇 년 전 여행에서도 중국 스님들이 입는 승복을 알고 있던 터라 새삼스러울 것은 없었지만 괜히 내 자신이 부끄러웠다.

또한 티베트나 미얀마 승려들이 입고 있는 가사나 승복은 한국 승려에 비하면 두타행을 하는 모습이다. 국가 경제가 부유한 탓이라고 하면서 승려가 비단옷을 걸치고 좋은 신발을 신는지는 모르겠지만, 한국 승려들의 사치스러움은 부정할 수 없다. 솔직히 중국 승려들이 입는 옷은 한국 승복의 십분의 일도 안 되는 가격이며, 미얀마 승려들의 가사 또한 매우 저렴한 가격이다. 게다가 중국 비구니 스님들이 입는 승복은 비구 스님에 비해 형편이 매우 좋지 않다.

중국 스님들은 계율면에서 엄격한 편이다. 중국 여행 내내 비단 모시옷을 입은 스님을 본적이 없었고, 신발도 천으로 된 것이 아니면 신지 않았다. 음식점에서도 승려가 공양하는 모습을 거의 본적이 없었다. 20세기 초 쇠잔해 가던 중국의 선풍을 다시 일으킨 거목 허운(虛雲·1860~1959) 화상은 계율 지상주의자였다. 그 어른도 스스로 철저하게 계율을 지켰고, 제자들에게나 재가수행자들에게도 계율을 철저히 지키도록 했다. 또한 허운과 같은 세대의 홍일(弘一·1880~1942) 대사는 계율을 연구하고 남산율종을 중흥시킨 분이다. 평생 두타행으로 일관했으며 맨발이나 짚신으로 다니셨고 각처를 행각하며 고고하게 살다간 분이다.

예전에 중국 여행을 할 때는 장거리는 중국비행기를 많이 이용했다. 중국 국내도 보통 3시간 이상이 소요되는 곳이 많기 때문에 기내 식사가 제공된다. 처음 비행기를 탔을 때인데 스튜어디스들이 내게는 음식을 주지 않고 그냥 지나쳤다. 처음에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해가며 ‘왜 내게 식사를 주지 않느냐?’고 했더니 ‘기다리라’는 것이다. 나중에 보니 승복 차림인 내게 채식으로 된 음식을 별도로 준비해 가져다주었다. 이런 일을 몇 번 겪었다. 어쨌든 중국인들에게 ‘승려는 채식을 한다’는 관념이 박혀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도반들이 중국 여행을 간다고 하면 식당이나 비행기 내에서 ‘음식을 먹을 때는 조심해야 한다’는 말을 꼭 일러준다.

여러 면에서 한번쯤 한국 불교계 승려들은 재고해 볼 문제이다. 물론 아직까지는 중국이 사회주의를 오랫동안 고수했던 터라 중국의 승가가 한국 승가만큼 완비되어 있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1953년 중국불교협회 회의에서 계율을 파기하자는 승려도 있었다. 현재도 중국 사찰 내에서 승려가 버젓이 마작이나 노름을 하는 경우도 많이 목격했고, 법당 내에서 사주를 봐주거나 축원해 줬다고 축원비를 내라는 승려답지 않은 승려도 많이 있다. 반면 한국에 올곳이 수행하는 승려도 많이 있다.

계율에 엄격한 중국 스님들

 
왼쪽부터 청두 대자사에 모셔진 무상선사, 시방시 나한사, 신도현 보광사.

중국과 한국 승가를 평가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이렇게 언급하는 것 또한 편견이요, 좁은 소견임을 밝혀둔다. 하지만 한국 승가의 재정돈이 필요하며, 무상대사가 활동했던 사찰을 순례하면서 한국을 떠나와 지내다보니 승려로서의 내 면모, 한국 승가의 일면을 되돌아보게 된다. 사람은 자기가 살던 둥지를 떠나보아야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자신이 몸담고 있는 터전을 객관적으로 보는가 보다.

길에서 만난 비구니 스님들은 아미산에 있는 강원에서 공부하고 있는데, 영국사에 머물고 있는 노스님을 친견하러 간다는 것이다. 아미산 비구니 강원으로는 복호사, 비구 강원으로는 중봉사가 있으며 교육기간은 3년이다. 스님들과 헤어지면서 손을 흔들며 뒤돌아보니 멀리 영국사 도량이 아련히 보인다. 떠나온 지 채 10여분도 안되었는데 무언지 모를 그리움이 내 가슴에 피어오른다. ‘지금 현재의 나는 인생에서 단 한번뿐인 무상대사 행적지와의 인연, 단 한번뿐인 현재 이 순간과 나와의 만남에서 얼마나 소중히 여기고 있는지?’, ‘내 발밑을 살펴보고 있는지(照顧脚下·조고각하)?’를 되물어 본다. 

정운 스님 saribul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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